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얀 경의 안내를 받아 내가 쉴 막사가 있는 곳으로 가던 중에 그가 걸음을 멈췄다.
혹시 내가 본인의 머리카락을 보고 솜사탕을 떠올린 것을 안 건가.
앞장서서 걷던 얀 경이 돌아보더니 뭔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엄마와 아빠를 존경한다고 말하려는 건가요?”
상대방의 입을 조금이라도 쉬게 해 주기 위해 내가 먼저 운을 뗐다. 하지만 얀 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게 아닙니다. 혹시 사하라 시장에서 솜사탕 파는 상인을 기억하십니까?”
“솜사탕이요? 당연하지요. 제가 매년 그곳에 갈 때마다 가는데, 아저씨가 솜사탕을 크게 부풀려 주셔서…… 어, 이제 보니 아저씨가 아들이 솜사탕 닮은 기사라고 하셨는데.”
“네, 맞습니다. 아가씨께서 매년 아버지의 솜사탕을 사 주신 덕분에 제가 기사가 될 수 있었지요.”
솜사탕처럼 몽실몽실 포근포근한 미소를 지은 얀 경을 본 나는 픽, 웃었다. 솜사탕이 얼마나 한다고 내가 그걸 하나 사 먹은 것 가지고 기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아가씨께서 매년 솜사탕을 사 드시는 모습을 본 이들이 전부 아버지한테 달려왔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카데미에 다닐 정도로 수익이 엄청났답니다.”
한마디로 내가 솜사탕을 들고 다니며 먹은 게 광고 효과를 낸 모양이었다. 매년 같은 곳에서 솜사탕을 사서 먹었으니 말이다.
“어쩐지 솜사탕을 엄청 크게 만들어 주시더라. 나 이번 일 끝나면 아저씨한테 가서 광고비 달라고 해야 할까 봐요.”
“크큽, 지금 아가씨를 위해 커다란 솜사탕 만들기 연습을 하고 계실 겁니다. 아가씨, 보잘것없는 솜사탕을 드셔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기사가 될 수 있었어요.”
“무슨 말인가요. 내겐 솜사탕은 추억 그 자체랍니다. 그리고 솜사탕 덕분에 지금의 올케도 만났고요. 오히려 제가 감사할 일이죠.”
막사로 가는 내내 솜사탕 이야기로 달달함을 풍겼다. 이곳이 과연 전쟁터가 맞는지, 나와 에이든의 마법으로 좀 전에 사람이 죽은 게 맞는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아가씨, 이곳이 묵으실 곳입니다. 혹시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말씀만?”
“말씀만 하신다면 최선을 다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아가씨.”
언제부터인가 얀 경은 나를 성이 아니라 아가씨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딱히 내게 작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사도 아닌 상태라 그리 부르니 친근감이 느껴졌다.
얀 경을 보낸 후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뭐랄까. 엄청 휑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책상 하나에 간이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하지만 여긴 전쟁터이고, 전쟁터에서 이런 곳에 묵어야 하는 것에 불만을 표하진 않았다.
아빠가 미리 말씀해 주셨다. 전쟁터에서는 물자가 부족해서 개인 막사를 내주는 건 고위급 장교에게나 해당되는 거라고, 적당한 지위를 지닌 이들은 단체로 막사를 쓰곤 한다고 했다.
“으음, 침대가 너무 작다.”
나와 함께 안으로 들어온 씨엘은 침대 사이즈에 먼저 불만을 표했다.
“그러고 보니 씨엘의 막사는 어디야?”
“없어.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랑 같이 쓰라는 것 같은데…… 약혼녀를 두고 딴 놈이랑 몸을 비비적대고 싶진 않으니 여기서 잘 거야.”
서부 대표로 온 씨엘이었다. 그러니 그에게도 개인용 막사가 준비되어 있을 터였다. 한데 씨엘은 어깨를 으쓱이며 내 막사에서 지내길 원했다.
“같이 있어야 라피를 지킬 수 있으니까.”
“씨엘, 여긴 전쟁터야. 전쟁터에서 남녀가 같은 공간에서 지내면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어.”
“전쟁터에서도 사랑은 꽃피는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말이나 못 하면.
수인인 것을 숨긴 채 내 곁에서 나와 모든 것을 함께해 온 씨엘이었다. 내가 책을 읽을 때마다 항상 옆에서 식빵을 구웠다. 다행히 내가 빨간 책만 읽은 게 아니기에 어느 정도 문학적인 소양을 익힌 씨엘은 간이침대에 앉았다.
삐걱대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래서야 라피랑 밤 생활은 못 하겠네. 귀가 좋은 놈들은 이 소리를 기똥차게 들을 테니까.”
“제발 부끄러움을 가져 줘. 여기에서 그걸 할 생각이었어?”
“아버님과 형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이곳이잖아. 약혼한 후로 라피랑 같은 방에서 잘 수 없었으니까.”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아직 제가 보기엔 꼬꼬마인데 아무리 서부 후계자라고 하더라도 우리 고모에게 침 바르려고 하면 안 되지요.”
마침 안으로 들어온 에이든은 팔짱을 낀 채 씨엘을 슬쩍 보았다. 미래의 고모부를 보고도 에이든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어린 것이 발랑 까졌다는 시선으로 보는 듯했다.
“에이, 왔구나. 이곳에 오려거든 나한테 말이라도 할 것이지. 네가 나를 배웅해 주지 않아서 좀 서운했었거든.”
모든 가족이 죄다 나와서 배웅했는데 에이든만 없어서 약간 심통이 났었다. 한데 나보다 앞서 이곳에 와 있었다는 것에 섭섭했던 게 미안해졌다.
“뭐 어쩌겠어. 우리 말랑 콩떡 고모를 볼 수만 있다면 지옥 불에서도 떡꼬치를 구워 먹을 수 있어. 그나저나 쌍둥이는 어땠어? 쉽게 떨어지려고 했어?”
그 쌍둥이들이 저에겐 얼른 가라고 등 떠밀어서 엄청 서운했다는 말을 한 에이든이었다.
“처음엔 맛있는 거 사 오라고 하더니, 당일엔 울며불며 난리가 아니었지.”
쌍둥이를 억지로 떼어놓느라 사비나와 마리엘이 고생 좀 했다. 가지 말라고 우는데 나중엔 꺽꺽대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아이를 억지로 떼어 놓고 온 나는 만일 내 자식이 저리 울었다면 한 발도 떼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놈들은 내 자식도 아니야. 내가 갈 땐 가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던데 진짜, 어휴…… 그런 김에 고모가 키우는 건 어때?”
“응, 꺼져.”
내가 단호하게 쳐냈지만 에이든은 뭐가 그리 좋은지 웃어만 댔다. 마치 티그리스 공작저에서 만나 잡담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책상에 걸터앉으며 내 침대에 나란히 앉은 에이든과 씨엘을 봤다.
“이런 사달이 일어난 이유가 뭐야?”
“뭐긴, 교역 때문이지.”
“교역에 무슨 문제가 있었어?”
“응, 문제가 없었는데 생겼어. 작년에 차이나에서 엄청난 자연재해로 곡식 수확량이 줄었거든.”
안 그래도 작년에 차이나에서 이상기온 현상으로 홍수가 나서 죄다 쓸어가 버렸다는 말을 언뜻 들은 기억이 있었다. 한데 그것도 모자라 남은 곡식은 홍수로 생긴 병해충 피해를 입어 수확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에이든의 입을 통해 들었다.
“하아, 그렇다는 것은 곡식 수확량이 줄어들어서 우리나라에 교역량을 늘려달라고 공문을 보냈는데, 황제가 거부한 거야?”
“고모가 말한 게 맞아.”
“일부러 이런 판을 짠 것 같은데. 차이나의 곡식 수확량이 감소할 때까지 참 오래도 기다렸네.”
“거기다가 차이나는 신을 믿되 유일신이 아니라서 그것도 걸고넘어진 것 같아. 신벌을 받았다고 말이야.”
에이든의 말에 서서히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사반나 중 동서남북에서 박해를 받다시피 한 신전이 이번 기회를 노려 차이나에 진출하려는 속셈이 보였다.
“간교하기 짝이 없네. 어차피 지금은 신관들에게 신성력은 거의 존재하지도 않잖아. 오히려 루카스의 신성력이 높은 편이지.”
몇 년 전, 황실 연회에 갔다가 클레어런스의 개인 정원에서 루카스를 만났었다. 정원의 꽃이 너무 탐스러워 보여 허락을 받고 꺾었는데 그때 꽃의 줄기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잡았다가 손에 상처가 난 적이 있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때 씨엘이 달려들어 상처를 핥아 줬다. 침 묻힌다고 나을 상처는 아니었다. 마법을 시전해서 상처를 낫게 하려 할 때 루카스가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내 손을 잡고는 두 눈을 감았다. 순간 천사가 강림이라도 한 듯 몽환적인 분위기가 루카스를 감쌌고 동시에 내 손도 깔끔하게 나았다. 그때 신성력이라는 것을 처음 겪었다.
루카스가 대신관이라고 하면 믿을 정도로 그때의 신성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여하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렇긴 하지. 한데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끝날 문제 아니야? 곡식 수출량만 늘리면 차이나에서 침범하지 않을 텐데.”
원론적인 것만 해결하면 굳이 차이나가 이곳을 침범하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게 내 말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잠시 생각하던 씨엘이 처음으로 제 의견을 말했다.
“이미 한 번 안 된다고 했는데 황제가 교전이 일어났다고 자존심 굽히고 수출량을 늘릴 리가 없잖아. 게다가 차이나도 이번 기회에 이곳을 차지하려고 작정하고 덤빈 것 같아.”
실제로 두보레엔 광활한 평야가 존재했다. 그렇기에 이곳에 교역소가 설치되었고, 차이나와 거래를 할 수 있었다.
“멍청한 황제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간 거네. 이 모든 것을 제국에 대한 충심으로 받아들일 거고. 하아, 진짜 누구 아버지인지 대가리 한 번 열어 보고 싶다.”
“굳이 대가리를 열려고 하지 마. 열어 봤자 파스타 면만 그득할 거니까.”
능력 없는 황제가 분명했다. 전쟁을 무서워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떠맡겨서 영토를 늘렸다. 밑에 있는 존재의 희생과 능력으로 이룩한 모든 것을 제가 한 것처럼 잘 포장했다. 그런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후대에 황제는 영토 확장을 한 성군으로 칭송할까?”
“아니,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데 영토만 확장했다고 성군이라 하겠어. 여러 사람에게 휘둘리기만 하고 제 본분을 다하지 않은 멍청한 황제로 평가받을 거야.”
깊은 한숨을 내쉰 에이든은 황제를 갈아 버리고 싶다고 연거푸 말했다. 물론 밖에 들리지 않게 마법으로 처리했지만.
“이제 할 말 다 한 것 같으니 이만 가 봐.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헙! 고모, 너무해. 어렸을 땐 나랑 같이 잤으면서, 이젠 다 컸다고 나를 버리는 거야? 억!”
이곳에 막 도착한 탓에 피곤했다. 에이든을 얼른 돌려보내려고 손짓하며 나가라고 했건만 엉뚱한 소리를 하다가 씨엘의 발에 차였다.
쌍둥이 아빠가 정강이를 붙잡고 깡충깡충 뛰는 모양새가 좀 안타까웠지만 치료해 주진 않았다. 알아서 치료를 한 에이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랑 콩떡 고모를 키워 놨는데 소용이 없다니깐, 예전엔 나만 보면 콩가루가 털릴 정도로 달려왔는데.”
“그건 너 결혼시키려고 그런 거잖아. 내가 그때 진짜 콩가루 털리게 뛰어다닌 거 생각하면 진짜 아직도 아찔해.”
“언제는 내리사랑이라며! 고모, 사랑이 식었어?”
“어, 식었네. 파삭 식어 버렸어. 이 일을 어쩌면 좋지, 으음, 혹시 알아? 에이가 지금이라도 내 앞에서 재롱을 부리면 사랑이 다시 생길 것 같기도 해.”
“미안해, 고모. 얼른 쉬어. 이만 나가 볼게.”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가라고 해도 움직이지 않던 에이든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얌전하게 혼자 나가지 않았다.
“바로 옆에 막사가 있습니다. 그러니 같이 가시지요. 미래의 고모부님!”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씨엘을 붙잡은 에이든은 나를 향해 상큼한 미소를 짓더니 데리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