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사방에서 나를 출전자 명단에서 빼라고 압박을 넣었다. 하지만 황제는 이때만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래전에 아빠한테 당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라도 하려는지 황제는 황명으로 다시는 그 문제를 논의하지 못하게 못 박았다.
그때마다 클레어런스가 나서서 해결하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실제로 황궁에서 귀족 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우리 할아버지와 아빠 그리고 형부가 달려갔다.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심지어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내가 참전을 해야 군사들이 안심을 한다나 어쩐다나.
언제는 파멸의 아이라고 잡아 죽이려고 하더니, 이젠 하늘이 보낸 천사로 포장을 했다. 말도 안 되는 기적의 논리에 미네르바마저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 논리에 의해 나를 대신해 참전하려고 한 아빠와 형부는 거절당했다.
승리를 하기 위해서라면 전장 경험이 있는 아빠가 참전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걸 못 하게 막았다.
마치 이번 전쟁으로 후계 중 한 명을 밀어 넣고 억지로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는 듯했다. 그래야 가장 효율적으로 공작가의 기세를 꺾을 수 있다고 판단을 한 건 아닌가 싶었다.
열흘 전의 일을 떠올리며 아빠가 이를 뿌드득 갈다가 예쁘게 치장한 나를 보더니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 제가 출전하는데 굳이 집안에서 도와줄 필욘 없어요. 황제는 그걸 노리겠지만 그들의 아가리에 채워 줄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면 해요.”
가문을 대표해 내가 나간다. 즉 그것으로 우리 집안에서는 해 줄 건 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자고 그러느냐.”
“안 다쳐요. 제 곁엔 씨엘이 있으니까요.”
아빠와 수련을 한다더니, 그게 가슴 키우기 운동인지 유독 가슴이 돋보이기 시작한 씨엘이었다. 이번에 나를 보좌하며 같이 출전하기로 한 씨엘은 절대 절망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다. 그저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다.
본래라면 씨엘은 가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미네르바가 불같이 화를 내며 억지로 씨엘을 밀어 넣었다.
‘우리 백설기를 앞에 두고 너 혼자 뒤에서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반려는 네 손으로 지켜야 하는 거야. 그게 우리 집안의 가훈이다.’
그레이스 경의 말에 의하면 본래는 존재하지도 않은 가훈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루피노 공작의 말은 서부에서 절대적이었다. 그렇기에 갑자기 탄생한 가훈은 즉시 서부 공작저에 내걸렸다고 한다.
제 자식을 억지로 사지로 밀어 넣은 미네르바는 나를 보더니 꼭 안아 줬다.
‘걱정하지 말거라. 저 녀석은 제 목숨을 버려서라도 널 지킬 테니까.’
‘그러다가 씨엘이 잘못되면 어쩌려고요.’
‘흐음, 그래서 말인데…… 출전 전에 약혼식이라도 올리는 건 어떨까 하는데. 우리 아들이 죽더라도 최소한 사랑하는 짝은 있었노라고 제 아비한테 말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미네르바의 말이 씨가 되어 나는 지금 씨엘과 다급하게 약혼식을 올리기 위해 드레스를 입었다. 새로 맞출 시간이 없어서 있는 것 중 하얀 드레스에 보석과 레이스를 다는 것으로 디자인을 살짝 바꿨다.
그리고 내 머리엔 씨엘이 직접 만들었다는 화관을 썼다. 깔끔하게 치장한 나는 아빠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빠! 나 결혼하는 거 아니고 약혼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 죽어 가는 표정을 지을 필욘 없어요.”
“네가 너무 다급하게 결정한 것 같아서 말이다.”
“만일을 위해서라는 거 아시잖아요.”
“응, 알아. 아는데…… 왜 이리 내 마음이 아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지로 걸어갈 딸을 걱정하면서도 울지 못한 아빠를 꼭 안았다.
“아빠, 난 안 죽는다니까요. 난 우리 할아버지가 직접 가르친 마법사라고요. 자! 가요. 사람들이 기다릴 거예요.”
간소하게 열린 약혼식에 가족들 외에 참석한 이는 없었다.
“이제 우리 백설기도 우리 가족이 되는 거로구나. 씨엘, 행복하더냐.”
“네, 행복합니다.”
아빠의 손을 잡고 정원으로 가자 미네르바가 나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씨엘의 등을 살짝 밀었다. 앞으로 몇 걸음 나온 씨엘은 봄날의 다스한 바람을 닮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걸어왔다.
정장 차림이 씨엘을 본 아빠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내 딸을 잘 부탁하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평소처럼 지키겠습니다.”
아빠의 손에서 내 손을 건네받은 씨엘의 미소는 양지바른 곳에 핀 한 떨기 봄꽃 같기만 했다. 미인계로 유혹이라도 하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나를 에스코트해서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이번 전쟁이 끝난 후에 그땐 모두의 축복을 받는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지요.”
아무도 말하지 않자 미네르바가 먼저 운을 뗐다. 그러자 아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만 돌아온다면 뭔들 못 해 주겠느냐는 표정이었다.
“우리 라피, 정말 예쁘구나. 세라피나가 이 모습을 봤다면 참 좋아했을 건데.”
차마 눈물을 흘릴 수 없어 억지로 틀어 잠근 할머니의 말에 다들 숙연해졌다. 결혼을 약속한 자리에서 쌍둥이만 신이 난 투였다.
“우왕! 고모가 젤 예뻐요.”
“응, 어머니보다 훨씬 예뻐요.”
여전히 나를 고모라고 부르며 쪼르르 달려온 여덟 살이 된 쌍둥이는 내 드레스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더니 내 볼에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맞춤을 했다.
“헤헤, 고모! 우리랑 계속 계속 놀아 주세요.”
“고모랑 같이 있을 때가 제일 좋아요.”
이젠 아부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쌍둥이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내가 옆에 있으면 네 아버지랑 어머니가 뭐라고 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움찔-
동시에 몸이 순간 굳은 쌍둥이는 배시시 웃었다. 실제로 혼날 일이 있으면 녀석들은 마법 공부를 하는 내 곁으로 다가와 엉겨붙었다. 그럴 때면 쌍둥이를 혼내러 온 사비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유스, 아스! 잘 들어. 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 조카란다. 그러니까 우리 조카들 힘들게 하면 내가 와서 엉덩이 팡팡 때려 줄 거야.”
약간의 협박성 말에도 쌍둥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방긋방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요즘 유스랑 아스가 너무 영악해졌어요. 우리 중에서 가장 센 권력자를 알고 있으니 말이죠.”
자고로 할 말이 없을 땐 아이들 문제로 첫 운을 떼기가 쉬웠다. 사비나가 고개를 좌우로 젓더니 마리엘을 봤다.
“동서는 아이를 낳으면 절대 우리 집안에서 최고 권력자가 누군지 알려 주지 마. 알겠지?”
“제가 말하지 않은들 쌍둥이를 보면 금방 티가 날 것 같은데요.”
잔잔한 미소를 지은 마리엘은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쌍둥이를 봤다.
“제이든, 너는 아이를 언제 가질 터냐. 며늘아기는 젊지만 넌 늙었잖느냐.”
“안 그래도 부실한데 더 늙으면 씨가 움직이긴 하려나 모르겠구나.”
오십대가 된 다니엘과 헬레나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제 부모의 말을 들은 제이든은 얼른 마리엘의 두 귀를 막았다. 그러곤 항의하듯 다니엘과 헬레나를 봤지만 두 사람은 그저 부실한 씨 타령만 할 뿐이었다.
“가질 거예요. 곧! 말랑 콩떡 고모 닮은 아이 가지려고 열심히 노력 중입니다만.”
“크흠, 우리 찹쌀떡 닮은 아기를 낳으려고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아직 성공한 사람은 없지. 역시 찹쌀떡 같은 아이를 낳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지.”
이번엔 아빠마저 농담을 했다. 말할 때마다 어깨에 그 유명한 뽕을 서너 개씩 집어넣었는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위로 치솟았다.
“누가 보면 자네 혼자 우리 말랑 콩떡을 낳은 줄 알겠군. 솔직히 말해서 나 때문에 우리 말랑 콩떡이가 탄생한 거 아니겠나.”
이젠 할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며 은근슬쩍 발을 들이밀었다. 딸을 낳지 않았으면 손녀는 없다고 말하는 할아버지는 나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피를 닮은 아기를 낳은 확률은 우리가 높으니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하지 마!”
씨엘이 가슴을 팡팡 두들기며 말하자 아빠와 할아버지, 형부 그리고 오빠가 동시에 외쳤다. 어찌나 크게 소리쳤는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가 떨리며 꽃송이를 뿌려댔다.
“세상에나, 우리 씨엘과 라피의 약혼을 하늘에 계신 분들이 축하해 주나 봅니다. 온통 꽃밭이로군요.”
정갈한 요리가 담긴 접시가 테이블에 놓였다. 한데 꽃송이가 음식에 한두 개씩 떨어져 색다른 데커레이션을 만들어냈다. 하늘에 있는 부군과 세라피나가 축복해 주는 거라고 말한, 미네르바는 꽃송이가 내려앉은 샐러드를 먹었다.
“이거 맛있다. 아, 아빠! 혹시 그거 기억하세요? 제가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저한테 꽃을 따서 준 거요.”
“그래. 알고 있지. 꽃을 꺾어 줬더니 토끼처럼 씹어 먹었지. 그러다가 오스카가 해열진통제로 쓰인다고 해서 근처에 있는 꽃을 전부 꺾어 준 기억이 나는구나. 그때가 네가 세 살이었는데.”
아련한 기억에 파묻힌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땐 아빠가 아니라 오빠라고 불렀던 나는 그날의 기억을 추억처럼 열어 보았다. 머릿속에 조심히 끼워 넣어 놓고 있다가 이따끔씩 꺼내 보는 나는 아빠의 뭉근한 미소에 괜히 감정이 울컥해졌다.
“내가 그때…… 죽지 않으려고 아빠한테 거짓말한 거 미안해요. 사실대로 말하면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을 숨겼어요.”
“라피…….”
“쫓겨나면 죽을까 봐, 어떻게든 눈치 보며 살아남으려고…… 보석과 돈을 좋아한 것은 혹시 밖으로 내쳐졌을 때 쓸려고…….”
괜히 감정이 흐트러진 나는 이제껏 꾹 참고 숨기려 했던 것을 말했다. 이쯤 되면 분명 의아해하거나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어야 옳았지만, 아빠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내 곁으로 오더니 조용히 끌어안아 줄 뿐이었다.
“괜찮아. 우린 모두 알고 있었단다. 예전에도 말했었는데 네가 흘려듣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더구나. 넌 나와 세라피나의 친자란다.”
“네? 그게 무슨…….”
“넌 그저 우리에게 오기 전까지 매우 기나긴 여행을 한 것일 뿐이야. 차원이 다르면 시간의 흐름이 서로 달리 적용되니…….”
순간 아빠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두 눈을 깜빡였다. 대한민국과 베네딕트에서 산 것은 책 빙의했었던 거란 걸 깨달았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아빠에게 엉뚱한 질문을 했다. 엄마가 자주 읽던 로맨스 소설책에 빙의해서 살았다고 하면 이상할까요? 라는 물음에 아빠는 엉뚱한 대답을 하셨다.
누가 뭐라고 해도 딸이라고, 우연의 일치로 닮은 게 아니라는 말에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빠와 엄마의 피가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사고를 치지 않아서 그게 서운하다고 한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땐 그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그저 생각할 틈도 없이 자신을 굴리기 위해 엄마가 이곳에 보냈다는 말에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한 말인 줄 알았다. 그래서 이제껏 내가 아빠의 친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 말도 안 돼요. 제가 어떻게 아빠랑 엄마의 친딸이 될 수 있는 건가요? 저는 엄연히 타국에서 18살까지 살다가 이곳으로 차원이동했고, 마나 고갈로 어려졌다고 생각했는데.”
“아가, 그건 내가 설명하마. 네 그 목걸이는 말이다. 내가 세라피나에게 준 것이란다. 절체절명의 순간 소지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전설이 있는 목걸이지.”
그때야 나는 항상 걸고 다니는 목걸이를 봤다. 다른 장신구와는 달리 제니도 절대 건드리지 않는 거였다. 볼품없어 보이는 회색 다이아몬드는 어느새 슬슬 보라색 빛깔이 스미기 시작했다.
“세라피나는 죽기 전에 너를 다른 곳에 보내서라도 살려 달라는 소원을 빈 것이다. 그 바보가 제 목숨을 살려 달라고 하면 너까지 사는 건데, 너무나 충성심이 깊어서 제 목숨을 전쟁터에 버리고 너만…….”
습기가 가득한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두 손이 바르르 떨렸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그 아픔에 눈을 질끈 감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격해진 내 감정을 알아챈 아빠는 내 등을 말없이 다독였다.
“아, 아빠…….”
“응?”
“그때 아빠가 말씀하신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친딸처럼 대해 줘서 그냥 넘겼어요. 그 정도로 행복했거든요. 그러니까 그날 귓구멍 열고 제대로 들으라고 하셨으면 진실을 제대로 알았을 텐데.”
“미안, 한데 네가 아파 할까 봐…… 우린 네가 친자가 아니더라도 너를 사랑으로 키울 생각이었거든. 그래서 네가 건성으로 듣고 넘겨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단다.”
“아빠랑 모두 너무해요. 나란 존재가 뭔지 알게 되었을 때 가슴 아파서 말도 못 했을 거면서…… 제대로 말도 못하고, 속앓이를 하신 거예요. 바보처럼.”
분명 사실을 깨달았을 때 기쁨보다는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그 아픔을 속으로 삭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소와 같이 대해 주며 내가 동요하지 않도록 한 이 가족을 죽도록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