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작은딸을 위해선 최소한의 아카데미 비용을 대 주며 공부할 수 있게 해 준 것뿐인 니콜라이 백작은 뜻밖의 말에 말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조, 조슬린 그게 무슨…….”
“어린 딸을 제대로 보호해 주지도 않은 아비와 언니란 여자의 눈 밖에 날까 싶어 어린 여자애를 괴롭히는 고용인들로 가득한 곳이 제겐 집이었을까요?”
조슬린의 말에 니콜라이 백작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제 딸의 원망이 너무나 켜켜이 쌓여서 이런 곳에서 말 한마디로 도저히 풀 수가 없을 정도였다.
“어머, 이게 누구야. 조슬린 아니니.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리아가 뻔뻔한 낯짝을 들이밀며 인사하자 조슬린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백작저에 있을 때보다 더 잘 지냈어. 그곳에 있을 땐 찬물로 씻었는데 판테르 공작저에선 내가 말 하지 않아도 따뜻한 물을 준비해 주더라. 그리고 항상 음식도 맛있고.”
“난 네가 찬물을 좋아하는 줄 알고 고용인들에게 말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따뜻한 물을 좋아했으면 미리 말을 하지 그랬니.”
항상 이런 식으로 자신을 가지고 노는 리아가 못마땅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어이없는 이야기를 계속 들어 주지 않아도 되는 나이와 신분이 되었다.
“한데 왜 내 결혼식에 오지 않은 거니?”
“내가 당신의 결혼식에 왜 가?”
“뭣? 당신이라니, 언니한테.”
“나한테 언니가 있었다니 지금 알게 되었네. 놀라워라. 한데 이미 이혼한 마당에 그곳에 안 간 걸 다행으로 생각해. 괜히 참석했다가 나 때문에 이혼했다는 말이 들리면 안 되잖아.”
진한 미소를 드리운 조슬린이 리아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자신과 생김새는 비슷했지만, 성격은 천양지차였다.
“너 지금 말 다 했어?”
“응, 다 했어. 그러니까 말 시키지 마세요. 니콜라이 백작 영애, 잘하는 것 하나 없이 고작 첫째라는 이유로 모든 걸 물려받을 생각에 어린아이나 핍박하는 더러운 술수는 이젠 못 부리겠네요.”
첫째가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받지 못했을 거란 뜻의 말에 리아는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곤 이성을 잃고 저도 모르게 부채를 쥔 손을 휘둘렀다. 부채에 맞으면 피는 나지 않더라도 얼굴이 빨갛게 부어오를 것이다.
약간의 소동을 일으켜서 리아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던 조슬린은 기꺼이 맞아 주기로 작정했다. 얼른 때리라는 듯이 고개를 올려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기다려도 충격은 없었다. 때리려고 포즈만 잡았다가 손을 내린 건가 싶어 실눈을 뜬 채 앞을 봤다.
눈앞에 리아를 완전히 가릴 정도로 널찍하고 익숙한 등이 보였다.
“조슬린 경, 지금 이 상황을 내게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유진의 나직한 목소리에 조슬린은 순간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한때 제 아버지와 언니였던 사람들입니다.”
“흐음? 아, 그렇다면 니콜라이 백작과 영애겠군요. 한데 왜 동생을 때리려 하는가.”
이번엔 유진의 질문이 리아에게 닿았다. 힘껏 움켜쥔 유진의 손에 고급스러운 부채가 부러졌다.
“언니로서 동생을 훈육하는 중이었습니다만.”
“조슬린 경의 말에 의하면 한때 언니였었다던데, 그렇다면 지금은 언니가 아닌 게 되는 거 아닌가.”
“한 번 언니는 영원한 언니지요. 어린 시절에 좀 세게 훈육해서 아이가 엇나간 것일 뿐이에요.”
“언니가 되어서 동생을 감싸 주지는 못할망정 때리려 하다니, 그건 누가 가르쳐 준 거지? 난 동생이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때리진 않는데 말이야.”
“버릇은 초장에 들여놔야 감히 고개를 쳐들지 않습니다만.”
리아의 교육관에 유진은 혀를 차며 조슬린을 봤다. 갑자기 그녀가 불쌍해졌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여인의 밑에서 제대로 큰 조슬린이 대단하기까지 했다.
“그런가? 난 우리 동생을 입에 넣고 굴려 보고 싶을 정도로 귀하게 여기며 감싸 주기만 했지. 그런데도 인성이 바른 훌륭한 마법사로 컸어.”
“그건 판테르 영애께서 애초에 버릇이 잘 들어 눈치를 보며 행동한 게…….”
“우리는 아직도 동생이 어린 시절 당연히 누릴 것을 누리지 못한 걸 안타까워했지. 그리고 제집임에도 눈치 보는 게 안쓰러워 죽을 것 같았어. 왜 어린아이가 자신의 집과 가족 앞에서 눈치를 봐야 하지?”
“…….”
“이런 언니 밑에서 조슬린 경 같은 훌륭한 기사가 났다니 정말 놀랍군 그래. 조슬린 경, 나는 당신이 너무나 존경스럽습니다. 정말 장하고 대단하십니다. 그러니 슬퍼하지 말고 끊으십시오.”
라피 앞에서만 말을 길게 하는 유진의 말에 조슬린은 이를 사리물었다. 이 상황에서 시원하게 리아의 머리채라도 잡고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꾹 참았다.
자신 대신에 유진이 대신 화를 내주는 모습을 보며 두 손을 꽉 쥐었다. 제 가족도 아닌 남인 유진도 저리 말하는데 정작 제 핏줄은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이 와중에 니콜라이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버버했다. 여전히 자신을 지켜 주지도 옹호해 주지도 못한 껍데기만 아버지를 본 조슬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쓰디쓴 술을 마신 듯 뭔가가 역류해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막은 조슬린은 니콜라이 백작을 보고 말했다.
“제적 신청서를 제출할 겁니다.”
“뭐라? 조, 조슬린 그게 무슨…….”
“제적 신청서를 제출하면 사인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니콜라이 백작가의 둘째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직후 유산 분할을 신청할 겁니다.”
조슬린의 말에 니콜라이 백작과 리아는 순간 얼굴이 희게 변했다. 본디 장자가 재산을 거의 다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 전에 가주가 제 자식들이 편히 살 수 있도록 재산 중 일부를 증여해 주곤 했다.
만일 부모 생전에 재산을 증여받지 못한 자식이 있다면 유산 분할을 신청할 수 있었다. 이때는 상당히 많은 유산을 넘겨 줘야 할 수도 있기에 일부러 미리 증여해 주곤 했다.
“아버지, 당장 조슬린을 제적해 버리세요. 저런 아이는 우리 집안에 필요 없잖아요.”
니콜라이 백작가의 재산 중 먼지 한 톨이라도 조슬린에게 주기 싫은 리아가 말했다. 하지만 니콜라이 백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차게 식은 눈동자로 보는 조슬린의 시선에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난 제적 신청서 안 받을 거다. 그리고 증여도 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죽은 후에 유산 분할을 하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이제껏 제 자식을 지켜 주고 감싸주지 못한 니콜라이 백작이 조슬린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이었다.
“조슬린 경, 니콜라이 백작가의 유산이 꼭 필요합니까?”
“솔직히 말하면 필요 없습니다. 전 지금도 많이 벌면서 충분히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으니까요. 제가 일한 것보다 더한 것을 받기에 부담스러울 정도입니다.”
“그럼 니콜라이 백작가는 그만 상대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말을 더 섞었다가는 인명 피해가 생길 것 같습니다만.”
유진의 말에 조슬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니콜라이 백작과 리아를 봤다.
“저는 볼일이 다 끝났으니 혹시 따로 볼일이 있다면 판테르 공작저로 오세요. 오실 수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조슬린의 빈정거림에도 리아는 유진이 앞에 있어 끽소리도 내지 못한 채 제 아버지와 일찍 퇴장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던 유진이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레이디 조슬린, 이곳에 계속 계실 겁니까?”
“네, 네?”
“레이디 조슬린, 잠시 저와 산책하시겠습니까?”
경이 아닌 레이디로 불린 조슬린은 놀라 두 눈을 깜빡였다. 성인이 된 이후로, 아니, 정확히는 열다섯 살 이후로 오랜만에 불린 호칭에 조슬린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저기 파, 판테르 경…….”
“오늘만큼은 유진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레이디 조슬린.”
하얀 장갑을 낀 유진의 손과 잘생긴 얼굴을 번갈아 본 조슬린은 딱딱하게 굳은 손을 그 위에 올렸다. 검을 잡느라 굳은살이 박인 조슬린의 손을 잡은 유진은 자연스럽게 황궁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긴 작년에 라피랑 같이 온 곳이에요. 라피가 안에만 있으면 답답하다고 해서…….”
말없이 걷기만 하니 어색해 죽을 것 같은 조슬린은 얼른 라피의 이야기를 꺼냈다.
“라피는 연회나 파티에 참석하면 잠시 안에 있다가 금방 밖으로 나오지요. 그날도 밖으로 나왔다가 조슬린과 만난 거고요.”
“네? 아…… 네, 그랬었죠.”
아이리스 백작저의 정원에서 라피를 만난 기억을 상기한 조슬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갑자기 사라진 동생을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조슬린 경을 보게 되었지요. 우리 동생에게 카디건을 걸쳐 준 사람은 처음 봤거든요.”
“저 아니고도 그럴 사람은 많아요. 추위를 타는 어린아이가 있는데 가만히 두고 볼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당연한 행동을 했기에 조슬린은 자신을 높게 세우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제 동생에게 커다란 솜사탕을 사 주신 분이기도 하지요.”
“아, 전 완벽하게 변장을 했다고 생각했었는데…… 한데 그걸 어떻게 아신 건가요? 그땐 너무 당황해서 제대로 여쭤 보지 못했었어요.”
라피를 데려가며 유진이 한 말을 듣고 놀란 조슬린은 그 자리에서 굳은 채 두 눈만 깜빡였다. 자신이 마음먹고 변장하면 아카데미 동기들도 못 알아봤다. 한데 이 남매는 신기하게도 금방 알아채 버렸다.
“제가 안면인식장애가 없는 편이라 한 번 보고 알게 되었지요. 웃는 모습이 우리 라피와 부딪친 후 솜사탕을 준 사람과 닮았거든요.”
“아, 그게…… 그땐 죄송했어요. 한데 저도 그때 유진을 보고 좀 놀란 것도 있었어요.”
분명 신분을 숨기고 나온 귀족이 분명했다. 제아무리 허름한 옷을 입었다고 한들 은연중에 풍기는 기품이나 기운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그런 사람이 제 동생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하자 놀랐었다.
분명 자신을 평민으로 여겼을 텐데, 귀족이 사과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그걸 당연하게 했다. 게다가 사과를 해야 할 이유까지 조곤조곤 설명해 주며 동생을 보살피는 모습에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참된 행동에 반했지만 이내 그가 판테르 공작가의 후계자임을 알고 일찌감치 털어냈다. 못 먹는 감은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았다. 그래야 먹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으니 말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라피가 그때 넘어졌을 때 한 조슬린의 행동에 감명받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만나면 꼭 사례를 하고 싶었지요.”
“사례는 이 드레스면 충분해요. 너무나 아름다워서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고 말았답니다.”
“그럼 그 착각을 사실대로 만들어 주겠습니다.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멀리서 악단의 음악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렸다. 그 옅은 소리에 맞춰 춤추길 원하는 유진의 춤 신청에 조슬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아무도 없는 정원에서 주인공이 되어 달빛에 녹아드는 춤을 췄다.
한 곡을 다 춘 조슬린은 유진의 황금색 눈동자를 보다가 순간 라피를 계속 떨어뜨려 놓았다는 생각에 정신이 들었다.
“저, 저기 저는 이만 라피를 찾으러 가 봐야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유진의 손을 놓은 조슬린이 급히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조금 아쉬워하며 보는 유진의 앞에 라피가 서서 방긋 웃었다.
“라피,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팔짱을 낀 라피는 피식 웃었다. 5년이나 지났는데 아무리 동생이 받은 거라도 조슬린의 평범한 카디건을 유진이 간직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집에서 계속 지켜본 결과 유진이 조슬린을 신경 쓴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주 조슬린을 힐끔힐끔 보는 것을 보고 유진에게 의향을 물었다. 그 결과 솜사탕을 가져다준 시점부터 조슬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한데 이성에겐 숙맥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말에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약속했다.
“나를 믿고 앞으로는 시키는 대로 해. 내가 이래 보여도 에이랑 사비나를 세 살에 엮어 준 경력자라고. 에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