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이번 가족회의는 우리 집에서 하기로 했으니 그때 두 사람의 사이를 말하는 게 좋겠구나.”
두 달에 한 번씩 세 가문이 뭉쳐 가족회의랍시고 모여서 1박 2일간 실컷 놀며 이야기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떠들썩한지 시장통에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가족이 많으니 서로 할 말도 많아서 시끄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저흰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유진 도련님, 조슬린 경!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아가씨, 설향차는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벤스와 맥스가 자리를 떴다. 내일 세 가문이 모이는 날이기에 다들 준비하느라 바빴다.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갔고 비슷한 시간에 북부와 남부에서 가족들이 몰려왔다.
“어휴, 사비나, 에이든! 쌍둥이 좀 어떻게 안 되겠니? 정신 사납구나. 우리 말랑 콩떡 아가씨는 참 얌전하게 있었는데.”
“그건 고모가 비정상이라서…… 악!”
“이놈의 자식이 감히 내 하나뿐인 손녀한테 비정상이라니, 쯧! 후계자 자리에서 박탈해 버릴까 보다.”
“아, 안 돼요. 할아버지, 그렇게 되면 제가 후계자 공부해야 하잖아요. 절대 반대입니다. 이번 기회에 고모한테 교육 좀 단단히 시키라고 말해 둘게요.”
벌써 이 집안은 떠들썩했다.
“이모, 나 왔어. 그동안 좀 큰 것 같네?”
어렸을 땐 키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콜린의 키가 너무 커져 버렸다. 그래서 감히 이모인 내가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복작복작한 가족들을 보고 있는 내게 와서 제 어깨에 기대게 해서 키를 쟀다. 매우 괘씸한 콜린이었지만 대양처럼 넓디넓은 아량을 베풀어서 봐줬다.
“내가 큰 게 아니라 네가 줄어든 게 아닐까?”
“아닌데, 나 저번에 왔을 때보다 좀 더 컸어. 이것 봐! 아버지랑 키가 비슷비슷하잖아.”
“그건 형부가 나이 먹어서 뼈가 삭아서 줄어든 것일 거야.”
“처, 처제! 내 뼈가 삭다니, 나 아직 현역인데 그런 말을 들으면 너무 슬퍼서 밤에 에리카의 가슴에 안긴 채 울지도 몰라.”
형부의 말을 들은 아빠는 질색팔색한 표정을 지으며 얼른 내 귀를 막았다.
“자네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군.”
“아버님,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것이라고 하더군요. 전 아직 우리 에리카와 말랑한 처제를 두고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 자네는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 살게나.”
“덕담 감사합니다. 아버님.”
뭔 말을 해도 절대 지려고 하지 않는 형부를 본 아빠는 혀를 찼다. 그러곤 대가족이 먹을 음식이 차려진 식당으로 안내했다. 푸짐한 양의 요리에 다들 환하게 웃으며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 이런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역시 에이든 님과 결혼하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실베스터 왕국의 식구는 너무 단출해서 뭔가 먹을 때도 조용해서 접시 긁히는 소리만 나도 쳐다볼 정도였다고 한다. 한데 여기에서는 접시를 긁어도 그 소리가 말소리에 묻혀서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다며 사비나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많이 먹게나, 저번에 봤을 때보다 살이 좀 더 빠진 것 같은데.”
“큰고모님, 정말 감사해요.”
사비나의 접시에 언니가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얹어 주며 말했다. 설향으로 만든 소스에 담가 숙성한 고기는 매우 부드럽고 누린내도 나지 않았다. 최고로 맛있는 식사를 끝내자 곧장 대가족을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는 응접실로 이동했다.
손님맞이용 응접실 몇 개를 터서 아이들도 뛰어놀 수 있을 정도로 넓혔다. 뛰어놀다가 다치는 일 없게 간단한 가구 외엔 존재하지 않은 응접실에서 어른들은 차를 마셨다.
쌍둥이는 제 세상이라도 만난 듯 뛰어놀았다. 그런 쌍둥이를 잡으러 다니느라 에이든이 십 년은 더 늙은 듯했다.
“슬슬 제이든의 결혼 날짜를 잡으려고 하네.”
내가 소개해 준 영애와 잘 맞아 늦게 결혼을 생각하는 제이든은 할아버지 곁에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지?”
“음, 대략 2년 정도 되었습니다. 고모할아버지.”
“2년이라…… 그동안 마음이 변하진 않았고?”
“그럴 리가요. 센스 있는 여인이라 보면 볼수록 푹 빠져들었지요. 마치 우리 고모처럼요.”
“설마하니 우리 라피가 소개해 줘서 결혼을 하려는 건 아니고?”
“그럴 리가요. 저도 보는 눈이라는 게 있는데 고모가 소개해 줬다고 무작정 결혼하려는 그런 정신 나간 놈은 아닙니다. 크흠흠.”
아빠의 질문에 조금 수줍은 듯 얼굴을 슬쩍 붉힌 제이든은 자그만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응접실 문이 열리며 제이든과 비슷한 미소를 지은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오, 마리엘! 이제 왔느냐.”
할아버지의 반김에 마리엘은 흘러내린 갈색 머리를 뒤로 넘기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일찍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거리가 밀려 들어와서 좀 늦었습니다.”
마리엘 카니스-
카니스 자작가의 장녀로 올해 스물두 살이라 제이든과 무려 열 살쯤 차이가 났지만 작은 조카님이 동안이라 그리 이상해 보이진 않았다.
“고, 고모님! 늦어서 죄송해요.”
“괜찮아. 어차피 우리 집안일 하느라 바쁜 거잖아. 나 그 정도도 이해 못 할 시고모는 아니야.”
마리엘은 제 능력을 발휘해서 수도에 있는 판테르 공작저의 행정관으로 일하는 중이었다. 사회생활을 해 보고 싶어 하기에 우리 집에 꽂아 줬는데 적성이 맞는지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행복하다며 평생 일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리엘, 이쪽에 앉아. 제이든의 옆자리가 비어 있어.”
“네!”
일거리를 가지고 왔는지 가방을 옆에 있는 고용인에게 맡긴 마리엘은 제이든의 옆에 앉았다. 그런 마리엘의 손을 살짝 잡은 제이든은 헛기침을 했다.
“크흠흠, 일은 힘들지 않아? 고모네가 진행하는 사업이 많아서 정신없을 건데.”
“괜찮아요. 이 정도 일도 못 하면서 어찌 제이든 님과 결혼할 수 있겠어요. 열심히 일 배워서 할머님과 어머님, 그리고 형님을 도울 수 있도록 노력할 거예요.”
참한 작은 며느릿감을 본 다니엘과 헬레나의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우리 도련님은 늦게 연애를 시작하더니 아주 얼굴이 활짝 핀 것 같아요. 가까운 미래의 동서도 능력자이고. 저도 뒤처지지 않게 열심히 노력해야겠어요.”
두 손을 불끈 쥔 사비나의 양손엔 쌍둥이가 잡혀들었다. 순식간에 제압해서 양쪽 옆구리에 끼우자 쌍둥이들이 바동바동댔다.
“아이들은 이만 잘 시간이야. 그러니까 얼른 자렴.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정신 사납게 뛰어놀지 말고.”
“하지만 어머니, 저흰 아직 더 놀고 싶…….”
“쓰읍!”
사비나의 눈짓에 쌍둥이들은 순간 얌전해졌다. 저번에 사비나한테 버릇없다고 매타작을 당한 후로 눈만 슬쩍 크게 떠도 매우 온순해졌다.
유모의 손에 이끌려 손님방으로 향하는 것을 본 사비나는 방긋 웃으며 에이든 옆에 앉아 차를 마셨다. 예전엔 마냥 착하고 순진한 아가씨였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무서워지는 것 같았다.
“라피도 아이 낳으면 저렇게 변하는 거야?”
“아니, 난 내가 아이 안 돌볼 건데. 내가 아이 돌보다가 삐끗이라도 해서 밤에 앓아누우면 어쩌려고 그래.”
“아, 그건 그러네. 원활한 밤 생활을 위해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는 직접 키울게. 나 힘세서 아이들 잘 돌볼 수 있어.”
자신감 넘치는 씨엘을 에이든과 제이든이 엄청 불쌍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봤다.
“제정신으로 우리 고모랑 결혼하려고 하다니, 이건 뭐 표범 소굴에 알아서 날 잡아 잡숴 하고 들어오는 격이잖아.”
“표범만 있으면 양반이지. 여긴 호랑이에 독수리까지 두 눈을 희번득 뜬 곳이라고.”
“아니 근데 생각해 보니 씨엘 님은 수인이잖아. 그럼 표범이든 뭐든 그 위에 있는 거 아니야?”
“그럼 뭐 해. 스스로 저리 몸을 낮추는데. 종족만 수인이지 하는 모습은 고양이야. 고양이는 공동 육아를 한다는데…….”
나이 많은 두 조카님의 말을 들은 사비나와 마리엘이 얼른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내 표정이 살짝 굳어지자 눈치를 챈 듯했다.
“너희 자꾸 그러면 당장 씨엘이랑 결혼해서 고모부라고 깍듯하게 부르게 만들어 버릴 거야.”
나의 선전포고에 가장 놀란 사람은 콜린이었다.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뜬 콜린은 안 된다며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안 돼! 이모는 나랑 결혼할 거야. 내가 이모의 이상형이 되려고 얼마나 노력 중인데. 멋진 남자가 되려고 하기 싫은 공부도 꾸역꾸역 하고 기사가 되려고 아카데미에도 갔잖아.”
실제로 공부하기 싫어하는 콜린에게 나란 미끼를 던진 언니와 형부였다. 공부하기 싫다고 토라지면 곧장 내 이상형을 꺼내들었다. 그러면 눈에 불을 켜고 공부를 한다고 했다.
나와 떨어지게 된다며 아카데미 역시 가기 싫어했지만, 형부가 가슴 빵빵한 기사를 내가 좋아한다는 말을 흘렸다. 그 결과 지금 아카데미 수석과 차석을 오르내리는 중이었다.
“콜린, 네가 아직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구나. 어찌 먼 이모도 아니고 친이모랑 결혼을 할 수 있겠니. 어렸을 때야 뭘 모르니까 넘어갔다마는 지금은 곧 성인이 되지 않느냐.”
고개를 흔든 오빠가 콜린에게 현실을 알려 줬다. 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콜린은 절대 포기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이모, 우리 야반도주하…… 크윽!”
“할아버지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에리카, 사위! 자식 교육 참 잘 시켰구나.”
듣다 못 한 아빠가 콜린의 머리에 꿀밤을 놓으며 언니와 형부를 봤다. 딴청을 부리듯 시선을 돌린 언니와 형부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식 교육을 위해 나를 팔아넘긴 두 사람은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나이 많은 조카님, 미안하게도 나는 라피 거야. 그러니까 딴 여자 알아보도록.”
“씨엘 님이랑 이모는 안 어울려. 그리고 멋지지도 않…… 쳇!”
뭔가 말하려던 콜린은 순간 뭔가 씹은 표정을 지었다. 이미 실베스터 왕국에서 기사 작위도 받은 씨엘이었다. 게다가 수인족답게 엄청 예뻤다. 요즘엔 몸에 근육도 착실하게 붙어서 아빠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빵빵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니 다른 문제로 넘어가도록 하지. 내년쯤에 제이든과 마리엘을 결혼시킬 예정이네.”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안건이 나왔다. 제이든과 마리엘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어른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렇군요. 아버님, 근데 날짜가 서로 겹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음? 그게 무슨 말인가?”
아빠가 오빠와 조슬린을 슬쩍 보고는 슬쩍 말했다.
“우리 집안도 내년에 결혼할 커플이 있어서 말입니다. 좀 더 만나 보라는 의미로 내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순간 가족들의 시선이 나와 씨엘 쪽으로 쏠렸다. 절대 안 돼 라고 말하지 못하고 깜빡이는 눈들에 난 고개를 저으며 뒤에 있는 오빠를 엄지로 가리켰다. 내 손끝이 가리킨 곳을 본 가족들은 탄성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온갖 종류의 축하가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어색한 미소를 지은 유진과 호위기사가 아닌 가족으로서 이런 자리가 낯선 조슬린의 얼굴에 노을이 드리워졌다.
다들 축하할 때 유일하게 축하 말을 건네지 않은 제이든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삼촌이 결혼하는 거 반대입니다.”
“뭐?”
갑작스레 혼자 튀려고 작정한 듯한 제이든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안절부절못한 마리엘이 제이든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그걸 느끼지 못한 듯 주둥이를 놀렸다.
“아무리 삼촌이라고 해도 나이는 내가 많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결혼 후에 삼촌이 결혼하는 것으로 해요. 삼촌, 인간적으로 삼촌보다 내가 더 급해요. 그러니까 이번만 봐줘요.”
제이든의 애절한 부탁에 오빠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