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이 시대에서도 내 아이를 낳아 달라는 프러포즈가 먹힐 줄이야.
나는 한밤중에 가제보로 가서 먼저 잠복해 있었다. 이윽고 계획대로 오빠가 조슬린을 데려오자 그때부터 스케치북에 글을 적어서 오빠의 언행을 조절했다.
오빠는 그걸 보고 찰떡같이 잘 말했다. 그 결과 손잡고 유유히 건물로 들어갔다. 고생한 나는 놔둔 채로 말이다.
“이래서 오빠는 결혼하면 남이라는 말이 나오는 건가. 하아암.”
오늘을 거사 일로 정했던 나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어느새 인간형으로 돌아와 옷을 입은 씨엘을 봤다.
“씨엘, 오늘 수고했어.”
“꽃 한 송이 물고 간 게 전부인데 뭘.”
중간에 오빠가 꽃을 꺾었으면 조슬린이 눈치채고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떡하니 나타나 꽃을 건네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 일엔 씨엘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젠 들어가서 자자. 다리는 방에 들어가서 제대로 주물러 줄게.”
나를 힘들이지 않고 안아 올린 씨엘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안 무거워?”
“신부가 무거우면 신랑이 힘을 키우면 되는 거지. 그렇다고 라피가 무겁다는 건 아니야. 구운 찹쌀떡 하나 정도의 무게랄까.”
수인족은 정말 힘이 대단해서, 티끌만큼도 힘겨워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뒤로 업은 것도 아니고 공주님 안기로 가는 동안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건물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상태라 오래 걸어야 하건만 씨엘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씨엘의 품에 안긴 나를 본 고용인들은 전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잘 키운 막냇동생이 연애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듯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씨엘은 나를 침대에 앉혔다. 그러더니 곧장 따끈한 물을 대야에 받아 와서 신발을 벗긴 후 내 발을 담갔다.
“뭐 해?”
“발 마사지, 이렇게 해 주면 피로 해소에 좋고 근육이 풀린다고 들었어.”
벌써부터 외조를 하는 건가.
씨엘은 내 발을 보석을 만지듯이 조심히 씻기며 꾹꾹 눌렀다. 처음엔 통증이 느껴져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으윽.”
“아파? 미안해. 힘 조절한다고 했는데 라피에겐 좀 셌나 봐.”
손에서 힘을 뺀 씨엘이 발을 주무르자 간지러우면서도 뭔가 찌르르한 느낌이 들었다. 따끈한 물이 식자 수건으로 발의 물기를 닦았다.
발 마사지 때문인지 몰라도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침대에 눕자 씨엘이 제 손가락을 풀며 아까 고생한 다리를 조물조물 눌렀다.
발과 다리가 호강 중에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잠결에 ‘잠시 나갔다가 올게.’란 소리가 언뜻 들린 듯했지만 무거운 눈꺼풀은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깊은 잠을 자다가 깨어나니 까만 고양이가 품에 안긴 채 꼼지락거렸다. 고양이로 돌아온 씨엘을 안은 채 얼마나 늦장을 부렸을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기 싫어서 대답하지 않았지만,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오늘은 가주님께서 직접 아침 식사를 하자고 연락하셔서요. 그러니 피곤하시더라도 세수하고 옷 갈아입으시는 건 어떨까요.”
제니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떠지지도 않은 눈을 억지로 비비며 설렁줄을 잡아당긴 후 다시 누웠다. 그와 동시에 밖에 대기 중인 이들이 죄다 몰려들었다.
“후아암, 누가 들으면 아침 식사를 일 년에 한두 번 같이 먹는 줄 알겠어요.”
늘어지게 하품한 나를 제니가 억지로 일으켜 앉혔다.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는 나를 본 고용인이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고양이 세수하는 것 같아요.”
“아가씨, 옆에 씨엘 님이 계시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면 서운해하실지도…… 아, 아니군요.”
언제 일어났는지 모를 씨엘이 분홍젤리 발바닥에 물을 묻혀 얼굴을 톡톡 두들긴 후 세수를 끝냈다. 그 모습을 본 제니는 바로 말을 바꿨다.
“씨엘도 얼른 옷 갈아입고 와. 아빠가 식사하자고 하셨대.”
뀨웅.
고용인이 탈의실에서 내 옷을 꺼내 오자 씨엘도 곧장 그곳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멀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온 씨엘은 나를 보며 느른한 표정을 지었다.
“씨엘, 지금 보니까 살이 좀 찐 것 같아. 혹시 밤에 밤이슬이라도 밟아?”
씨엘의 체형에 꼭 맞게 지은 옷이건만 가슴 부분이 터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 것 같았다.
“밤에 산책을 하긴 하지, 그렇다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아니야.”
“그럼 남자 만나?”
“그럴지도.”
어깨를 으쓱인 씨엘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한쪽 무릎을 꿇은 후 내 발에 양말과 신발을 직접 신겨 줬다.
“씨엘이 마사지해 줘서인지 금방 잠들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런 거라면 언제나 말만 해. 바로 해 줄게. 이런 게 바로 결혼 전부터 외조하는 예비 신랑의 바람직한 자세이지.”
“풉! 말이나 못 하면…… 이제 얼른 가자. 아빠가 기다리실 거야.”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씨엘이 손을 내밀었다. 항상 그러하듯 씨엘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서로 손가락을 깍지 낀 채 손을 내린 우린 식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본 이들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걸린 듯했다.
“근데 씨엘은 집에 안 가 봐도 되겠어?”
“음? 내 집은 여기인데.”
“아니 여기 말고 서부 말이야.”
“어머니도 따로 부르지 않는데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내 집은 라피가 있는 곳이니까.”
이러다가 내가 서부로 안 가면 씨엘은 그곳에 평생 가지 않을 기세였다. 나 때문에 모자 인연이 끊어지면 안 될 것 같으니 조만간 한 번쯤 들러야 할 것 같다.
“아가씨, 어서 들어가시지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고마워요.”
식당 밖에 대기 중인 기사가 문을 열어줬다. 그곳엔 아빠와 오빠뿐만 아니라 조슬린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맥스와 벤스 역시 야근을 한 티를 내며 앉은 채 우릴 기다렸다.
“어서 오너라. 우리 딸, 얼른 앉으렴. 그리고 자네도 앉게. 오늘은 유진이 할 말이 있다는구나.”
아빠의 말에 우린 곧장 빈 곳에 앉았다. 그러자 곧장 요리가 들어왔다. 잠시 평소와 같은 잡담이 시작되었다. 벤스와 맥스의 한탄 섞인 말에 아빠를 봤다.
“아퀼라 공작저의 보좌관은 주인이 없어도 알아서 할 일을 하는데, 우리 집안은 왜 이리 말이 많은지 모르겠군.”
여전히 완벽하게 좋은 사이가 아니면서도 이럴 때만 형부 쪽 이야기를 꺼내는 아빠였다.
“아빠, 그곳과 이곳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맞습니다. 라피 아가씨의 말씀이 천만번 맞습니다.”
내 말에 벤스가 신나서 동의했다. 그 모습을 본 맥스는 살짝 눈썹을 찡긋했다. 뭔가 다음에 올 말을 대비라도 하듯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아퀼라 공작저엔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젊은 피가 수혈되어 없는 일도 만들어서 하는 열정을 가졌잖아요. 그에 비해 여긴 고임금에 고령의 두 분이 있으니 움직이기 싫어하는 거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쿨럭, 아, 아가씨! 고임금에 고령이라니요. 고임금은 맞지만 전 아직 젊습니다. 아직 사십대도 안 되었다고요. 그에 비해 워렌 후작님은 좀 늙으셨지요.”
“크리스토퍼 후작, 지금은 그럴 말을 할 때가 아닌데. 후우, 여하튼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구운 찹쌀떡이 밉다는 말이 왜 생겼는지 알 것 같습니다.”
웃자고 한 말에 두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사이에 두고 죽을상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조슬린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살짝만 건드려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조슬린의 손을 꼭 잡으며 옅은 미소를 지은 오빠를 보아 하니 밤에 뭔가 찐한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었다.
식사가 끝난 후 차가 들어왔다. 작년에 직접 만들었다며 미카엘라와 라파엘이 가지고 온 설향차는 향기부터가 남달랐다. 새콤달콤한 진한 향기에 다들 탄성을 질렀다.
“설향차를 마시고 싶어서라도 아가씨가 참석하시는 식사 자리는 절대 마다하지 않습니다. 흐으음, 정말 맛있습니다.”
실제로 맥스는 식사에 초대하면 내 참석 여부를 먼저 묻곤 했다. 그러고는 내가 없으면 과감하게 패스했다. 이럴 때만 눈치 없는 신입사원 흉내를 내는 노련한 맥스는 설향차를 마시며 감동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있어야만 나오는 설향이기에 간혹 아빠의 보좌관은 이걸 먹기 위해서라도 상관과의 식사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거 맛있어요?”
“네, 당연하지요. 레몬차는 설향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설향이야말로 천국의 과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실제로 눈이 오는 지역에서 자라는 설향이기에 천국처럼 새하얀 곳에서 생산된다 하여 천국의 과일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만큼 먹어 볼 기회가 흔치 않기에 그 별명이 참 잘 어울렸다.
“더 드시고 싶으시다면 조금 덜어 드릴게요. 저야 뭐 라엘한테 말하면 곧장 갖다줄 거니까 괜찮아요.”
“저, 정말요? 공작님 밑에서 굴려져도 우리 아가씨가 던져 주는 떡밥에 홀딱 반해 남아 있는 거랍니다.”
“언제는 말리는 구운 찹쌀떡이 밉다면서요?”
“음? 아니 대체 어느 주둥이가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군요. 구운 찹쌀떡이 얼마나 고소하고 쫀득한데요. 요즘엔 설향 조청에 찍어 먹는 게 유행이라고 공작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설향차 한 잔에 맥스는 평소 싫어한 벤스처럼 말을 쉽게 바꿨다. 그 모습을 본 벤스는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유진, 왜 우릴 이 자리에 불렀는지 이야기하거라. 뭐 짐작은 된다만.”
아빠가 우릴 부른 게 아니라 오빠가 불렀다는 것을 안 나는 씩, 웃었다. 무슨 말을 할지 대략 짐작이 되었다.
“다름이 아니라, 조슬린과 교제 후 내년쯤에 결혼하고 싶습니다.”
오빠의 말에 다들 놀랄 줄 알았는데 누구도 과장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옅은 탄성을 지를 뿐이었다. 심지어는 아빠 뒤에 서 있는 오스카마저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결혼 문제는 너희에게 맡길 테니 알아서 하거라. 그나저나 조슬린 경, 아니 조슬린…… 우리 아들의 마음을 잡아 줘서 고맙구나.”
“네? 아…….”
“다행히 다 늙어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아무나하고 결혼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오빠에게 결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막상 나이를 먹어 가니 아빠는 애간장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한데 조슬린이 상대라고 하니 얼마나 좋겠는가.
기사로서 능력이 되는 며느리에 나와 친구로 지낸 조슬린이라면 아빠 입장에서 마음이 놓인 듯했다. 게다가 아무리 절연한 사이다시피라고 해도 니콜라이 백작가의 여식이니 핏줄로 흠집 잡힐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 집에 안주인이 없어서 안살림은 시녀장인 이레나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라피에게 일임하고 싶었는데 우리 딸이 워낙 마법만 공부하니 일을 시키지 못했단다.”
“아, 아닙니다. 라피는, 아니, 라피 아가씨는 계속 공부할 수 있게 제가 뒷바라지를 하며 지켜드리겠습니다. 라피 아가씨는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니까요.”
귀요미라고 불릴 나이는 이미 훨씬 지난 것 같았지만 조슬린의 말에 아빠와 오빠는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면 집안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공부만 하는 고시생의 뒷바라지를 새 며느리에게 맡기는 것처럼 들렸다. 뭐 집안일을 하지 않는 건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지만.
본디 안주인이 없기에 딸인 내가 안살림을 맡는 게 맞았다. 하지만 아빠는 마법 공부는 하지 말라면서도 내게 일할 것을 강요하지 않고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 줬다.
그걸 알고 있기에 더욱더 마법 공부에 매진해서 정식 마법사가 될 수 있었던 나는 방긋 웃었다.
“그나저나 왜 맥이랑 벤은 놀란 표정을 안 지은 건가요? 난 두 분 다 놀랄 줄 알았는데.”
내 물음에 벤스와 맥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음? 벌써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판테르 공작저에서 두 분이 잘되리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맞습니다. 간혹 라피 아가씨와 함께 있는 유진 도련님을 볼 때마다 시선이 은근히 조슬린 경에게 향해 있었거든요.”
헐, 이것 보래요. 오빠가 조슬린을 좋아하는 걸 이 집안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 눈치가 너무 빨라서 오빠의 시선만으로도 모든 것을 파악한 듯했다. 이래서 아빠가 맥스와 벤스를 옆에 두는 게 아닌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