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152)화 (152/164)

152화. 

전쟁터는 말 그대로 살육의 현장이었다. 이성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 병사들은 병장기를 들었다. 인정을 베푸는 것과 동시에 제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모든 것을 보금자리에 두고 온 이들은 인간이길 포기한 현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 나갔다.

“사망 122명, 부상 702명입니다만 중상자가 많아서 사망자가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루카스의 옆에서 드라코 공작이 기계처럼 읊었다. 그걸 들은 루카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역시 자잘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황자랍시고 사령관이 되었다고 후방에서 안전하게 있진 않았다.

타의 모범을 보여야 한 루카스는 직접 통솔하며 군사를 이끌고 나가기도 했다. 제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는 신성력이 있었지만 그런 곳에 쓸 힘을 비축한 루카스는 좌우를 봤다.

“차이나 측의 피해는 어느 정도입니까.”

“아직까진 파악하진 못했습니다만 최소한 저희보단 많은 편입니다.”

계속되는 소모전에 다들 피곤이 누적되어 있었다. 분명 봄이었는데 어느새 가을이 되었고 겨울로 접어들었다. 다행히 두보레 평야에서 거둔 곡식을 군량미로 사용하며 보급이 끊기진 않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차이나의 국경 침범이 빈번해졌다.

서로 밀고 당기는 신경전 속에서 차이나 측에서는 한 번도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 측에서 사신을 파견하기는 자존심상 할 수 없었다.

“드라코 공작님은 앞으로 이 전쟁이 어떤 양상이 될 것 같습니까?”

“전쟁터란 자고로 변수가 많은 편입니다만…… 차이나가 두보레 평야를 두고 물러서진 않을 것 같습니다. 조만간 전면전을 펼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린 나를 억지로 데려가려 했던 드라코 공작이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의 집중 화력에 말도 제대로 못 한, 공작 중에서도 능력 없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나름대로 제 몫을 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식적은 아니지만, 내 막사로 와서 예전에 있었던 일을 사과하기도 했다. 황제가 내린 명을 행한 걸 사과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리된다면 황제의 명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는 꼴이 되니 말이다.

‘판테르 양, 그땐 미안하게 되었네. 나도 자식 키우는 아비 입장에서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감히 폐하의 명을 거부할 순 없었지.’

매우 담백한 사과를 한 드라코 공작은 내가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곧바로 나가 버렸다.

그 후로 나와 드라코 공작 사이가 좋아지진 않았다. 하지만 더 나빠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그의 능력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본인이 사령관이 되어도 모자랄 입장인데 황제의 뜻을 받아들여 전쟁 초짜인 루카스를 사령관으로 모셨다.

루카스의 옆에서 보좌하며 조금씩 제 능력을 발휘했다. 황제의 골수분자이면서 유일하게 전쟁을 반대했다는 드라코 공작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작년과 올해 농사를 망친 탓에 차이나에서 타국에 식량을 사들인다 한들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니 대규모 전면전을 계획할지도 모릅니다.”

일전에 라파엘과 잠시 통신을 한 적이 있었다. 오죽이나 식량 사정이 안 좋았으면 제대로 된 농사지을 땅이 있지도 않은 실베스터 왕국에 도움을 청했겠는가.

그 정도로 급한데도 차이나 측에서도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듯 화평을 원하는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우리만 넘으면 두보레 평야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야망이 그득한 채 간을 보는 중이었다.

“고모, 혹시 형님이랑 통신했어?”

“어, 정확히는 라엘이…… 크흠, 실베스터 왕자님이 먼저 연락한 거지만. 그곳에도 식량과 철을 구입하려고 사신을 보냈다고 하더라고.”

이곳에 있는 이 중 몇몇은 라파엘이 오기만 하면 나를 졸졸 따라다닌다는 것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 막사에서 회의 중일 때 누군가가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왔다. 겨울임에도 땀을 훔친 이는 곧장 손에 든 종이를 드라코 공작에게 건넸다.

“차이나 측에서 화살을 쏘았는데 이 종이가 묶여 있었습니다.”

기사의 말에 드라코 공작은 곧장 종이를 루카스가 잘 볼 수 있게 펼쳤다. 그걸 본 루카스는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이번 전쟁에서 마법사는 빠지라는군요. 순수한 인간의 힘으로 싸우자고 합니다.”

사반나는 마법탑과 티그리스 가문이 마법사를 전문적으로 육성했다. 그에 비해 차이나 측에도 마법사가 있긴 했지만 거의 다 타국 출신이었다. 대대로 마법을 배척한 탓에 자국 출신의 마법사가 별로 없었다.

“얕은수를 쓰는 게 다 보이는군요.”

전면전이 있을 땐 마법사는 되도록 나서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아군도 마법에 휘말려 죽을 수 있기에 대기만 했다. 물론 나는 간간이 윈드 애로우를 날려 줘서 적을 잡거나 자주 바람을 일으켜서 일부러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씨엘은 나와 같이 출전해서 내 곁에 적의 공격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에겐 마법탑과 티그리스 공작가의 핏줄이 있음을 알기에 경계한 겁니다. 그에 비해 차이나는 마법사층이 얕아서 순수 마법으로만 싸우면 무조건 질 게 뻔하니 마법사는 빼자고 한 듯합니다.” 

드라코 공작의 말에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의 전력 중 하나인 마법사를 빼기엔 리스크가 심할 것이다. 게다가 차이나 측의 말을 무조건 신뢰할 수도 없었다. 우리가 빠졌는데 저쪽에서 마법사를 내세우면 낭패니 말이다.

“이러지 말고 비밀리에 대기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일반 병사처럼 꾸며서 말이지요.”

두보레 백작의 말에 파이퍼가 작은 탄성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싸한 방법이었다. 적이 마법사를 내세우지 않으면 우리도 물러서면 된다. 하지만 몰래 마법사를 투입하면 우리도 전면전에 나서면 그만이었다.

“마법사가 아닌 존재를 내세우면 어떻게 합니까? 예를 들어 정령이라든가.”

“어차피 지금의 정령은 살상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정령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피해를 많이 받진 않을 겁니다. 게다가 대륙 협정에서 정령은 전쟁 중에 사용할 수 없기에 괜찮습니다.”

책에서 본 고대의 정령은 상당한 살상력을 지닌 살인 병기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지금의 정령은 살상력을 뺀 말 그대로 실생활용으로 사용되는 중이었다. 그 예로 식사 후 양치 대용으로 물의 정령을 잘라 썼다.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뒤를 쓱 돌아봤다. 언젠가부터 등 뒤가 서늘한 듯 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눈에 익은 기사들 외엔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한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씨엘의 귀가 예민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씨엘, 괜찮아?”

“으, 응? 아! 괜찮아. 그냥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수인이라 씨엘의 감각은 매우 예민한 편이었다. 그의 반응을 보고 뭔가 짐작이 갔지만 딱히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저 차이나에서 보낸 서편에 답장을 쓰는 루카스를 봤다.

“그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우선 해 준다고 답장을 적었으니 똑같은 방법으로 보내십시오.”

루카스의 손에 들린 종이는 길게 접혀서 차이나에서 쏜 화살에 묶었다. 루카스에게 화살을 받은 안토니오 자작이 활을 챙겼다.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해 실제로 날아다니는 새도 쏴 떨어뜨리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안토니오 자작이 활을 쏘러 나갔고 이내 막사 안은 조용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다물고 안토니오 자작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제 할 일을 마친 안토니오 자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차이나 측에서 화살을 수습해 가는 것을 확인하고 왔습니다.”

활을 잘 쏘는 동시에 시력 또한 좋은 안토니오 자작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은 전면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전략을 짜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들 의견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판테르 님께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루카스가 내게 지휘봉을 내밀며 먼저 내 생각을 들려주길 원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옆에 있는 에이든을 향해 찡긋 웃었다. 친인척 간에 할 수 있는 눈인사였지만 그게 뭔지 대충 안 에이든은 고개를 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루카스에게 건네받은 지휘봉으로 벽에 걸린 지도를 딱딱 짚었다. 평원을 사이로 두 국가가 대치 중이었다. 피로 흠뻑 젖은 평원을 가리킨 나는 주변을 슬쩍 봤다.

“작년부터 자잘한 소모전이 있었고 그로 인해 각자 많은 피해를 입었지요. 이번엔 저희가 밀리기까지 했고요.”

거기까지 들은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말인데 전군을 투입해 쓸어 버리는 게 좋을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쓸어 버릴 건가요?”

루카스의 물음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지도를 짚었다.

“이곳에 차이나의 군대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곳으로 전군을 투입해서 빠른 속도로 돌격해서 적의 사령관을 잡고 흔들면 전쟁이 끝날 것입니다.

다들 내 의견을 듣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 뒤에 있는 엄청난 배경 때문에 무작정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진 못했다.

“고모 말이 맞아. 어느 누가 지금 고모의 의견을 무시하겠어. 감히 3대, 아니 4대 공작가를 무시하는 게 되는데.”

씨엘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이럴 땐 서부가 내 시댁이 될 것을 은연중에 말하며 내 배경 중 하나로 집어넣은 에이든이었다. 에이든의 반협박성 말에 절반 이상이 마지못해 동의하듯 억지로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매우 만족스러운 모습에 에이든은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딱히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통한 에이든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거의 내 의견으로 기울어지려 할 때 방금까지 느껴졌던 익숙한 느낌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좀 전에 한 말은 기억 속에서 지워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인데 다시 설명해도 될까요? 사령관님.”

“물론이지요.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지금은 다양한 의견을 모아서 그중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채택하고 보완하는 자리니까요.”

루카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헛기침을 하며 지휘봉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는 현재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탓에 갈대가 무성하게 자란 상태입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지 않아서 바짝 말라붙었지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곳에서 잘 자란 키가 높은 갈대가 가득했다. 게다가 작년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건조하기도 했다. 곡창 지대에 국지성 폭우가 내려 홍수로 모든 것을 잃은 차이나였건만 이 지역은 지독한 가뭄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두 나라 사이에 있는 강줄기가 가뭄으로 얕아진 상태라 바로 건너갈 수 있을 정도였다. 단숨에 쳐들어갈 수 있는 상태였고 실제로 차이나 쪽에서도 이곳을 건너와 자잘한 전쟁을 일으켰다.

한동안 내가 새로 제시한 의견을 듣던 드라코 공작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제껏 그 어떤 전술보다 훌륭하네, 마법사라서 전술엔 약할 줄 알았는데 판테르 공작에게 제대로 배웠나 보군.”

“칭찬 감사합니다만 아빠가 아닌 할아버지에게 배웠습니다.”

아빠는 인간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기에 굳이 전술이 필요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엄마가 전사했을 때 두 눈이 뒤집힌 아빠가 왕국군에 돌격해서 쓸어 버린 일화로 유명했다.

아빠가 가르치는 것은 몸으로 부딪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기사가 아닌 나는 아빠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어서 할아버지에게 배웠다. 마법사란 제 능력 잘난 맛에 싸우다가 반격당한 그 순간 허점투성이가 되니 주변 지형과 물건을 잘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역시 마법사로서 티그리스 공작님은 존경해 마땅한 분이시지.”

마법탑의 차기 후계자의 말에 뒤에 기립한 이들이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줬다. 아무리 한배를 탔다고 한들 뭍에 도착하자마자 자연스레 갈라질 운명이었다.

“한데 말일세. 왜 처음 말한 의견과 다른 건지 물어도 되겠나?”

드라코 공작의 궁금증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첩자로 잠입한 존재가 있었습니다. 바람의 정령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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