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순간 좌중이 싹 가라앉았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정령사가 아닌지라 바람의 정령을 불러올 수는 없었다. 정령사가 된답시고 산에 파묻혀 있다가 실패하고 하산하니 사망신고가 되어 있는 것은 사양이었다.
“바람의 정령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이유가 뭔지 물어도 됩니까?”
루카스의 물음에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싶을 때 파이퍼가 나서서 대신 말했다.
“라피는 바람 속성 마법사입니다. 그러니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요. 정령은 볼 수 없었지만 느낌이란 건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공기 중에 스밀 수 있는 바람의 정령은 첩자로 써먹기에 딱 좋았다. 본디 형체는 없다. 하지만 주인의 의지에 따라 형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말은 하지 못하더라도 타인의 행동은 그대로 따라 할 수 있기에 아마도 내가 말한 대로 지도를 짚으며 움직일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제껏 우리의 공격 계획이 몇 번이나 노출된 이유가…….”
“아마도 예상한 게 맞을 겁니다. 처음엔 긴가민가하며 일부러 군사 수를 줄여 공격을 했지요.”
처음엔 차이나 쪽에 엄청나게 머리가 좋은 군사가 있어서 우리가 공격하려는 루트를 차단한 줄 알았다. 심지어는 매복해서 기다렸다가 치고 빠졌다. 제대로 우리의 계획이 간파당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때부터 첩자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루카스와 밀회를 하듯 만났다. 그러고는 내 의견을 조심히 피력했다. 혹시 몰라 서로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하고 움직여 보자고 말이다.
내 의견을 수용한 루카스는 그때부터 간보기 용으로 깔짝깔짝 건드렸다. 그 결과 50퍼센트 확률로 적이 수월하게 우리의 공격을 틀어막았다.
“그래서 우리의 군사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겁니까.”
“전쟁터에서는 자주 있는 일입니다만, 소를 희생해서 대를 얻을 수만 있다면요.”
아드리안 백작이 수염을 파르르 떨며 말하자 루카스가 분위기를 바꿔 날카롭게 쏘아댔다. 생명의 아이라는 존재로 황실에 입양이 된 루카스의 인자함은 이 전쟁터에서 사라졌다.
현재 자잘한 떡밥을 많이 뿌려서 물고기를 유인한 상태였다. 자잘한 물고기들 사이로 대어가 보이자 고급 미끼를 던졌다. 대어가 미끼를 물면 바로 낚아챌 준비를 한 루카스를 보며 아드리안 백작은 더는 뭐라 하지 못했다.
한 명을 죽여 백 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 한 명을 희생양으로 삼는 게 당연하게 생각되는 곳이 바로 전쟁터였다. 잠시 희생당한 소를 위해 묵념을 하듯 살짝 고개를 숙인 내게 드라코 공작이 질문했다.
“한데 말일세,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저들이 정령을 이용해 우릴 매일 염탐한 건가.”
“그건 아닐 겁니다. 자연친화력이 높아야 정령을 부릴 수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자연을 이루는 마나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정령사의 마나량은 많지는 않습니다.”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마나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는 마법사와는 달리 정령사는 마나량이 적었다. 그들은 마나량보다 정령과의 친화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거기다가 정령이란 존재를 제 곁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을 컨트롤 하기가 힘들어진다는 뜻과 같았다.
그렇기에 정령사가 매일 정령을 이곳에 보낼 수는 없을 터였다.
“정령사를 돌아가면서 투입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정령 자체가 실생활용으로 바뀐 지 오래이고, 대부분 물이나 불의 정령을 선호합니다. 그렇기에 바람 계열의 정령사는 바람 속성의 마법사보다 더 귀한 편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의사들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피부과나 성형외과 쪽으로 몰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정령사도 단 하나의 정령만 부릴 수 있기에 그들은 돈이 될 수 있는 물과 불의 정령과 계약을 했다.
“그렇다면 좀 전에 한 말은 일부러 그들을 속이려 한 거로군. 대단하네, 역시 판테르 공작의 딸이로군.”
“칭찬 감사합니다. 드라코 공작님.”
정령을 속이려고 일부러 에이든에게 내 의견에 무조건 호응하라는 시선을 보냈고 성공적인 연기로 끝맺었다.
“한데 대륙법상 전시엔 정령사의 개입이 금지된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간파하지 못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뭘 어떻게 해서든지 이긴 후에 정령사를 감춰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질문에 대한 답한 나는 할 일이 끝났기에 지휘봉을 루카스에게 건네주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의견을 낸 건 나인데 에이든의 어깨가 묘하게 위로 올라갔다.
“저는 고모의 의견에 무조건 동의합니다. 이보다 더 훌륭할 수 없습니다. 역시 우리 집안의 핏줄을 진하게 타고났…….”
“그 이야기는 그만할래? 나야 면역이 생겼지만 다른 사람들은 귀에서 피가 날지도 몰라.”
내가 티그리스 공작가의 핏줄임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렇기에 에이든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런데도 에이든은 그저 좋아서 전쟁터와 어울리지 않은 웃음을 지었다.
“바람의 정령도 사라졌으니 이젠 마음껏 의견을 내놓으시지요.”
루카스가 드라코 공작에게 지휘봉을 주며 말했다. 그걸 받아든 드라코 공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른 사람에게 지휘봉을 넘겼다.
말은 하지 않아도 내 의견에 동의한다는 표현이었다. 지휘봉을 받아들기가 무섭게 다들 옆으로 건네줬다.
“이로써 판테르 님의 의견에 전부 동의한 것으로 여기겠습니다. 그럼 이 의견에 보완할 점이 있으면 편하게 말하길 바랍니다.”
차이나 제국 쪽 사령관 막사에는 꿀렁꿀렁해 보이는 정령이 지휘봉을 들고 라피가 처음 설명한 대로 움직였다. 정령의 움직임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사반나에서는 이번에 전력을 다해 전면전을 펼친다는 말이로군. 그나저나 저 의견을 내놓은 이가 누구지?”
화려한 제복을 입은 자의 물음에 바람의 정령사가 계약을 한 정령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바람의 정령은 곧장 모습을 바꿨다. 비록 색은 없었지만 정령의 모습을 보아하니 여자였다.
“사반나 측에 있는 여자라면 세라피나 판테르가 분명합니다. 판테르 공작가의 막내이고 티그리스 공작의 가르침을 받은 손녀라서 그런지 이미 마법사의 호칭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래? 마법사로서 자질은 우수하지만, 아버지에게 전술은 배우지 못한 모양이로군. 덕분에 우리가 전쟁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겠어.”
상당한 배경을 지닌 그녀의 발언은 엉망이었지만 사람들이 감히 반대하지 못함을 정령이 그들의 모습을 흉내를 내줘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표범의 새끼가 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거기다 호랑이 굴 속에서 가르침을 받았고 그녀의 머리 위엔 독수리가 날아다니며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고양이 껍데기를 둘러쓴 늑대 한 마리가 붙어 있긴 합니다. 루피노 공작의 아들이라는데, 출전 전에 약혼을 올렸다는 말이 떠돌고 있습니다.”
“사반나 제국의 맹수들이 죄다 세라피나 판테르를 중심으로 포진되어 있나 보군.”
사반나 제국에서 건드리면 재미가 없어질 예정인 라피의 의견이니 감히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실제로 이제껏 그녀가 의견을 낼 때마다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정보를 탈취해서 움직였고 큰 성과를 거두기까지 했다. 어찌 보면 차이나에서 라피는 최고의 조력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보기엔 맹수의 새끼가 아니라 맹수가 하룻강아지를 범해 개를 낳은 것 같군.”
“황태자 전하, 말씀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사반나의 황자가 군사를 이끌고 온 날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 군사를 단번에 해치워 버린 것을 떠올리면 아직도 끔찍합니다.”
사반나 황자가 군사를 이끌고 사령관으로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들은 곧장 환영회를 시작했다. 황가의 핏줄도 아닌 황자를 겁주려 했다. 하지만 오히려 겁은 자신들이 먹고 말았다.
시뻘건 불길이 느릿느릿하게 오는 것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불길이 갑자기 거세지며 감히 피할 수 없는 속도로 몰아닥쳐 그날의 환영회 인원이 전부 산화되고 말았다.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말이다.
마법 때문에 자신들의 공격이 번번이 막히곤 했다. 하루는 갈대숲이 바스락대며 움직여 적군이 숨어 있는 줄 알고 잔뜩 긴장한 채 대열을 정비한 후 일부 기사와 병사를 그곳으로 보냈다.
그때마다 허탕임은 말해 뭐 하겠는가. 바람을 일으켜 일부러 갈대숲을 흔들어 놓은 탓에 그들의 피로도는 지금 극에 달해 있었다. 다들 갈대가 스스슥- 서로 비비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자다가도 경기를 일으켰다. 신경 쇠약 때문에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바람 속성 마법사는 귀한 편입니다. 게다가 불 속성 마법사와 함께 있으니 위력이 상당할 겁니다.”
어떤 속성이든 궁합이 잘 맞기로 유명한 바람 속성 마법사 덕분에 그들은 죽상이었다. 자신들도 마법사를 고용하긴 했지만 바람 속성은 없었다. 대신해 바람의 정령과 계약한 정령사를 데려왔지만, 효율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었다.
“왜 우리 선조들은 마법을 배척했을까. 이 좋은 것을 말일세.”
차이나 황태자 막시밀리언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지만, 전쟁 앞에서 하나로 뭉친 마법탑과 티그리스 가문이 있는 사반나가 이럴 때만큼은 부러웠다.
“그건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앞에 놓인 것을 먼저 해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반나 측에서 대규모 전면전을 하기로 했으니 맞대응을 해야 옳았다. 이럴 때 뒤로 빼는 즉시 국경도 뒤로 밀릴 가능성이 높았다.
“마법사를 배치하지 않기로 한 서편을 받았지만, 전쟁은 이기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들이 깜짝 놀라 마법사를 배치하기 전에 우리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꿀꺽하면 그만이네.”
전면전은 속전속결로 하는 게 옳았다. 그렇기에 그들도 상당히 바빴다. 초반에 승기만 잡으면 된다는 생각에 출전할 군사들 중간중간에 마법사를 꽂아 넣었다. 상당히 치졸한 방법이었지만 자고로 역사는 이기는 자가 쓰는 것이다.
그들은 역사서에 쓰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쓰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 * *
전투는 낮이 아닌 밤에 시작되었다.
차이나의 군사들이 이동한다는 정찰병의 보고에 즉시 아군도 대열을 정비했다.
“석궁 부대! 앞으로!”
안토니오 자작의 명에 궁수들이 전원 앞에 배치되었다. 마른침을 삼킨 이들이 전원 석궁에 화살을 메겼다. 아직 적이 사정권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안토니오 자작은 지시받은 대로 움직였다.
보름달이 구름에 가리는 것을 본 안토니오 자작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소리쳤다.
“쏴라!”
피융-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석궁 부대가 활을 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밤하늘을 까맣게 수놓은 화살이 차이나 측의 영토에 채 가지 못한 채 곤두박질쳤다.
그걸 본 차이나 측은 비웃으며 말했다.
“사반나가 드디어 미쳤나 보군.”
“그러게 말입니다.”
사정권도 아니건만 자신들의 위용을 먼저 알리려는 듯 화살 세례를 날린 사반나를 욕하면서 피식 웃었다. 멍청한 지휘자가 오늘따라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럼 우리도 이제 이동하지.”
달이 구름에 가린 탓에 자신들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막아 줄 것으로 여긴 차이나 군사들은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제 영토에 꽂힌 화살에 조그만 무언가가 매달려 있는 것조차 가려 줬다는 것을 말이다.
“석궁이면 사정거리가 긴데, 평소보다 짧게 화살이 떨어지면 주변을 살펴보는 안목 정도는 가졌어야지. 우리 에이랑 제이보다 똥멍청한 것들이 저기 다 모여 있었네.”
공중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라피가 연신 비웃으며 밑을 바라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