154화.
기름을 먹인 화살엔 기름 주머니가 묶여 있었다. 충격을 받으면 터져서 기름을 쏟게 만든 얇은 주머니였다.
비록 보름이라지만 구름이 달을 가리면 주머니가 제대로 보이지 않으리라 여겼다. 달이 가려진 순간 쏘아 올린 화살에 묶인 얇은 주머니는 계획대로 곧장 터져 땅에 스며들었다.
“역시 라피는 똑똑해, 내 라이벌이 라피라서 절대 부끄럽지 않아. 덕분에 내가 좀 피곤하지만 말이야.”
파이퍼가 나란히 내 옆을 날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물 속성인 파이퍼와 마법탑 출신 마법사가 비를 내릴 때 이용하는 구름을 만들어내 일부러 달을 가리게 했다. 평원을 덮을 정도의 구름을 만들어내서인지 파이퍼의 얼굴엔 피곤이 내려앉았다.
“좀만 있으면 더 피곤해질 테니까 뒤에 물러서서 쉬지 그래?”
“라피보다 마나와 체력이 약하면 남자로서 부끄럽잖아. 나도 옆에서 지켜볼래.”
“네가 내 옆에 있으면 우리 씨엘이 노려보거든.”
실제로 땅에 붙어 있는 씨엘이 적 쪽이 아니라 나와 파이퍼 쪽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무서워서 어디 살겠나.”
씨엘의 날카로운 황금색 시선을 느꼈는지 파이퍼가 온몸을 떠는 척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근데 말이야. 네 약혼자가 전설의 수인이지? 서부 공작가의 시조가 수인이라 동물의 모습으로 변형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거든. 네 반려 고양이 이름도 씨엘이고 말이야.”
루피노 공작가가 수인의 후예라는 건 유명했다. 비록 그 진실을 눈으로 본 사람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내 반려 고양이 씨엘 대신 같은 이름의 검은 머리털과 황금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있으니 이전부터 씨엘을 알던 사람들도 눈치를 챘다.
“맞아. 우리 씨엘은 수인이야.”
“근데 말이야. 루피노 공작가는 늑대 수인의 후예라던데 왜 씨엘은 고양이야?”
“어? 아, 안 그래도 씨엘한테 물어보니까 대를 이어 오면서 여러 수인과 결합이 된 상태라나.”
그중 강한 유전자가 늑대라서 대부분 루피노 공작가의 핏줄은 늑대 수인이었다. 하지만 씨엘은 늑대가 아니라 선조 중에 존재한 고양이, 아니, 정확히는 고양이를 가장한 검은 표범이 발현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와 합이 잘 맞는 듯했다. 늑대의 성질을 지닌 검은 표범 수인인 씨엘이 바람피울 확률이 제로라는 점에서 그것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몸집이 커지면 내가 안고 다니지 않을까 봐 일부러 고양이 정도의 크기를 유지하는 중인 앙큼한 고양잇과 수인은 파이퍼를 노려봤다.
어둠 속에서 빛이 나는 황금색 눈동자를 본 나는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위가 아닌 앞을 보라는 신호에 씨엘은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비록 어두웠지만 내 손가락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할 씨엘이 아니었다.
“검은 표범 수인이 아니라 강아지 수인 아니야? 네 손짓에 제대로 반응하는데.”
“파이, 너 그러다가 진짜 우리 씨엘한테 죽는 수가 있어. 그러니까 좀 조용히 있어.”
구름 낀 보름밤은 시야를 가려 상황 파악을 어렵게 했다. 하지만 우리만 안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 쪽도 보이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상황이 참 재미있게 돌아갈 때 씨엘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동시에 오른쪽에서 신호탄이 터졌다. 이미 우리 쪽 진영으로 들어온 차이나 군사들은 신호탄이 터지자 멈칫했다.
사방은 고요하고 갈대가 잔바람에 비벼지는 소리만 들릴 뿐일 터이다. 이런 상황이 자주 있었던 터라 차이나 군사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앞으로 진군했다.
신호탄 때문에 주변이 밝아졌지만 이내 어둠에 잠식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갈대숲에서 화살비가 쏘아졌다.
“컥!”
“화, 화살이다. 으앗!”
“매, 매복이다! 전원 방패를 들라!”
어둠 속에서 화살비에 꿰뚫려 사망자가 속출했다. 그간 바람을 일으켜 갈대를 움직여댄 내 노력이 헛되진 않았다. 갈대숲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며 소리를 내도 그게 바람에 갈대가 부대끼며 내는 소리인 줄 안 이들은 고꾸라졌다.
뒤늦게 방패를 들었지만 매복한 이는 이미 뒤로 빠진 후였다. 그와 동시에 씨엘의 왼손이 움직였고 왼쪽 역시 신호탄이 터졌다. 신호탄이 터지면 화살비가 쏟아진다는 학습을 하게 된 반대쪽 이들은 전원 방패를 들어 미리 방어했다.
하지만 정작 화살은 쏘아지지 않았다. 속임수라고 생각하게 만든 작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패를 내렸다.
퍽, 퍼억-
방패를 내린 순간 고깃덩어리에 화살이 꽂힌 듯한 이질적인 소리가 공중에 있는 내 귀에도 들리는 듯했다.
“크악.”
“양쪽에 매복이 있다. 전원 방패!”
방패를 들어 올리는 것보다 화살이 꽂히는 게 먼저였다. 허둥지둥 방패를 들어 올리기도 전에 그 사이로 파고든 눈먼 화살에 적군은 다수의 병사를 잃었다.
때마침 보름달을 가린 구름을 살짝 옆으로 밀어내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해 준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바람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먼지가 뿌옇게 올라오며 함성 소리가 터졌다.
“정면에 대규모 군사가 있다. 마법사 앞으로!”
분명 마법사가 아닌 순수한 인력으로 싸우자고 먼저 제안을 한 적의 외침에 나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워터 애로우.”
“어스 퀘이크.”
각양각색의 공격형 마법이 흙먼지가 일어난 곳을 타격했다. 마법의 난사로 인해 흙먼지는 더욱더 심하게 일어났고 비명이 난무했다.
“적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전원 돌격하라! 전원 돌격! 단숨에 적을 제압하고 사령관을 붙잡아라.”
“사령관을 붙잡은 자는 금괴 한 상자를 주겠다.”
루카스의 몸값이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나와 파이퍼는 씩, 웃었다. 그러곤 얼른 땅으로 내려왔다.
“우와, 고모! 이거 진짜 효과 좋네.”
“그럼, 내가 괜히 네 고모겠니. 이 기회에 좀 보고 배우렴.”
마법사들이 포진한 곳에 간 나는 팔짱을 낀 채 사태를 지켜봤다. 분명 우린 먼저 공격 마법을 쓰진 않았다. 단지 마법으로 눈속임을 썼을 뿐이다. 한데 저들이 먼저 마법으로 공격했으니 우리가 맞대응해도 저들은 할 말이 없으리라.
“으아악!”
“살려 줘어어어!”
“커어어억!”
“아, 아파…….”
흙먼지가 날리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특별히 목소리가 큰 이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를 바람으로 실어다 날랐다.
“아이고, 나 죽네.”
“야, 제대로 연기를 해.”
“소리 내는 것도 힘들어. 목이 터질 것 같아.”
“죽는 것보단 나을 거다. 이 자식아, 라피 아가씨께서 시킨 거나 제대로 해.”
목청껏 목소리를 크게 낸 이들은 기운이 빠지는지 벌러덩 누워서 목을 축이며 다 죽어 가는 목소리를 냈다.
곡소리를 방불케 하는 소리를 실어 나른 마법사들은 연신 땀을 훔쳤다. 바람 속성 마법사가 아니어도 작은 바람 정도는 일으킬 수 있었기에 그들을 나를 대신해 시킨 것이다.
고급 인력을 가만히 놔두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마법탑 측의 마법사들을 신나게 굴렸다.
제 속성이 아닌 마법을 쓰느라 상당히 힘겨워하는 모양새였지만, 도움을 구하는 그들의 시선을 본 파이퍼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합니까. 우리 라피가 시킨 거 얼른 하세요.”
잘 마른 흙을 앞쪽에 많이 뿌려 놓고 바람을 일으켜 일부러 아군의 숫자가 많게끔 속임수를 쓴 나는 피식 웃었다.
“잘 가라. 똥멍청이들아. 쯧쯧.”
내가 혀를 찰 때쯤 적이 흙먼지 속으로 파고들었다.
“으악!”
“미친, 이게 뭐야아아!”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적의 비명이 난무했다. 그도 그럴 것이 흙을 뿌려 놓은 곳에 일부러 구덩이를 파 놓은 것이다. 한데 흙먼지로 시야가 가려졌고 다들 선봉인 기마병이 구덩이에 빠졌다. 심지어는 선봉장마저도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에 픽, 웃음을 터트렸다.
“씨엘!”
적의 선봉이 혼란스러워할 때 씨엘을 부르자 처음으로 우리의 선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라코 공작과 씨엘, 그리고 루카스가 직접 이끈 선봉대는 이미 한 차례 꺾인 차이나의 선봉을 짓밟았다.
“우로!”
“좌로!”
어느 정도 적의 선봉대를 조사 버린 이들이 좌우로 빠른 속도로 갈라졌다. 엎친 데 덮쳐진 적이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불 속성 마법사들이 불화살을 만들어냈다.
“파이어 애로우!”
“윈드!”
무너진 선봉대 뒤에서 빠르게 다가온 적들을 향해 불화살을 쏘았다. 본래라면 사정거리가 멀지 않았지만 바람을 탄 불화살은 쭉쭉 뻗어 갔다.
파이어 애로우를 본 이들은 즉시 방패를 들어 막아냈다. 하지만 전부 막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틈과 틈으로 파고든 파이어 애로우는 제 역할을 다 끝내고 소멸하기 전에 지독한 여운을 남겼다.
잔뜩 말라비틀어진 풀과 좀 전에 석궁으로 쏘아 보냈던 기름에 닿아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 부, 불이다!”
“화공이다!”
“살려 줘!”
손만 대도 부서질 정도로 마른 풀과 갈대는 불쏘시개용으로 매우 훌륭한 재료였다. 거기에다가 기름까지 먹었으니 불이 옮겨붙는 것은 찰나였다. 대지를 붉게 물들인 불은 이내 적에게 옮겨붙었다. 기름을 밟은 이들의 발로 불이 옮겨붙자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아수라장을 지켜본 나는 곧장 앞쪽으로 날아갔다. 마법을 시전하기엔 거리가 좀 멀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가까이 날아간 나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마법 스크롤을 찢었다. 하루에 하나밖에 사용할 수 없는, 마나량을 일시적으로 올려 주는 스크롤을 찢음과 동시에 외쳤다.
“윈드 스톰!”
고요한 공기가 순식간에 이전보다 더 거센 태풍이 되어 몰아쳤다. 선봉대를 지난 태풍은 불길이 치솟은 곳을 덮쳤다. 화력이 세진 불은 그들의 뒤편으로 옮겨붙었다.
“후, 후퇴하라!”
“전원 후퇴!”
눈엔 눈, 마법에는 마법이었다. 기세 좋게 쳐들어오던 적은 이내 중진부터 후진까지 옮겨붙는 불길에 우왕좌왕하다가 건초와 함께 불타올랐다.
이런 게 지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비규환이 다름없었지만 나는 마법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하면 적들을 궤멸할 수 있었다. 그리된다면 다시는 이곳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평소보다 증폭한 마법을 사용해 마나가 쑥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입술을 깨물며 쥐어짰다.
“라피, 이젠 멈춰! 그만해!”
씨엘이 소리치며 내 쪽으로 뛰어왔다. 평소와 다른 씨엘의 외침에도 마법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전쟁을 쌍둥이들이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망타진하기 위해 최대한 정신 집중을 했다.
그때였다.
내 쪽으로 무언가가 쏘아져 오는 게 느껴졌다. 거리를 좁힌 날카로운 물체가 공기를 찢어발기며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정령?
화살이 곡선이 아니라 직선으로 날아오는 것으로 봐서는 바람의 정령의 도움을 받은 게 분명했다. 정령을 공격용이 아니라 보조로 사용한 탓에 내 심장으로 다가오는 화살을 보고도 막을 수 없었다.
동시에 두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던 나는 실드를 치기 위해 얼른 윈드 스톰을 거둬들였다. 동시에 씨엘이 나를 꼭 안았다.
“라피, 안 돼!”
푸욱-
기분 나쁠 정도로 이질적인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나를 안은 씨엘의 정제되지 않은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씨, 씨엘?”
“으. 응? 나 불렀어?”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대답한 씨엘이 사르르 웃으며 나를 보고는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안 다쳤지? 그렇지? 다행이다…… 정말 다행…….”
나를 감싼 팔이 스르륵 풀리더니 씨엘이 내게 제 체중을 온전히 실었다. 순간 차게 식은 손으로 그를 붙잡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바르르 떨리는 화살 깃이 보였다.
“씨, 씨엘…… 씨엘! 정신 차려! 씨에에에에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