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차이나 제국과 국경이 맞닿은 두보레에 군장을 푼 이들은 피로를 풀기도 전에 막사를 짓고 불을 피웠다.
“여기가 두보레구나. 누가 보더라도 평범한 곳이었을 텐데.”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몇 차례 교전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주변엔 핏자국이 그득했다. 피비린내가 공기를 타고 퍼졌다. 후각이 예민한 씨엘이 코를 찡긋거렸다.
이곳에 터전을 일구고 사는 이들은 이미 저 멀리 피난을 간 상태였다. 마을을 약탈한 차이나 제국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완벽하게 파괴해 버렸다. 쉽게 마을을 재건할 수 없을 정도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이 차이나 제국과 교역을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규모가 상당히 컸었다고 들었는데 집터만 남기고 완전히 허물어졌군요.”
내 앞에 선 루카스 황자가 언덕배기에서 파괴된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생명의 아이로 떠받들어져 황제의 양자가 된 루카스 황자의 눈동자가 착잡해 보였다.
“황자님께서 이리 군사를 이끌고 와 주셔서 모두의 전의가 많이 올라갔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영주인 두보레 백작이 군사를 끌고 온 황자를 보며 옅은 안도감을 내비쳤다.
“그렇습니까? 후우, 그럼 이만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라피, 아니 판테르 님과 루피노 님도 같이 가시지요. 이곳에 먼저 와서 진지를 구축한 이들과 같이 인사를 하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네, 그러도록 하지요.”
평소엔 제 형인 클레어런스를 따라 라피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곳은 공적인 일로 모인 곳이기에 루카스는 내게 예의를 갖췄다. 굳이 우리가 친하다는 것을 알려서 좋을 게 없기에 루카스의 부름에 서운함은 느끼지 않았다.
아직은 사령관이 되기엔 턱없이 어린 편인 루카스를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드라코 공작이 참전했다. 저 면상을 보니 아빠가 이곳에 안 오기를 천만다행인 것 같다. 안 그랬다가는 차이나와 싸워 보기도 전에 내전이 일어났을 게 분명했다.
루카스가 사령관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전원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자리가 몇 개 보였지만 일하느라 바빠서 바로 이곳에 오지 못한 듯했다.
“오늘 좋은 곳이 아닌 이곳에서 만난 것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루카스가 먼저 운을 뗐다. 다들 경직된 자세로 앉아 루카스를 바라봤다. 황실의 대표로 온 루카스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끝마친 후 서로 인사하는 자리를 가졌다.
“여긴 다들 알다시피 드라코 공작님입니다. 그리고 같이 오신 분은 동부를 대표해서 오신 세라피나 판테르 님, 서부를 대표해서 오신 씨엘로 루피노 님이십니다.”
호명이 되자 나와 씨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간략하게 묵례를 한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판테르 가문의 딸이라면…… 파멸의…….”
“그 어쭙잖은 주둥이를 놀리는 분이 계실 시엔 특별히 형님께서 본보기로 패대기를 치라고 하셨습니다. 참고로 아바마마께서 판테르 님을 하늘에서 보낸 천사님이라 칭하며 전의를 북돋기 위해 이곳으로 보내신 겁니다.”
감히 황제가 직접 보냈다는 말에 방금 안 좋은 말을 하려던 인간의 입이 다물렸다. 하지만 불만이 많은 투였다. 내가 사교계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 나에 관련된 정보가 없으니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아바마마께서 단순히 판테르 님을 천사로 지칭하며 보내신 건 아닙니다. 대다수 모르겠지만 티그리스 공작가의 피를 이어받은 판테르 님은 마법탑 측에서도 승인한 정식 마법사입니다.”
아픈 자를 감싸주며, 전쟁에 나아갈 이들에게 축복의 키스를 해 주는 존재가 아님을 밝혔다.
그 말이 정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낯익은 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다른 곳을 둘러보느라 좀 늦게 왔습니다.”
흑발에 흑안을 지닌 키가 큰 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모습을 본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먼저 와서 도와주고 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모르간 님.”
차기 마법탑주이자 모르간 후작가의 후계자인 파이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명에 따랐을 뿐입니다. 황자 전하, 아니 사령관님.”
간단한 인사를 한 후 고개를 든 파이퍼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순간 가느다란 검은 눈동자가 눈에 띄도록 커다래졌다.
“라, 라피? 라피 맞지? 세상에! 네가 온다는 말은 들었는데 진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파이퍼는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현했다. 차기 마법탑주인 모르간 후작가의 핏줄이 사이 안 좋은 티그리스 공작가의 핏줄을 안은 역사적인 일이 펼쳐지고 말았다.
순간 다들 얼어붙었지만 파이퍼만은 내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으며 비비적댔다.
“저기, 파이? 여기 딴 사람이 많이 있는데 이렇게 격한 표현을 하면 좀 민망해져서 말이야. 좀 떨어져 줄래?”
“싫어. 몇 년 만에 만났는데, 이미 강산이 한 번 변했다는 거 알아?”
“강산이 한 번 변했든, 두 번이 변했든 이만 떨어지시지. 파이퍼 모르간.”
밀어내려 했지만, 마법사라 할지라도 남자인 파이퍼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파이퍼를 떨어뜨린 이가 바로 에이든이었다.
“에이? 네가 여기 무슨 일로…….”
아무도 내게 에이든이 여기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루카스와 함께 이곳에 오려고 사하라에서 행군할 때도 에이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단순히 집안에 문제가 터져서 에이든이 티그리스 영지로 간 줄 알았다.
한데 그런 줄 알았던 나이 많은 조카님이 두보레에 있자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에이든을 봤다.
“고모를 놀래켜 주려고 왔지. 사실대로 말하면 가위바위보해서 내가 이겨서 왔어. 할아버지가 고모만 여기 못 보낸다고 우겨서 아버지랑 제이든이랑 같이 가위바위보를 했거든.”
“원래 이기면 이곳에 안 오는 게 정상 아니니? 아, 몰라! 됐고 에이는 나중에 나 좀 보자. 그리고 파이 넌 더 이따가 보고.”
“응.”
내 말에 두 마법사 가문의 후계자가 동시에 대답한 후 자리에 착석했다. 본래라면 두 가문은 동석조차 하지 않을 터였다. 얼굴을 보자마자 서로 죽이네 살리네 해도 모자랄 가문의 남자들이 선을 지킨 채 나란히 앉았다.
“라피, 저 녀석 나중에 멱을 딸까?”
“그랬다가는 차이나와 싸우기도 전에 모르간에서 영지전을 일으킬 거야.”
여전히 나를 보며 방긋 웃는 파이퍼를 본 씨엘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내가 허락하면 파이퍼를 죽은지도 모르게 죽이고도 남을 씨엘이었다.
“크흠흠, 그럼 아직 못다 한 소개를 하도록 하지요. 방금 오신 분은 에이든 티그리스 님으로 세라피나 판테르 님의 조카 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파이퍼 모르간 님은 마법탑의 후계자로써 역시나 세라피나 판테르 님의 친구 중 한 분이시죠.”
한 마디로 나를 건드리면 재미없다는 걸 직간접적으로 말해 준 루카스는 나를 보며 살짝 웃었다. 마치 ‘나 잘했지?’라고 묻는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마법탑과 티그리스 가문의 우정이라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파이퍼와는 클레어런스의 도움을 받아 황태자 전용 휴게실에서 만나 안부를 묻고 헤어지는 정도였다. 그 후엔 통신구로 대화를 나누는 친구였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나와 파이퍼 사이를 모르는 건 당연했다.
“라피는 저의 은인이지요. 아니 우리 집안의 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일리나스 자작님.”
“네, 도련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판테르 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겁니다.”
파이퍼와 일리나스 자작의 말을 들은 나도 가만히 있는데 유독 에이든의 어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 올라간 듯했다.
두 사람의 말에 다들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응원용으로 부른 게 아닌 걸 깨달은 이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소개를 마친 후 간략하게 앞으로 있을 일에 전략을 짜기도 전에 뿔 나팔 소리가 들렸다.
뿌우우우우-
순간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지만 단체로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무섭게 기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차이나에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오자마자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기사의 말에 아직 전략도 짜기 전이었지만 우선 밖으로 나왔다. 사령관 막사가 있는 곳은 약간 높은 곳이기에 밀고 들어오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대열을 정비하라.”
루카스의 외침에 기존 부대를 맡고 있던 이들이 밑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아무리 봐도 맛보기용 같은데. 전면전은 아닌 듯싶군요. 공격하는 군사 수가 너무 적습니다.”
한마디로 희생양으로 삼은 군사를 보내 상대방의 힘을 빼놓는 작전인 것 같았다.
“굳이 저런 것에 일일이 대응했다가는 우리 군사들의 피로도가 올라갈 것 같군요. 사령관님,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허락하겠습니다. 다들 제자리를 지켜라.”
마법을 시전할 건데 아군도 휘말릴 수 있어서 루카스에게 먼저 허락을 구했다. 대충 무슨 뜻인지 알아챈 루카스는 방금 대열을 정비한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아군이 안전한 곳에 있자 나는 옆에 있는 에이든을 봤다.
“불살라.”
“파이어 스톰!”
곧장 불기둥이 솟아났다. 그 불기둥은 적들을 향해 옮겨 갔다. 하지만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서 불기둥은 말 그대로 느릿느릿하기만 했다. 적들에게 닿으려면 천년 만년 걸릴 것 같았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바로 속도와 화력이었다. 항상 수련해 왔던 것처럼 나는 에이든이 시전한 파이어 스톰에 바람을 더했다.
“윈드 스톰!”
불 폭풍에 바람이 더해지니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졌다. 그것도 모자라 화력이 세졌다. 순식간에 몰려드는 적들을 몰살해 버린 것은 당연했다. 아군의 피해는 하나도 없는 완벽한 승전이었다.
“우, 우와!”
“마법사님이시다!”
밑에서 대열을 정비한 채 잔뜩 긴장한 채 병장기를 쥐고 있던 이들이 우릴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에게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내 눈은 씨엘의 손에 의해 막혔다.
“저런 거 보지 말고 가자.”
아마도 불타 버린 적의 시신을 보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어차피 완전히 연소되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데 말이다. 내 눈을 막은 씨엘은 나를 돌려세운 후에야 눈을 풀어줬다.
“우와, 평소에도 같이 마법 훈련하는 거야? 하긴 티그리스 공작저엔 마법을 전문적으로 훈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하던데.”
“너네 마법탑에도 있잖아. 그럼 사령관님, 전 너무 피곤해서 잠시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비록 마법을 하나만 시전했지만 먼 길 오느라 체력이 떨어진 상태였기에 쉽게 피곤해졌다.
“네, 네. 가서 편히 쉬십시오. 얼른 판테르 님이 머물 막사를 안내해 주게나.”
루카스의 말에 근처에 서 있는 기사가 얼른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러더니 대뜸 내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황실 소속 기사 얀이라고 합니다. 부디 판테르 님을 안내할 영광을 주십시오.”
영광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그래도 안내해 주겠다는데 사양하진 않았다.
“얀 경,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를 따라가는데 연분홍 머리카락이 유독 맛있어 보였다. 마치 잘 부풀린 솜사탕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