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순간 티그리스 가 사람들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마법탑에 먼저 준비 명령을 내렸다니, 우릴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그때 그놈의 모가지를 따 버렸어야…… 크흠.”
할아버지와 아빠의 말을 들은 형부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잠시 눈을 감으며 고개 숙인 채 깍지 낀 손을 이마에 댔다. 깊은 한숨을 내쉰 형부가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황궁에 군사를 데리고 가서 엎어 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차라리 그놈의 황제 대신 황태자가 일찍 보위에 오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제롬, 그건 아니 될 말이에요. 우리가 황실을 먼저 치면 명분이 없어요. 명분 없는 찬탈은 황태자에게도 그리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거예요.”
형부의 말에 언니가 반대를 했다. 형부의 극단적인 말도 옳은 듯했지만, 언니의 말도 옳았다. 우리가 황실을 칠 수는 있지만 제대로 된 명분이 없었다. 그렇다고 오래전에 돌아가신 엄마 일을 다시 들먹이는 것도 고인의 이름을 더럽힐 수 있었다.
“흐음, 황제가 마법탑에 출전 준비를 요청했다고는 하나 티그리스 가문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두 집단이 사이좋게 출전하는 것도 문제가 많을 거고요.”
적군과 싸우기도 전에 아군끼리 먼저 개싸움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미네르바의 말을 들은 다니엘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뜬금없이 나설 수는 없지 않습니까. 황태자가 고모의 정보원 노릇을 한다는 것을 알릴 수도 없고요. 근데 방금 온 통신은 누가 보낸 거야?”
에이든의 물음에 나는 방긋 웃었다.
“모르간 후작가에 나만의 고급스러운 정보원이 있거든.”
쿨럭-
차를 마시던 가족 중 일부가 그대로 찻물을 쏟아내는 우를 범했지만 아무도 탓하지 않았다.
“라피, 나 몰래 그 인간이랑 연락하는 사이야? 설마 나를 두고 바람피우는 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모르간 집안과 결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럴 바엔 차라리 씨엘이랑 결혼하는 게 백만 배 낫다.”
씨엘이 있을 때도 간혹 연락을 했다. 한데 씨엘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능청스레 나를 보며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결과 할아버지가 대로했다. 이 와중에도 제대로 된 실속을 챙긴 씨엘은 방울꽃처럼 청초하게 고개 숙인 채 입술꼬리를 슬쩍 올렸다.
“황제가 한 번 고집을 부리면 꺾기 힘들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전부 출전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요.”
“루피노 공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가 전부 출전할 이윤 없지요. 만약 전쟁이 터진다면 이번에 나가야 하는 건 황제와 드라코 공작일 겁니다.”
“아버님의 말씀이 옳습니다만, 황제가 뺀질뺀질하게 빠져나가면 드라코 공작은 황제를 지킨다는 이유로 대놓고 빠질 게 분명합니다.”
형부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실제로 이미 겪어 본 일이기에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면 황제를 내세우고 그 도롱뇽 새끼가 호위를 하면 되겠군. 그리고 그 주변을 마법탑이 촘촘하게 감싸면 될 일 아닌가. 전쟁 참 쉽게 하겠군.”
할아버지가 끌끌- 웃으며 턱을 쓸어 만졌다.
“이젠 임신한 황후도 없고, 황태자가 장성했으니 전쟁터로 가야 옳지요. 설마하니 황자를 내보내진 않겠지요.”
“설마가 뒤통수를 깨긴 해.”
에이든과 제이든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라면 제 목숨만 귀하게 여겨 제 핏줄이 아닌 루카스 황자를 내보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일 루카스 황자를 보내면 각 가문의 직계 혈통에게도 참전을 요구할 수 있겠군요.”
황자가 참전했는데 각 가문의 핏줄이 참전하지 않으면 뻔뻔한 얼굴을 내밀며 직접 명령을 내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비나의 말이 옳다. 황태자는 직계 후계자이니 건드리진 않을 거야. 그럴 경우 루카스 황자가 가장 유력하지.”
“덤으로 각 가문의 직계 혈통에게 참전하라는 교지를 내릴 것이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영광스러울 거라는 말도 덧붙일 게 분명해.”
“그게 영광스러운 죽음이라면 자신이 나가서 콱 뒈질 것이지. 몸은 엄청 사리는군요. 황제가 맞나 의심스럽습니다.”
“원래 황제감이 아니었지요. 본래 황태자였던 형이 황위를 이어받기 전에 이유 모를 병에 걸려 죽어서 능력도 되지 않은 황자가 황태자가 되고 황제가 된 것이지요.”
할아버지와 아빠, 형부, 그리고 미래의 시어머니께서 진지하게 황제를 낱낱이 파헤쳤다. 능력이 안 되면서 황제랍시고 대신관과 작당해서 까불 때마다 뒤지게 패고 싶은 것을 꾹 참는 중이라고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직계 혈통이면 우리 집은 나랑 오빠네? 언니는 아퀼라 공작가의 안주인이니까.”
“만약 무슨 일이 터지면 오빠가 나갈 테니까 넌 가만히 있어. 아무리 네가 마법사라고 해도 실전과 연습은 다른 법이…….”
“실전이라면 해적들을 상대하면서 이미 겪었는데?”
“어? 으, 응. 그, 그랬었지.”
내 말에 오빠의 말문이 막히자 아빠가 혀를 찼다.
“오빤 이제 막 결혼했으면서 새신부를 두고 어딜 가려고 그래.”
“그런 거라면 괜찮아. 내가 같이 따라가면 되니까. 나 이래 보여도 기사라고.”
가만히 있던 새신부가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오빠가 가면 조슬린도 따라갈 예정인 듯했다.
“너흰 가만히 있거라. 내가 참전하면 된다.”
“안 됩니다. 아버지는 늙으셨지 않습니까.”
그 말과 동시에 아빠와 할아버지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우리 씨엘은 어미한테 뭐 할 말은 없니?”
“사실대로 말해도 됩니까?”
“응. 말해 보렴.”
“어머니께서 참전하시지요. 전 이곳에서 라피를 지키겠습니다.”
“우리 아들은 참 효자야. 어미의 몸이 찌뿌둥하지 않게 나가 싸우라고 등을 떠미니 말이야.”
“저 같은 효자도 드물 겁니다. 대신 라피랑 포실포실한 백설기를 닮은 손주를 낳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어머니께서는 우리 백설기들이 살기 좋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십시오.”
씨엘의 말을 들은 미네르바는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미네르바의 어깨를 아빠가 다독였다.
“참고로 내가 저리 안 키웠습니다. 알아서 컸습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후천적인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거 아니겠습니까.”
“씨엘을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만.”
“그렇다면 제가 참전한 동안 우리 씨엘과 라피가 결혼해서 포실포실한 백설기를 낳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참전하겠습니다. 오랜만에 가서 몸 좀 풀고 오면 그만인 것을.”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분명 처음엔 이런 주제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한동안 아빠와 미네르바 사이에 낀 우리는 밀려서 찌그러지고, 당겨서 짜부라졌다.
결론은 흐지부지되었고, 다들 각자 집으로 향했다. 이젠 직계끼리 모여서 따로 회의를 할 것이다. 우리도 할아버지와 언니네가 돌아가자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선 쉬고 생각해요. 결혼식 후 피로연까지 준비하느라 몇 달을 못 쉬어서 내일 당장 전쟁이 터진다고 해도 자야 할 것 같아요.”
자고로 피곤하면 머리가 안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먼저 두 손을 들었다.
“그래, 우리 라피는 얼른 들어가서 씻고 푹 자렴.”
아빠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곧장 내 방으로 돌진했다. 피곤함에 잔뜩 찌든 나는 고용인들이 미리 준비해 둔 따끈한 물로 몸을 씻어냈다. 그러곤 간편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라피가 침대에 뛰어든 그 자세로 잠이 들자 좀 떨어진 곳에서 본 씨엘이 곁으로 다가왔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않고 그대로 엎드린 채 잠을 잔단 말인가.
제니가 마른 수건을 가지고 오자 그걸 받아든 씨엘이 라피의 머리카락을 조심히 닦았다.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본 제니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집안의 가보를 닦듯이 씨엘의 손길은 매우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라피에 한해서만은 진심인 씨엘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판테르 공작과 유진에게 결혼 불가 판정을 받았지만 그런데도 절대 싫은 티를 내지 않았다.
어차피 두 분이 자신을 내쫓진 못할 거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서부의 루피노 공작가의 후계자이기에 당당한 것일까.
“라피, 이대로 자면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라피는 감기에 걸리면 낫는 데 오래 걸리잖아.”
항상 라피의 곁에서 떠나지 않은 탓에 모르는 게 없는 씨엘의 다정한 목소리에 제니는 둘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 방 밖으로 나갔다.
“라피는?”
“씻자마자 제대로 닦지도 못하신 채 잠드셨습니다.”
자나 깨나 라피 걱정인 판테르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씨엘은?”
“씨엘 님은 잠든 라피 아가씨의 머리카락을 말려 주고 계십니다.”
“그렇군.”
절대 남자답지 못한 행동을 한다며 불만을 드러내진 않았다. 씨엘이 라피를 위해 하는 모든 행동은 정당하다고 여겼다. 단 한 번도 씨엘이 라피를 어려움에 빠뜨린 적은 없기에 그것 하나만은 인정해줬다.
“문을 열…….”
“아니네, 되었다. 괜찮아. 후우, 그나저나 그 녀석이 오늘따라 참 부럽군.”
혼잣말을 한 판테르 공작이 걸음을 옮겼다. 만약 세라피나가 살아 있다고 해도 제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을 것 같았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전해 주지 못한 판테르 공작은 아릿한 미소를 지으며 집무실로 돌아왔다.
“계속 반대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버지 입장에서는 모든 게 못마땅하겠지만 솔직히 씨엘 님 같은 남자가 흔치 않을 것입니다.”
모든 걸 라피에게 맞춰 줬다. 라피가 위험에 처하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 제 목숨을 걸고 도와줬다. 실제로 라피를 지키려고 검에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이보다 더 훌륭한 남편감은 드물었다. 라피의 재력이 아닌 라피 자체만을 사랑하는 씨엘이기에 옆에서 지켜본 게 있는 맥스가 조심히 물었다.
“자네 말대로 씨엘이 남편감으로서 최상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네. 알고 있는데 우리 딸을 에리카처럼 일찍 시집보내긴 싫어. 좀 더 곁에 두고 사랑해 주고 싶네.”
다른 세상에서 당했을 모든 것을 없앨 수는 없었다. 첫 만남에서 손만 올렸는데 무릎 꿇고 빌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살아남기 위해 눈치 보며 애교 부리는 아이의 상처를 옅게 해 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게 결실을 맺었는지 잘 모르겠다.
“아가씨께서 공작님의 마음을 모르진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씨엘 님과의 결혼을 허락해 주지 않는다고 가출은 하진 않으시잖습니까.”
가출이라는 단어에 판테르 공자의 미간이 왈칵 구겨졌다.
“가출한다고 갈 곳이…… 많군. 아주 많아서 탈이야.”
라피쯤은 쉽게 숨겨 줄 수 있는 집안이 널리고 널려서 탈이었다.
“그나저나 요즘엔 라피 아가씨께서 햄을 볶지 않는군요. 햄 볶는다고 할 때마다 참 귀엽고 앙증맞았는데.”
어린 라피가 햄 볶는다고 말할 때마다 뒤에서 심장을 부여잡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비록 햄 볶는 이유를 알고 있지만.
“우리 딸은 지금도 귀엽고 앙증맞네. 그러니 남의 딸 걱정은 접어 두고 일이나 하게. 언제까지 잡담을 할 참인가.”
결혼식이 진행되는 중에도 판테르 공작가엔 일거리가 차곡차곡 쌓였다. 피로연이 끝났다고 가주에게 쉬는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일찍 유진에게 모든 걸 물려주고 싶을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겪어 본 결과 제 자식에겐 최대한 늦게 일을 물려주고 싶었다. 힘든 것은 자신이 할 수 있을 때까지 한 후에 유진에게 줄 생각이다.
그렇기에 판테르 공작은 오늘도 가문과 가족을 위해 펜을 들고 서류를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