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분명 봄이 맞건만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완벽한 봄의 나른함이 파삭 깨졌다. 황제가 보낸 서신에 아빠는 분노했다. 그 분노를 지금 오빠와 조슬린이 이어서 표출했다.
“다시 읽어 보게나. 다시!”
“네, 네? 그, 그게…….”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귀가 좀 안 좋은 것 같군. 그러니 큰 소리로 말해 보란 말일세.”
황제의 서신을 들고 온 메리언 자작은 아빠의 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버지의 말씀을 못 들은 겁니까. 다시 읽어 보라지 않습니까.”
손이 바르르 떨린 메리언 자작은 오빠의 채근에 황제의 서신을 봤다. 그러곤 숨을 들이마시며 읽었다.
“나 데이먼드 사반나가 명한다. 두보레 지역에서 차이나 제국과의 전면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나는 판테르 공작가에게 참전할 수 있는 영광 중 일부를 주려 함이다. 세라피나 판테르를…….”
쾅-
아빠의 말대로 서신을 다시 읽은 메리언 자작은 순간 조슬린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치자 움찔하며 말을 끊었다.
“이게 말입니까, 똥입니까. 어디 똥 닦는 천 조각을 가져와서는…… 우리 아가씨는 아직 미성년자란 말입니다. 한데 출전 요구라니요! 이게 말이 됩니까.”
황제의 말도 안 되는 글이 적힌 서신의 내용을 들은 조슬린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주먹이 닿은 곳이 살짝 파였다.
그걸 본 메리언 자작은 제가 든 것을 똥 닦는 천 조각에 비유하는데도 반발하지는 못했다. 아빠가 싸늘하게 바라보자 바르르 떤 메리언 자작은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말했다.
“이번엔 황실에서도 황자님께서 출전을 하게 되었으니…….”
“그건 황실 쪽 사정이고요. 아니 그러기에 누가 전쟁 터트리래요?”
“전쟁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 하고 싶으면 외교를 제대로 하지 못해 이 사달을 만든 사람이 참전하면 될 거 아닙니까. 옆에 골수분자도 있으니 같이 손잡고 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드라코 공작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조슬린의 말에 메리언 자작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본인이 봐도 어이없는 내용이었으리라.
“죄송합니다. 저는 단순히 폐하께서 서신을 보내라고 해서 온 전달책에 불과해서 뭐라 드릴 말이 없습니다.”
흘러내린 식은땀이 발끝을 적셨지만, 메리언 자작은 제 얼굴을 닦지 못할 정도로 긴장한 듯했다.
“차라리 제가 라피를 대신해서 참전하겠습니다.”
메리언 자작이 서신을 읽어도 가만히 있던 씨엘이 갑작스럽게 나섰다.
“안 돼! 그게 바로 폐하께서 바라는 거야. 나 하나만 건드리면 3대 공작, 아니 4대 공작가 나서서 인적, 물적으로 도와줄 게 분명하니까. 안 그렇습니까? 메리언 자작님.”
“그, 그건 나도 잘 모르네만. 어쨌든 판테르 공작님, 서신은 두고 가겠습니다.”
붉은색 비단이 덧대진 서신을 테이블 위에 조심히 둔 메리언 자작은 그 길로 도망치다시피 사라졌다. 그 후로도 응접실엔 찬바람만 흉흉하게 부는 듯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아빠는 서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한 달 후에 출전할 거니 사하라로 오라는 글이 적힌 서신은 모두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유진! 당장 아버님과 에리카에게 연락을 넣어라.”
“네!”
아빠의 말이 건조한 공기를 부쉈고, 오빠는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응접실에서 나갔다.
“린, 손 안 아파?”
“라피, 지금 내 손이 문제가 아니잖아. 거긴 해적이랑 싸운 거랑 차원이 달라. 근데 어떻게 어린 동생을 사지로 보내겠어.”
살짝 눈물이 어린 조슬린을 본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클레어런스에게 연락이 와서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미안해, 막으려고 했는데 막을 수가 없었어.’
‘괜찮아, 네가 아무리 황태자라고 해도 네 아버지의 의견에 무조건 반대를 할 수 없을 테니까.’
‘정말 미안하다. 정말 미안…… 내가 이토록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어.’
깊은 한숨을 연거푸 쉬며 사과만 하는 클레어런스는 제 무능함에 치를 떨었다.
‘라피, 네 말대로 우리 아바마마는 정말 미친 게 분명해. 이번 전쟁은 진짜 멍청한 짓이야. 근데 내가, 못 막았어. 멍청한 아바마마의 뒤를 받쳐 주는 놈들이 너무 많더라.’
얼른 제가 황제가 되어서 그들을 전부 물갈이해 버리고 싶다고 말한 클레어런스는 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항상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을 때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전쟁은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감히 내 목숨이 일반 병사의 목숨보다 귀하다 말 못 한 나는 클레어런스에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후우,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니 내가 끝까지 반대할 거야. 그러니까…….’
‘클렌, 넌 충분히 잘해 주고 있어. 고마워. 네가 있어서 이 나라의 미래가 조금은 밝아 보인다. 그럼 이만 연락 끊을게.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클레어런스라면 먼치킨처럼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줄 알았는데. 이럴 때 보면 핏줄만 잘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클레어런스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어쩌겠는가, 주변인들에게 부추김을 당한 황제가 놀아나는 것을.
가족들이 미리 알아 봤자 그만큼 끙끙 앓을 것 같아 이번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갑작스레 받은 황명에 가족들은 울분을 토해내며 고통스러워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이미 예상한 일이었기에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천천히 말했다.
“이번 전쟁으로 큰 이익을 본 이들 목록을 뽑아서 쥐 잡듯이 잡아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일부러 돈 좀 벌어 보려고 일부러 전쟁을 부추긴 존재가 있을 거예요.”
“라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
아빠가 목소리 톤을 높여 말하더니 오히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연거푸 숨을 내쉬며 두 팔을 벌렸다. 뭘 뜻하는지 안 나는 어렸을 때처럼 아빠의 품에 조심히 안겨들었다.
“아빠가 큰소리쳐서 미안하구나.”
“괜찮아요.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내 등을 쓸어 만지며 사과한 아빠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너만은 빼 주마. 우리 딸을 어찌 그런 사지로 보내겠느냐. 우리 사랑하는 딸, 내 귀한 찹쌀떡을 그런 곳에 절대 보내지 않을 거야.”
그런 곳에 나를 보내면 훗날 엄마를 만나서 두 번 죽을 것 같다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한동안 아빠의 품에 안겨 있을 때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유진한테 연락 듣고 왔네. 황제 이 새끼를 내가 지금 당장 가서 조지고 천국 가겠네.”
할아버지가 울분을 토해내며 나와 아빠를 보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이 어린 것을, 아직도 말랑말랑해서 건드리기만 해도 폭 들어가는 우리 말랑 콩떡을 어찌 사지로 보내겠느냐. 내 딸도 모자라서 라피까지 그런 곳으로 보낼 수는 없어.”
아빠 옆에 앉은 할머니가 아직도 아빠에게 안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지금 앞에 황제가 있다면 머리털을 다 뽑아 버릴 기세였다.
“아버지, 안 됩니다. 우리 라피를 어찌 그런 곳에…… 명분이고 나발이고 제롬의 말대로 할 걸 그랬나 봐요.”
다들 비통함을 담은 채 아빠 옆자리로 옮겨 앉은 내 곁으로 몰려들었다. 그러곤 나를 안고 다독였다.
“나는 괜찮…….”
“안 괜찮아! 왜 우리 동생은 항상 괜찮다고만 하는 거니. 이럴 땐 좀 화도 내고 깽판 쳐도 돼. 막 물건을 부숴도 돼! 오빠가 새로 사 줄 테니까 제발, 감정 표현 좀 해.”
오빠가 대신 갈 테니까 넌 뒤로 빠지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지금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오빠의 손을 꼭 잡았다.
“나 진짜 괜찮아. 그러니까 다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누구예요? 대 티그리스 공작님의 손녀이자, 판테르 공작님의 딸이에요. 그리고 아퀼라 공작님의 처제이고…… 루피노 공작가의 미래의 며느리이기도 하지요.”
분명 가족들의 저항이 올 것을 예상하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을 하며 황제를 욕하기에 바빴다.
그 모습을 본 씨엘이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내 뒤에 서서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라피, 참전하게 되더라도 걱정하지 마. 내가 목숨 걸고 라피만은 지켜 줄 거야. 나 이래 보여도 아버님이랑 매일 대련하거든.”
씨엘의 말을 듣고서야 왜 아침만 되면 식빵을 구우며 꾸벅꾸벅 조는지 알게 되었다. 나를 지켜 준답시고 새벽에 노력하는 씨엘을 향해 손을 올려 까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 와중에 이모는 씨엘이랑 다정하게 있고 싶어?”
마침 고개를 든 콜린과 시선이 마주쳤다. 약간 싫어하는 티를 냈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
“넌 왜 여기 왔어? 아카데미에 있어야지.”
“이모가 이런 상황인데 내가 어떻게 아카데미에서 마음 편하게 두 다리 뻗고 있겠어! 일 년 후에 터졌으면 내가 따라갔을 건데 그러지 못해서 미칠 것 같단 말이야.”
올해 열아홉 살인 콜린은 아직 정식 기사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두보레 지역에 갈 수 없었다. 아니 황제가 오라고 했다고 해도 무조건 못 하게 막았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콜린은 아퀼라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니 말이다.
“왜 나이 많은 우릴 두고 고모를 참전시키려 하겠습니까. 고모는 나이가 어리니까 제멋대로 요리해서 쓰려고 할 게 분명해요. 게다가 고모의 혈연도 한몫했을 거고.”
“맞아. 고모가 제대로 된 사교 활동을 하지 않으니 가문의 힘을 믿고 조용히 지내는 줄만 아는 거야. 실제로 우리 말랑 콩떡 고모가 얼마나 똑똑한데. 제 입맛대로 요릴 하려고 해!”
에이든과 제이든이 분에 겨워 소리를 높였다가 어른들의 차게 식은 눈동자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씩씩대는 모습을 보니 나는 웃을 수 있었다.
“고모님은 지금 웃음이 나오세요? 이건 고모님의 목숨이 걸린 중대한 일이라고요.”
나와 눈이 마주친 사비나가 한마디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더 환한 미소를 지었는데 이상하게 눈동자가 뜨거워졌다. 그러더니 이내 앞이 아른거리며 내 가족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처제, 갑자기 왜 그래? 응? 처……제? 울어? 그래, 많이 무섭겠다. 무서워서 우는 건 이해가 되는데 왜 웃는 거야? 웃으면서 울면…….”
평소라면 어딘가에 털이 날 거라고 말하겠지만 형부는 이번만큼은 뒷말을 씹어 삼켰다. 그러곤 얼른 손수건으로 내 얼굴을 조심히 닦았다.
“으음, 그, 그냥요. 내 문제로 이렇게 모두 나서 주니까…… 무조건 내 편 들어주니까 너무 좋아서요.”
“…….”
“내가 이제껏 헛되게 산 게 아니구나, 내겐 이렇게 나를 생각해 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가족이 있구나, 나를 지켜 주려는 가족이 있어서 너무 든든하고 기뻐서…… 좋아서…….”
뜨거워진 숨을 몰아쉬며 말하자 마리엘이 먼저 달려들어 나를 꼭 안으며 말했다.
“같이 걱정하고 아파하는 건 가족으로서 당연한 거예요. 그 당연함을 만든 분이 고모님이시고요. 이런 말 좀 늦고, 뜬금없겠지만 저희에게 다복한 가족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할 말 다 하고 펑펑 우는 마리엘을 달래느라 약간의 진땀을 뺀 나는 가족을 돌아보며 말했다.
“언제나 내가 말했듯이 난 괜찮아요. 안 괜찮아도 괜찮게 만들 거고요. 그러니까 죽지 않은 나를 위해 미리 우는 것은 넣어 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