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처음엔 세 공작가에서 싸고돌았지만, 이젠 서부의 루피노 공작도 합류했다. 라피만 보면 녹아내렸다. 그런 그들에게 라피는 쫀득하게 달라붙었다. 다 컸지만, 요즘에도 가족들이 라피의 볼이 쫀득하다며 자신의 볼에 비비적대곤 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멋지고 행복해 보였다. 감히 그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한 다리 걸쳐 보고 싶었지만 이보다 더한 행복을 누리면 깨질 것 같아 애써 숨죽였다.
“라피가 있어서 이곳에 적응도 잘했고, 너무 받은 게 많아서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한데 라피에게 부족한 게 없어 보여서 그게 좀 섭섭할 정도입니다.”
“라피가 비록 풍족하게 자랐다지만 분명 알게 모르게 부족한 게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가족들을 지키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것이겠지요.”
라피가 가족에게 무조건 도움만 받는 건 아니었다. 가족들 사이에 분쟁이 터지면 언제 어디든지 뛰어가서 해결해 주곤 했다. 실제로 아퀼라 공작 부부의 일만 해도 도를 넘는 간섭이 아닌가 했다. 하지만 라피가 개입을 한 이후로 두 분의 사이는 급격히 좋아졌다.
가족들이 지키는 말랑한 귀요미 또한 그들을 지키기 위해 매일 바빴다. 북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콩가루가 탈탈 털릴 정도로 말이다. 요즘엔 또 제이든과 다른 영애 사이에 다리를 놔 줘서 결혼이 성사되기 직전이었다.
한동안 라피를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정원의 끝에 닿았다. 단둘이 있으면 어색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라피를 주제로 둘은 신나게 떠들어대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
달이 중앙에 걸쳐 있음에도 둘의 이야기는 아직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더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다면 저쪽에 가제보가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시겠습니까?”
유진의 말에 조슬린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곤 매우 무해한 미소를 짓는 유진을 보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제보로 이동한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 달빛이 닿아 부서진 곳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이곳은 어머니께서 좋아한 공간입니다. 비록 라피는 이곳이 좀 깊숙한 곳이라 잘 와 보지는 않지만, 달빛이 가장 밝게 비치는 곳이지요.”
“아, 그렇군요. 세라피나 님이라면 기사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분입니다. 그런 분의 따님인 라피의 호위기사를 하며 아드님과 이야기를 했다고 하면 기사들이 부러워할 게 분명해요.”
아카데미에 다닌 기사 중에 세라피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복도에 떡하니 세라피나의 그림이 붙어 있으니 말이다.
“전 어머니가 유명하지 않아도 되니 저희 곁에 계속 계셔 주셨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아카데미에 다닐 때 그림을 보지 않으려고 그쪽 복도는 가지도 않았지요.”
“아…… 그렇군요. 타인들과 가족이 생각하는 게 다르니…… 혹시 제가 판테르 경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아뇨, 이젠 무뎌져서 괜찮습니다.”
어린 시절에 어미를 잃고 힘들고 아파했을 유진을 본 조슬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가족들은 마음이 찢어졌을 테지만 세상 사람들은 세라피나를 영웅으로 추대했다.
황제의 명을 받잡고 참전해 비록 패전했지만, 다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산화했으니까. 어쩌면 그마저도 황실에서 타인의 충성심을 이끌기 위해 이용한 건 아닌가 싶었지만, 감히 제가 뭐라 말하지는 못했다.
잠시 이야기가 소강상태가 되었다.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오자 순간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급히 제가 걸친 망토를 풀어 조슬린의 어깨를 감싸 줬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래도 됩니다. 예전에 조슬린 경이 우리 라피가 추워할 때 카디건을 걸쳐 주셨지 않습니까. 그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어린 동생이 추위에 떠는데 오빠란 인간은 그걸 모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역시 동생 사랑이 넘치시네요.”
“당연하지요. 어머니께서 목숨 걸고 지킨 귀한 동생인걸요.”
“아, 그렇군요. 한데 보통은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그 아이를 미워하기도 하던데.”
“그랬다가는 어머니께서 꿈속에 나타나서 매일 굴렸을 겁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의 결실인데 어찌 어머니가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미워하겠습니까.”
오히려 어머니가 없어서 그게 안쓰럽고 짠해서라도 더 보듬고 어머니 몫의 사랑까지 듬뿍 줘서 키우는 게 정상이라는 말에 조슬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괜히 눈물이 차올랐다.
저를 낳은 어머니는 난산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 그때 아버지는 모든 일에서 손을 놓았다. 그리고 어느 날 술을 마시더니 대뜸 제게 소리를 질렀다.
‘너 때문에 마린이 죽었어, 너만 아니었으면 마린이 살아 있을 건데!’
아직도 그 말이 제 가슴에 콱 박혀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전부 제 탓 같아서 언니와 고용인이 괴롭힘도 어느 정도까지는 참았다.
한데 유진의 말을 들어 보니 꽉 박혀 있던 아버지의 말 한마디가 들썩이며 찔러댔다. 심장을 이리저리 헤집으면서 움직이자 이를 사리물었다.
제집에서는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했다며 냉대를 받았는데 라피는 오히려 더 깊은 사랑을 받았다. 어머니가 주지 못한 사랑까지 다른 가족이 채워 준 게 못내 부러우면서도 라피라도 그런 사랑을 받았다는 게 다행으로 여겼다.
“저, 저는…… 후우…….”
“말하기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약간 당황한 듯한 유진은 얼른 제 손수건을 꺼내 조슬린에게 건넸다. 억지로 눈물을 말리던 조슬린은 손수건으로 대충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추한 꼴을 보여 죄송합니다. 어릴 때 일이 생각나서…… 저를 낳은 후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저도 모르게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를 유진에게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들은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슬린을 제 품으로 당겨 등을 다독였다. 따스함에 다시 한번 울컥했지만, 심장에 박혔던 아버지의 악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개운해진 조슬린은 가시처럼 박혔던 곳에 빈 공간이 생기자 제 손으로 그곳을 꾹 눌렀다.
오늘의 산책은 잃은 것보다 얻는 게 많아 상당히 뜻깊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들썩인 감정을 애써 죽였다. 다시 평범한 기사가 된 조슬린은 얼른 유진과의 간격을 벌렸다.
“못난 꼴을 보였네요.”
“괜찮습니다.”
짧은 위로조차 해 주지 않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게 나았다. 하지만 이야기가 끊기자 다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낸 게 화근이 되었나 싶을 때 유진이 라피 이야기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동생 찬양을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그 동생을 호위하는 제게도 호감이 느껴진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동생과 관련된 거라면 씨엘을 빼고 모두 좋다는 유진의 말에 조슬린은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터트렸다.
한동안 라피 이야기 삼매경에 빠진 유진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주제를 갑자기 틀어 조슬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저기 조슬린 경, 혹시 제가 경에 비해 모자라거나 부족한 점이 있을까요? 솔직히 말씀해 주셔도 되니 눈치 보지 않아도 됩니다.”
“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조슬린 경이 저를 자꾸 밀어내려고 해서 한 질문입니다. 혹시 제가 눈치 없이 행동한 게 있다면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그, 그런 거 절대 없었어요. 오히려 너무 잘 대해 주셔서 제가 공주님이 된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절대 한사코 아니라며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그러곤 연애를 해 본 적 없는 조슬린은 뻣뻣한 몸을 풀며 제 결혼관을 설명했다. 애초에 결혼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데 라피를 처음 봤을 때부터 닮은 아이를 낳고 싶은 이상한 충동이 느껴진다는 말을 곁들였다.
그 말을 들은 유진의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역시 대화에 라피가 섞여 들어가면 쉽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런 감정을 우리 집안에서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글쎄요. 뭐라고 하는데요?”
“구운 찹쌀떡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풉!”
차라도 마시고 있었다면 유진의 얼굴에 분수 쇼를 펼칠 뻔한 조슬린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판테르 공작가에서는 라피를 구운 찹쌀떡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한데 구운 찹쌀떡 신드롬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단어에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이곳에서 오래 일하신 분들은 다들 그런 말을 하십니다. 비혼을 선언하셨던 분들이 라피를 보고는 라피 같은 아이를 낳고 싶다며 결혼하셨거든요.”
“저, 정말요?”
“네, 오스카를 제외하고 전부 결혼하셔서 아이를 낳고 알콩달콩 지냅니다.”
“그렇군요. 저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나 봐요.”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완전히 다운되었는데 계속 웃음이 실실 나왔다. 실제로 판테르 공작저에서 일하는 사람 중 제가 만나 본 사람들은 대부분 기혼이었다. 그것도 요즘에 늦둥이를 낳아 기르는 중년의 고용인도 있었다.
“한데 말입니다. 진짜 우리 라피 같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거, 진심이십니까?”
“물론이지요. 말랑말랑 쫀득쫀득한 귀여운 아기를 낳고 싶었어요. 게다가 오빠 말도 잘 듣고 제 고집만 부리지 않은 아이를 보고 있노라니 한눈에 반해 버렸거든요.”
“그렇다면 그 말랑말랑 쫀득한 귀여운 동생이 있는 오빠한테는 반하지 않았나요?”
“네? 아 저기 그게…….”
순간 훅 치고 들어오는 유진의 말에 조슬린은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당황해서 유진이 지금 저를 놀리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 진위를 따지지 못했다.
“조슬린 경, 아니 조슬린 양. 제가 한마디 해도 될까요?”
“네, 네? 아…… 말씀하세요.”
마른침을 꿀꺽 삼킨 조슬린의 뒤쪽을 슬그머니 본 유진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혹시 아직도 우리 동생 같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으십니까.”
“네? 아…… 네, 그렇긴 합니다.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라피 같은 아이를 낳고 싶었어요.”
“그렇군요. 한데 우리 라피 같은 아이를 낳으려면 저와 결혼하셔야 확률이 높아질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 제가 어찌 감히 판테르 경과의 결혼을 꿈꿀 수 있겠어요. 전 그런 거 감히 바라지 않습니다.”
라피와 유진은 같은 핏줄이었다. 그렇기에 라피 같은 아이를 낳고 싶으면 유진과 결혼하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동부를 주름잡는 판테르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자신은 기껏해야 사랑받지도 못하고 큰 백작가의 작은딸일 뿐이었다. 그것도 거의 절연하다시피 한 상태였다.
유진에 비해 기울어도 너무 기울었다. 현실에서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저 꿈만 꿨던 조슬린은 갑작스레 눈높이가 달라진 유진을 봤다.
한쪽 무릎을 꿇은 유진에게 씨엘이 언제 꺾어 왔는지 모를 하얀 장미를 문 채 잽싸게 달려왔다. 씨엘이 가져온 장미 한 송이를 내민 유진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슬린 양, 저와 결혼해서 라피 같은 아이를 낳아 주십시오.”
“…….”
“조슬린 양이 받지 못한 사랑까지 제가 듬뿍 줘서 키우겠습니다. 부디 제게 조슬린 양의 아이 아빠가 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순간 감정이 복받친 조슬린이 눈물을 주르륵 흘렸고 유진이 그녀를 조심히 안았다. 잠시 감정이 추슬러지자 둘은 손을 잡고 그곳을 떠났다.
부스럭 부스럭-
두 사람이 떠난 것을 확인한 후 씨엘이 가제보 옆에 있는 수풀로 뛰어왔다.
“으윽, 다리 저려.”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저린 다리 때문에 콧등에 침을 묻히며 얼굴을 찡그렸다. 밝은 달빛이 비치는 곳으로 가까스로 기어 나온 라피는 스케치북을 접으며 앓는 소리를 했다.
“아이고, 내가 진짜 하나밖에 없는 오빠를 결혼시키려고 별별 짓을 다 하는구나.”
씨엘이 저린 다리에 꾹꾹이를 해 줄 때 라피가 접은 스케치북이 바람결에 들썩여 펼쳐지며 굵직한 글씨가 보였다.
「엄마 이야기 꺼내서 린의 심정을 자극할 것」
「린에게 망토 걸쳐 줘」
「구운 찹쌀떡 신드롬」
「내 아를 낳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