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145)화 (145/164)

145화. 

때마침 새신랑 신부가 옷을 갈아입고 등장했다. 피로연이 열린 연회장 안은 아름다운 봄의 선율이 그득했다. 각자 마음에 맞는 짝의 손을 잡고 춤을 췄다. 그 모습을 본 씨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씨엘, 춤출 줄 알아?”

이제껏 씨엘이 춤추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우리 집에서 커 온 씨엘에게 춤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기에 걱정이 되어 물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 라피가 춤을 배울 때 눈으로 익혀 뒀거든.”

어쩐지, 내가 춤을 배울 때 씨엘은 테이블에서 식빵을 구우며 빤히 쳐다봤다. 그땐 그냥 내가 춤추는 게 신기해서 보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머릿속으로 움직임을 외웠을 줄이야.

“여차하면 내가 리드할게.”

“라피도 춤은 잘 안 추잖아.”

그랬다. 춤을 배우긴 배웠는데 실전에서 써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연회를 가거나 파티에 참석해도 거의 춤을 추지 않았다. 춤 신청은 많이 받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남성이 없었던 탓이다.

굳이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는데 출 필욘 없다고 아빠와 오빠가 귀에 피가 나도록 말했다. 호의를 베풀어 췄다가 그 남자가 착각을 할 수 있다는 말에 따른 것이다.

물론 클레어런스는 예외였다. 클레어런스가 춤을 신청했는데 거절하면 그 파급력이 상당했다. 감히 황태자를 무시한다는 뒷말이 오가는 것은 싫었기에 어쩔 수 없이 춤을 췄다.

“씨엘, 내 허리에 손을 얹고…….”

여러 사람이 보는데 씨엘이 창피를 당할까 봐 기본적인 자세부터 잡아 주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씨엘의 손이 내 허리를 부드럽게 감았다. 그러곤 손을 맞잡았다.

“정말 아름다운 커플이로군요.”

미네르바의 말에 아빠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씨엘의 손이 닿은 허리에 고정이 되어 있는 듯했다. 타들어 갈 것 같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율에 맞춰 씨엘이 먼저 스텝을 밟았다.

어라라라?

초보가 분명한데 이 부드럽고 날렵한 움직임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 그 유명한 물찬 제비라는 표현을 하는 게 맞나 싶었다. 처음으로 추는 춤이건만 누가 보면 최소 십 년 이상은 무도회장에서 굴러다닌 줄 알 정도였다.

“씨엘, 진짜 처음 춤추는 거 맞아?”

작은 목소리로 묻자 씨엘이 어깨를 으쓱이며 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살짝 머리를 숙여 내 귓가에 다습한 숨결을 불어 넣으며 속삭였다.

“응, 난 뭐든지 라피가 처음이라고 했잖아. 그리고 난 몸으로 하는 건 뭐든지 잘해. 라피가 춤을 배울 때 항상 같이 춤추고 싶어서 머릿속으로 스텝을 수천만 번은 밟았어.”

그것도 모자라 밤에 하는 사랑도 빨간 책으로 열심히 익히고 있다는 씨엘을 보니 내가 다 부끄러워졌다.

“대체 어떤 빨간 책을 보는 건데?”

혹시 요사스럽고 변태스러운 책을 읽는 것이라면 빼앗을 작정으로 조심히 물었다. 그러자 씨엘이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내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말했다.

“으음, 라피가 읽는 빨간 책…… 침대 밑에 숨겨 놓은 거. 라피가 잠깐 자리 비울 때마다 궁금해서 읽다 보니 내 애독서가 되었어. 제목이 뭐였더라?”

코르티잔의 은밀한 쾌락-

일반적인 상상의 나래나 작가의 욕망을 빻아 넣은 책이 아니었다. 실제로 선선대 황제의 코르티잔인 마렌느 백작부인이 직접 쓴 책이었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적은 글로 상당히 깊고 심오했다.

표지가 빨간색이라지만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많이 보는 애독서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밖에서 대놓고 볼 수 있는 그런 책은 아니지만 말이다.

한데 가끔 밤에 잠을 자기 전에 본 책을 씨엘도 몰래 보고 있었을 줄이야.

당황한 내 얼굴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그런 나를 본 씨엘은 티 없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에 입맞춤을 했다.

“그, 그건 그냥 야한 책이 아니야.”

“당연히 알지, 나도 몇 번이나 정주행한 책인데. 코르티잔으로서 화려한 삶을 살았다지만 말년이 참 쓸쓸한 사람이었지.”

황제를 치맛자락에 폭 감싼 채 제멋대로 휘두른 존재는 아니었다. 코르티잔으로서 밤마다 쾌락을 탐하지 않았다. 보좌관처럼 곁을 지키며 나랏일을 하지 않고 저만 탐하려는 황제를 타일러 업무를 보게 했다. 

마렌느 백작부인 덕에 본디 남자만 받던 아카데미에 여자도 공부를 할 수 있게끔 기틀이 마련되었다. 여자는 그저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고 외친 인물이었다.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황제를 구슬려 여성의 사회 진출을 막는 법을 뜯어고쳤다.

여성도 능력만 되면 사회생활을 할 수 있고, 남자가 집안 살림을 할 수 있다고 부르짖던 마렌느 백작부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렌느 백작부인을 일개 코르티잔이 아닌 황제의 첫 여성 보좌관으로 여겼다.

그런 그녀가 말년에 쓴 글이었다. 다들 못 구해서 안달인 책을 몇 년 전에 헬레나가 사서 줬다. 빨간색 책이라지만 내용 전부가 야한 것은 아니니 한 번 읽어 보는 게 나을 거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책을 읽은 후엔 언니와 헬레나를 만나면 감상문을 쓰듯이 말하곤 했다.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해서 보수적인 귀족에게 살해 위협까지 당했지만 끝내는 황제를 움직여 법까지 고친 존재는 부분적으로 존경스러웠다.

“근데 그 책엔 야한 부분이 별로 없어. 이론적으로 배우고 싶으면 다른 책이라도 사다 줄까?”

잠시 얼굴이 빨개졌지만, 얼른 수습한 나는 헛기침을 한 후 씨엘에게 말했다. 내 말을 들은 씨엘은 씩, 웃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난 이론대로 하는 것보다 직접 경험해 보면 잘할 수 있거든. 그러니까 으음‧…… 우리 언제 결혼해?”

“이제 막 오빠가 결혼했는데 아빠가 내 결혼을 바로 허락해 줄 리가 없잖아. 기다려.”

“그렇지만 우리도 열여덟 살이 되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거야? 라피랑 같이 있어도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사이가 되고 싶어.”

“푸웁, 언제는 나랑 같이 있을 때 눈치란 걸 봤어?”

언제나 당당한 씨엘은 아빠 앞에서도 깍지 낀 손을 절대 풀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연무장으로 끌려갔지만.

춤을 추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 음악이 끊겼다. 서로 인사를 한 후 옆으로 비켜서려고 했지만 그럴 시간적인 여유를 주지 않고 클레어런스가 치고 들어왔다.

“라피, 나랑 한 곡 추자. 황실과 판테르 공작가의 안녕을 위하여.”

“뭐래. 하여튼 말은 거창하다니까.”

“이 정도는 친목 도모용으로 할 수는 있잖아.”

“뭐 클렌이 원한다면야. 춤 정도는 춰 주지.”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나를 본 클레어런스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음악이 시작되자 곧장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바마마께서 엉뚱한 짓을 저지를 것 같아.”

춤을 추면서 클레어런스는 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줬다. 간혹 유익한 정보를 주기도 하여 그의 춤을 무작정 거절하진 않았다.

“뭔데?”

“글쎄, 지금 차이나 제국과 맞닿은 두보레 지역이 심상치 않아. 이러다가 어쩌면 전쟁이 터질지도 모르겠어.”

“왜?”

“요즘 계속 평화로웠잖아. 황실에 대한 충성도를 시험하기엔 타국과의 자잘한 분쟁보다 좋은 방법은 없거든.”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차이나 제국이었다. 백여 년 전에 전쟁이 터졌을 때 차이나 제국의 인해전술로 인해 밀릴 뻔하다가 가까스로 지금의 국경선을 지켰다고 했다.

그런 차이나 제국과 친하게 지내도 모자랄 판에 일부러 긁어 부스럼을 만들려는 황제의 미련한 생각에 골이 띵-하고 울렸다.

“가감하지 않고 말할게. 네 아버지 미치셨니?”

“그런 것 같아. 내가 어떻게든 말리는 중인데 대신관이 사반나 제국의 힘을 보여 줄 때라면서 아버지를 부채질해.”

“뱃살이 흘러내리더니 이젠 뇌까지 녹아 버렸나 보네. 그러다가 껍데기만 남겠군.”

“그나마 돼지 껍데기는 맛있기라도 하지, 얼마 전에 잠행 갔다가 돼지 껍데기 굽는 거 보고 먹어 봤는데 쫀득쫀득하고 맛있더라. 그래봤자 네 쫀득함엔 못 당하겠지만.”

춤을 추면서 우린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절대 타인이 알지 못하게 소소한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음악이 끝나자 클레어런스가 귓속말을 했다.

“황태자를 정보원으로 둔 너도 대단하긴 하다.”

“웃기시네. 내가 말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도움을 구하고 싶어서 내게 정보를 흘리면서 말이 많으시네요. 황태자 전하!”

클레어런스가 귓속말을 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아졌다. 얼른 치맛자락을 붙잡고 인사를 한 나는 그를 보며 입술을 씰룩였다.

내게 고급 정보를 넘겨 준 클레어런스는 수많은 미혼의 영애에게 둘러싸였다. 하지만 그는 예의상이라도 그녀들과 춤을 추지 않았다. 그저 간단하게 허기진 배를 채우더니 황실에 급한 일이 있다며 먼저 퇴장을 했다.

“우리 딸, 황태자가 뭐라고 했지?”

“음,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구운 찹쌀떡이 아빠한테 숨길 나이가 된 건가? 겉보기엔 다정한 모습으로 웃었지만 눈동자가 굳어 있던데.”

클레어런스가 간 후 아빠와 함께 춤을 추다가 받은 질문에 어깨를 으쓱였다.

“피로연이 끝난 후에 가족들을 모아 주세요. 클렌이 한 말이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제게 거짓말을 한 것 같진 않거든요.”

내 말에 더 깊게 묻지 않은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2박 3일의 결혼 피로연이 끝났고 귀족들이 전부 판테르 공작저를 떠나자 곧장 가족들이 응접실에 들어섰다. 아이들을 제외한 이들은 아빠의 소집령에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저도 이젠 이 집안과 가족이 된 건가요?”

미네르바도 특별히 남으라고 했다. 그러자 아무런 반문 없이 피곤했을 테지만 남아 준 미네르바는 우리 가족 전용인 응접실 안에서 다과를 먹으며 미소 지었다.

“자네, 대체 무슨 연유로 모이라고 한 건가? 나도 이젠 나이가 먹어서 얼른 쉬고 싶은데.”

2박3일간 강행된 피로연 때문에 다들 피곤해했다. 노는 것도 체력이 따라 줘야 가능함을 여실히 증명한 이들 앞에 선 아빠가 나를 보며 말했다.

“라피가 황태자에게 들은 말이 있다고 해서 모이라고 한 겁니다. 라피, 대체 황태자가 네게 뭐라고 했지?”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클렌이 쓸데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닌 거라고 여겨서요.”

피로연 때 클레어런스가 말해 준 내용을 읊자 다들 미간이 좁아졌다.

“황제가 드디어 미친 건가?”

“360도로 돌아 버려서 본인이 돈지도 모를걸요.”

다니엘과 형부가 고개를 저었다.

“흐음, 대신관과 작당한 게 분명하군요. 요즘 서부에서 좀 세게 군기를 잡아서 신전이 쪼들리는 상황이라서.”

현재 서부에서는 신전에 멋대로 남의 땅에 건물을 짓고 영업을(?) 한 죄로 수백 년간 내지 않은 토지 사용료 및 세금을 매겼다.

“현재 남부와 북부에서도 세금을 물리는 중입니다. 처음엔 저항이 셌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원하지 않으면 건물 두고 그대로 나가라고 했더니 입을 다물더군요.”

형부의 말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방위로 신전이 압박받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황제가 충성심을 시험한다며 전쟁을 터트리면, 당연히 대신관도 급부상할 것이다.

정세가 불안해지면 사람들이 찾는 것은 신이었다. 신전으로 찾아가 기부금을 주며 기도를 할 게 뻔했다. 신앙심 넘치는 신도를 만드는 것도 그들이 노리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확실치 않으니 속단할 수 없습니다. 비록 황태자가 말했다고 하나 그도 본디 황제의 핏줄임을…….”

똑똑똑-

오빠가 말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오스카가 문을 열었다.

“라피 아가씨께 통신이 왔습니다.”

내게 통신구로 연락할 가족들이 전부 여기 있으니 상대는 다른 사람임이 분명했다.

“잠시 다녀올게요.”

내 방으로 걸음을 옮긴 나는 통신구로 연결된 상대가 짧게 대화한 후 곧장 응접실로 들어와 말했다.

“마법탑엔 출전 준비 명령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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