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나이 많은 오빠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구나.”
“그래도 뭐 없는 말 지어서 한 건 아니잖아요. 차라리 쌍둥이가 하……다가 망할 것 같긴 하네요. 요즘엔 화동 없이 하는 결혼이 유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장난꾸러기 쌍둥이에게 화동을 시켰다가는 결혼식을 시작하기도 전에 말아먹을 것 같은 생각에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오빠가 먼저 입장했다. 처음 봤을 땐 긴장한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풀어진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언니가 오빠 뒤에서 톡톡 쏘면서 공격한 탓에 말랑해진 것 같다.
봄과 잘 어울리는 악단의 따스한 선율에 맞춰 조슬린이 등장했다. 니콜라이 백작이 에스코트해 줘야 옳았지만, 이번엔 아빠가 나섰다. 이젠 온전히 우리 집안의 딸이라고 공공연히 말한 탓에 둘째 딸이 된 조슬린은 봄의 신부답게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아빠 손 잡고 버진 로드를 걷고 싶어요.”
“라피, 그건 먼 훗날의 이야기로구나.”
“그렇지만 엄마는 그걸 바라고 계실 것 같아요. 아! 저기 오네요.”
엄마의 방에서 떼어 온 액자를 아빠의 옆자리에 옮기게 했다.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입술을 깨물며 서로 부둥켜안았다.
“세라피나, 오늘 당신과 나의 아들이 결혼을 해. 어때? 며느리는 마음에 들어? 우리 라피의 호위기사였는데 어쩌다 보니 눈이 맞은 모양이야. 아니 그전에 눈이 맞은 것 같기도 해.”
엄마의 그림을 손수건으로 닦은 아빠가 조곤조곤 설명을 했다.
“우리 딸이 몇 년 전에 마법사가 된 건 알고 있지? 근데 두 번째 직업이 생긴 것 같아. 조카님 둘을 장가보내더니 이젠 제 오빠까지 엮어 줬어.”
그 모습을 본 다니엘은 깊은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고모가 계셨으면 정말 좋아했을 건데. 분명 우리 아들이 제일 멋지다고 말했을 거야.”
엄마와 같이 컸다는 다니엘의 슬픔이 깊은 숨결에 녹아내린 듯했다. 그런 다니엘의 손을 살짝 잡은 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우리 엄마 보고 싶으면 날 봐요.”
“하여튼 우리 라피는 슬퍼할 겨를도 없게 만드는구나. 그나저나 그림이 우리 라피랑 판박이네. 정말 다행이야. 고모가 나이 들어 가는 모습을 내 눈으로 볼 수 있어서.”
옅게 웃으면서 말한 다니엘은 내 볼을 잡고 쭉쭉 늘렸다. 어렸을 때부터 해 온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어휴, 이 말랑 콩떡을 어찌 서부로 보내. 난 절대 안 될 것 같아. 라피, 오빠랑 같이 살래?”
“아니, 예전이었으면 그러겠노라고 하겠는데 쌍둥이의 등쌀에 내가 먼저 늙을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씨엘이랑 조용히 살래.”
한쪽에서 키득대며 뭔가 장난질할 것을 찾던 쌍둥이는 사비나의 예리한 시선에 걸려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멈췄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키득대며 웃었다.
“어머니도 오시겠다고 했는데 좀 늦어지나 봐.”
“곧 오시겠지. 바쁘면 못 오실 수도 있는 거고.”
어머니를 기다리는 씨엘을 보며 난 얼얼한 두 볼을 손으로 문질렀다.
“말도 안 돼. 저 녀석이 결혼이란 것을 하다니, 이건 기적일까. 동생밖에 모르는 바보가 한 여자의 남편이 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호들갑을 떨며 말하는 이는 바로 엘런 히알루였다. 얼마 전에 히알루 후작이 된 엘런은 조슬린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오빠를 보며 믿어지지 않는단 표정을 지었다.
유일하게 오빠 친구로 초대받은 엘런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었다.
“엘런 오빠! 오셨어요.”
“응, 오랜만에 보는구나.”
“저번 달에 우리 제이든 결혼할 때 봤으면서.”
“하루하루 안 볼 때마다 라피가 쑥쑥 커서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 들어.”
이미 다 커 버린 키인데 엘런 오빠는 이 순간에도 우스갯소리를 했다. 틈만 나면 이곳에 와서 오빠를 만나고 겸사겸사 나와 인사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게 엘런만의 매력 포인트였지만.
“아참, 둘째 낳았다면서요? 축하해요.”
“응, 고마워. 라피 닮은 딸 낳고 싶었는데 아들을 낳았어.”
아마 이번 대엔 딸보다 아들의 비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라피, 나도 왔는데 내 존재감이 그렇게 없나?”
“어? 아, 황태자 전하께서 여기까지 납실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어.”
“그래놓고 초대장은 왜 보낸 거야?”
“예의상?”
“내가 말을 말지. 으휴.”
클레어런스가 나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얼굴엔 미소가 스몄다. 그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데 황태자랍시고 너무 신경 쓰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일반 하객처럼 대했다.
“라피는 판테르 경의 결혼식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해?”
“그냥 그래. 나만의 오빠를 린에게 후다닥 보낸 느낌이랄까.”
오빠가 결혼 후에도 나를 생각하는 게 바뀌진 않을 거란 건 알지만 조금 낯선 기분이 들었다. 뭔가 시원섭섭한 느낌에 나는 씨엘의 손을 꽉 붙잡았다.
“내 앞에서 스킨십은 좀 자제하는 게 어때?”
“그럼 뒤에서 해도 돼?”
“후우, 내가 말을 말지. 말을 말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클레어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곤 씨엘을 봤다.
“라피의 눈에서 눈물 뽑으면 내가 바로 채갈 거네.”
“괜찮습니다. 라피가 제 눈에서 눈물 뽑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가 눈물 흘린다고 황태자 전하께서 저를 채가시면 안 됩니다. 저는 라피 것이니까요.”
씨엘의 말에 클레어런스는 순간 썩어들어 가는 표정을 지었다. 못 들을 것을 들은 대가로 클레어런스의 입이 다물렸다.
“그러니까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마. 황태자 전하, 저번에도 써먹었으면 이젠 그만할 때가 되었잖아.”
“그만큼 라피가 아까우니까 그렇지. 나랑 결혼 안 할 거면 평생 결혼 안 하고 나랑 친구했으면 해서.”
“미치셨어? 황태자 전하는 결혼해서 황후를 옆에 앉혀 둘 거면서 나는 결혼하지 말라고? 어느 나라 사고방식이야 그게.”
“나도 안 할 건데.”
“아, 눼눼,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늙은 총각이 되어 죽든 말든 하세요.”
친구라는 인간이 너무나 잔인한 이야기를 한다며 투덜대는 클레어런스를 보니 잠시 우울했던 게 싹 사라졌다.
기나긴 결혼이 끝나고 곧장 피로연이 열렸다. 신랑 신부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가족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하객으로 초대된 이들을 맞이하며 인사했다.
“라피도 이제 슬슬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나?”
“되지 않았어.”
아빠의 친구로 초대되어 온 안젤로 후작이 다시 부지깽이로 서서히 타오르는 장작불을 쿡쿡 찔러댔다. 이에 아빠가 단호하게 말하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려거든 닥치고 꺼지라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안젤로 후작은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우리 딸은 벌써 넷째를 낳았어.”
“그만하지? 딸이 무슨 아이 낳는 도구도 아니고 뭔 아이를 그렇게 많이 낳는 건데. 적당하게 한둘이면 되지. 너무 많이 낳으면 모체에 무리가 될 게 뻔하건만.”
“뭐라는 거야. 이 친구가. 다산은 풍요의 상징 아니겠나.”
“정말 그리 생각하나.”
아빠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자 안젤로 후작의 눈도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을 본 안젤로 후작의 얼굴이 순간 핼쑥해졌다.
“방금 한 말 취소하겠네. 우리 딸에게 아이는 그만 낳으라고 해야겠어.”
아빠와 안젤로 후작이 본 곳은 바로 벤스의 가족이 있는 곳이었다. 아들만 무려 다섯인 크리스토퍼 후작가는 오늘도 다사다난해 보였다. 분명 아들 넷일 때 그만 낳으라고 한 것 같은데 마지막 한 번만 더 시도해 보겠다고 하더니 끝내는 막내도 아들이었다.
아들 풍년인 벤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찹쌀떡은 아무나 낳는 게 아닌가 봐.”
“네, 우리 라피 아가씨 같은 찹쌀떡 닮은 딸 하나 갖고 싶었는데…… 그러지 말고 우리 한 번만 더 시도해 보면 안 될까요?”
여전히 그놈의 찹쌀떡에 미련이 많은 듯한 세실은 벤스를 슬쩍 졸랐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 아이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딸일 거라는 장담을 하지 못했다. 더는 모험을 하지 않기로 한 벤스의 결정에 속으로 손뼉을 쳤다.
“라피, 우리는 하나만 낳아서 잘 키우자. 저렇게 낳았다가는 라피의 몸이 남아나지 않겠어. 안 그래도 약해서 걱정인데.”
손님을 맞이하며 정신이 없는 내게 씨엘이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지금은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결혼이 문제 아닐까?”
“응, 그렇지만 허락해 주시겠지. 우린 이미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는 씨엘과 함께 목욕을 하곤 했다. 만약 씨엘이 수인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 이야기는 우리 아빠랑 오빠 있는 곳에서 하지 마. 그랬다가는 결혼은커녕 씨엘의 머리가 두 개로 쪼개질지도 몰라.”
잠시 시간이 남아 씨엘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미네르바가 등장했다.
“티그리스 공작님, 판테르 공작님, 그리고 아퀼라 공작님, 다들 무탈하셨는지요. 집안에 큰 경사가 있다는 초대장이 왔는데 제가 일이 바빠서 좀 늦었습니다.”
오빠의 결혼 선물이라고 궤짝 몇 개를 가지고 온 미네르바가 인사하며 늦은 것에 사과했다.
“아닙니다. 바쁘시면 안 오셔도 되는데 이런 귀한 선물을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미네르바와 함께 온 이들이 뚜껑을 열자 금괴와 금화가 가득했다. 보석은 착용하면 가치가 낮아지지만, 금의 가치는 꾸준했다. 나라에 전쟁 비슷한 일이 터진다면 당장 시세가 올라가는 것은 보석이 아닌 금이었다.
그 정도로 귀한 것을 몇 궤짝이나 결혼 선물이라고 가져왔으니 다들 두 눈을 휘둥그레 뜰 법했다. 게다가 아직 서부는 동부와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니 초대받은 귀족들이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당연한걸요. 우리 미래의 며느님이 계신 곳인데 이런 선물은 매우 약소하지요. 원하신다면 지참금으로 광산도 얹어 줄 수 있습니다. 원하시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시지요.”
“지참금은 필요 없습니다만.”
“그렇다면 아들을 키워 준 값이라고 생각하시지요.”
“그것도 필요 없습니다. 알아서 혼자 잘 컸으니 제가 키웠다고 하기에도 좀 무리가 있군요.”
아빠는 어떻게든 안 받으려고 하고 미네르바는 뭐라도 하나 더 주고 싶어 아옹다옹했다. 그 모습을 본 동부 지방 귀족들의 시선이 묘하게 변했다.
연회에 가지 않아 씨엘의 정체를 알지 못한 이들은 미네르바의 아들이 누군지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어머니, 늦게 오셨군요.”
“음? 못 본 사이에 더 키가 쑥쑥 큰 것 같구나. 우리 아들이 올해로 열여덟 살이지? 조그맣게 낳아서 약해빠져 오늘내일하던 녀석이 벌써 결혼할 나이가 되다니, 감회가 새롭구나.”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미네르바는 씨엘의 어깨를 다독였다. 수인족이라 키가 큰 편인 미네르바는 씨엘과 키가 거의 비슷해 보였다.
“우리 포실포실 백설기는 잘 있었니? 보면 볼수록 예뻐서 탈이구나. 이러다가 딴 놈이 채갈 것 같아서 걱정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까지 씨엘보다 더 예쁜 남자는 못 본 것 같으니까요.”
나를 꼭 끌어안은 미네르바는 방긋 웃었다.
“하긴 우리 아들이 좀 예뻐야지. 이젠 가슴도 어느 정도 단련을 한 듯하구나. 예전의 빈약한 모습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
“네, 라피를 위해 매일 열심히 단련 중입니다.”
“그래, 그런 마음가짐을 가져야 멋진 여자와 결혼할 수 있지. 제 지위에 만족해서 가만히 있으면 나태해져서 도태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매일 열심히 노력하려무나.”
미네르바와 씨엘이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이들이 많으니 앞으로는 청혼서가 많이 오지는 않을 것 같다. 안 그래도 씨엘의 정체가 황실 연회 때 밝혀져서 청혼서가 좀 줄어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봄부터 가을까지 모은 청혼서를 겨울에 불쏘시개용으로 써서 살림에 보탬이 되었다며 이레나가 좋아했다. 하지만 이젠 땔감 살 돈이 평소보다 더 나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