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말랑말랑하고 따스한 입술과 닿아야 했건만 메뉴판에 입술 도장을 찍은 여자의 표정은 가히 좋지 않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세상 모든 시련을 겪은 비련의 여주인공을 흉내 내던 표정이 앙칼져 보였다.
나를 쏘아보는 날 선 시선에 방긋 웃으며 깊숙이 썼던 모자를 쓱 올렸다.
쿠웅-
“꺅!”
내 얼굴을 보고 놀란 형부는 여자의 허리에서 얼른 손을 뺐다. 그로 인해 여자는 그대로 떨어졌다.
떨어진 충격으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여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나를 보는 형부에게 무슨 일이냐고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형부는 여자가 아닌 나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우, 우리 인절미 처제가 여긴 어쩐 일로 온 거야?”
놀란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진 형부의 목소리에 약간 떨렸다.
“제가 뭐 못 올 곳에 온 건가요. 오랜만에 남부에 와서 겸사겸사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답니다. 한데 왜 모르는 여자랑 부둥켜안고 언니가 좋아하는 로맨스 한 장면을 그리는…….”
“아, 아니야. 절대 그런 거 아니야! 오해하지 말아 줘. 처제!”
온몸으로 격렬하게 말하는 형부와 아직도 바닥에 쓰러져 엉덩이를 어루만지는 여자를 쓱 번갈아 봤다.
“이래도 오해인가요?”
“처, 처제가 생각하는 그런 거 절대 아니래도. 친구 만나서 상담해 주고 있었던 것뿐이야.”
“근데 왜 여기에서 상담해요? 집에서 하면 되죠.”
“에리카가 신경 쓸까 봐.”
“여기에서 만나서 이야기하면 언니가 신경 안 쓸 거라고 생각한 건가요?”
이래서 남자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 한 건가. 정말 몰랐다는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보는 형부를 본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유부남에게 온갖 끼를 부린 여자를 쓱 내려다봤다.
“뼈 부러진 거 아니면 이만 일어나죠? 언제까지 바닥에 앉아 있을 건가요? 뭐 그게 더 어울려 보이긴 하지만.”
내 말에 여자는 엉거주춤 일어나며 신음 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형부가 도와주지 못했다. 휘청이는 여자를 잡은 건 조슬린이었다. 여자가 중심을 잡자마자 얼른 뒤로 물러선 조슬린은 이 모든 상황을 흥미로워하는 시선으로 봤다.
“이왕 여기 온 거 이야기 좀 하죠. 여긴 사람들 눈 때문에 마땅치 않으니 객실을 잠시 빌리는 게 낫겠어요.”
테이블에 놓인 종을 울리자 정장 차림의 직원이 빠른 속도로 왔다.
“비어 있는 객실 하나만 빌렸으면 합니다. 되도록 사람이 적은 층이 낫겠어요. 우리 돈 많은 형부가 돈은 얼마든지 낼 테니 신경 쓰지 마시고요.”
내 말에 직원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곧장 가장 높은 층에 있는 객실로 안내해 줬다.
“우리가 나가기 전까지 되도록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쪽으로는 다른 직원들에게 얼씬도 하지 못하게 미리 말해 두겠습니다.”
그에게 금색 동전 하나를 팁으로 주자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눈치 빠른 직원이 얼른 돌아가자 문을 잠근 나는 소파에 앉았다.
“앉으세요. 우리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으니…… 부인께서도 앉으시지요. 부인을 올려다볼 정도로 제 신분이 미천하지 않아서 말이죠.”
맞은편 널찍한 소파를 가리키며 말하자 여자는, 아니, 이블린 클로이가 엉거주춤하며 앉았다. 그러자 내 옆에 씨엘이 앉고 조슬린은 뒤편에 서서 상황을 지켜봤다.
“처제 나는…….”
“집까지 사 주고 싶을 정도로 친한 친구 옆에 앉는 게 좋겠어요. 형부.”
“아, 아니야. 난 다른 곳에 앉을게.”
형부는 소파를 두고 다른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자신은 절대 잘못한 게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서서히 자신감이 사라진 눈동자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부인도 짐작하겠지만 세라피나 판테르라고 합니다.”
“이블린 클로이입니다.”
“작위를 이어받은 아드님이 결혼을 하셨나요?”
“아직 미혼입니다.”
“그럼 클로이 백작부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의 없으시죠?”
아까의 표독스러움이 한 김 가신 이블린은 제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형부 쪽으로 몸을 조금 더 움직였다. 하지만 형부는 빳빳하게 굳은 채 이블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좀 전에 제가 메뉴판을 들이밀지 않았으면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 겹쳐졌을 겁니다.”
“아, 아니야. 처제! 절대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요. 각도가 딱 나오는데요. 여기 클로이 백작부인의 입술 자국이 떡하니 찍혀 있지 않습니까.”
아까 가림막으로 사용한 메뉴판을 들고 온 나는 붉은색 입술이 찍힌 것을 보여 줬다. 그걸 본 형부는 절대 그런 뜻은 없었다며 고개를 격하게 가로저었다.
“이블린은 내 오랜 친구야. 최근에 남편을 잃어서…….”
“마음 놓고 만나게 된 이유인가요? 진짜 오랜 친구였으면 서로 반려가 있을 때도 부부 동반으로 자주 만났을 건데요.”
“그땐 연락이 안 되어서…….”
“우와, 오랜 친구인데 연락을 안 했다고요? 그냥 오래전에 사귀었던 친구였나 보네요. 그런 친구에게 상담도 해 줘, 집도 사 줘, 이젠 아주 입술까지 줄 뻔했네요.”
입술 자국이 묻은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말하자 형부는 그럴 의도는 절대 아니었다며 도돌이표를 찍었다.
“클로이 백작부인은 뭐 할 말 없으세요? 제가 보기에도 불필요하게 형부의 목에 손을 걸어 당기는 것 같았…… 아니 당겼죠.”
“맞아요. 당겼습니다. 넘어질 뻔해서 저도 모르게 허우적대다가 제롬의 목을 끌어안은 것뿐이에요. 입술이 닿을 뻔한 건 그저 사고였고요.”
“아닌데. 의도된 상황이었잖아요. 씨엘, 상황 연출 좀 하자.”
내가 이블린이 되고 씨엘이 형부 역할을 했다. 좀 전처럼 이블린이 제 발에 걸려 넘어진 것처럼 흉내냈고, 씨엘이 잽싸게 내 허리에 손을 넣어 잡았다.
“이것 보면 뭔가 느껴지는 거 없어요? 제 발에 걸려 넘어질 땐 99% 앞으로 넘어져요. 근데 클로이 백작부인은 뒤로 넘어졌지요. 그러면서 손을 뻗어 형부를 붙잡아 당겼고요.”
미끄러지는 게 아니라면 대부분 넘어질 때 몸이 앞으로 쏠리게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이 모든 것은 이블린의 의도된 연출이었다.
“어…… 아깐 당황해서 생각하지 못했는데 처제의 설명을 들어 보니, 그 말이 맞네.”
그래도 기사 출신이랍시고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형부는 진짜 제게 마음이 있었냐는 시선으로 이블린을 봤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클로이 백작부인의 묵비권은 인정하겠습니다. 대신 앞으로 사적으로 만나는 것은 자중하세요. 소문나는 동시에 형부가 소박맞는 것과 동시에 박 터질 거예요. 둘이 사이좋게.”
남부의 소문이 동부에 흘러들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아마 형부가 언니를 놔두고 딴 여자와 노닥거린다는 말을 들음과 동시에 아빠가 불같이 화를 내며 이곳으로 달려올 게 분명했다.
그리된다면 형부와 상대 여자를 가만 놔둘 리가 없다. 남부에 피바람이 부는 것과 동시에 이혼시켜서 언니를 판테르 공작저로 데려올 게 분명했다.
안 봐도 훤한 미래가 그려지는 듯하자 형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님께 말씀드릴 거야? 처제, 이건 진짜 오해야. 난 친구로서 만난 것뿐이야.”
“원래 바람의 첫 단계가 친구예요.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 술이 들어가면 약간의 스킨십을 하다가 그대로 자빠뜨리는 거죠.”
그러다가 배우자에게 들키면 술타령을 하거나 상대방이 꼬셨다고 핑계를 대는 레퍼토리가 떠올랐다.
“난 절대 안 그래. 내게 유일한 여자는 에리카뿐이야.”
“그 유일한 여자가 지금 우울증에 걸려서 허우적대고 있답니다. 형부, 오늘은 경고만 하는 거예요. 또 이런 일이 있을 시엔 그땐 클로이 백작부인을 죽이고 천국 갈 거예요.”
귀족이 귀족을 죽였을 시엔 바로 재판에 회부된다. 하지만 내가 클로이 백작부인을 죽인다고 해도 아빠와 할아버지가 알아서 무마해 줄 것 같았다. 자고로 법조계도 권력과 돈이 좌지우지하니까 말이다. 여차하면 클레어런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자고로 친구는 최대한 단물을 쪽쪽 빨아 먹으라고 있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자 형부는 곧장 우울증에 걸렸다는 언니에게 간다며 바로 뛰어나갔다. 그러자 유일하게 제 편을 들어 줄 존재가 사라지자 이블린의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스몄다.
“클로이 백작부인, 당신은 상대를 잘못 골랐어요. 하필이면 우리 언니의 남편을 건드리려고 수작질이라니.”
“…….”
“만일 형부가 진짜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넘어야 할 큰 산맥과 대양이 두 개나 있거든요. 당신은 판테르와 티그리스를 감당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두 가문의 적이 되어서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일개 가문도 아닌 동부와 북부를 대표하는 가문을 막아낼 정도의 능력이 있는 자는 별로 없다. 서부나 황족 정도가 아니고서야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제롬 아퀼라를 사랑한다고 말해 보세요. 그럼 내가 진심으로 상대해 줄 테니까.”
“저, 저는…… 죄송합니다. 솔직히 말할게요. 제롬을 사랑했어요. 17년 전에 제롬에게 프러포즈하려고 준비했었는데 다 무산이 되었죠.”
표독스러움이 사라진 이블린은 순식간에 어여쁘게 늙은 중년의 여인이 되었다. 프러포즈를 계획했는데 갑자기 형부가 새파랗게 어린 여자를 데려와서 결혼한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포기했다는 말에 씁쓸함이 느껴졌다.
“분명 내가 먼저 사랑했는데, 내가 먼저 청혼하려고 했었는데…….”
언니에게 홀딱 반한 형부에게 차마 자신의 마음을 전하면 친구마저 될 수 없기에 포기했었다는 이블린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형부 하나만 바라보고 결혼 적령기를 넘긴 탓에 이블린은 재혼인 클로이 백작과 결혼을 했다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자신의 결혼 생활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그리 좋지도, 그리고 나쁘지도 않았고, 남편이 죽자 갑자기 묻어 뒀던 첫사랑이 떠올라서 연락했다며 곧장 사과했다.
“바라서는 안 됨을 알고 있었지만, 금단의 과실은 유혹적이지요. 감히 공작부인이 계시는데 저를 만나러 오는 제롬을 보니 어쩌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헛된 가능성이었음을 인정한 이블린은 순순히 물러났다.
“앞으로 제롬을, 아니 아퀼라 공작님을 사적으로 만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그리고 공작부인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도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초반엔 머리채라도 잡고 싸워야 할 것 같았는데, 상대가 너무나 정중하게 물러났다. 전의를 상실한 이블린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린, 클로이 백작부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려 주면 안 될까? 난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응, 그럼 다녀올게. 좋은 시간 보내.”
눈치껏 빠져준 조슬린이 문을 닫고 나가자 씨엘이 뽀짝뽀짝 붙었다.
“씨엘은 고양이일 때보다 존재감이 없어진 것 같아.”
“흐음, 그렇다고 내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일부러 전쟁터에 뛰어들거나 멀쩡한 사람과 싸우고 싶지는 않아. 나는 라피의 곁에만 있을 거니까 존재감 따위 없어도 상관없어.”
별 힘도 들이지 않고 갑자기 나를 번쩍 올린 씨엘은 제 다리 위에 조심히 앉혔다. 그러고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나는 여자 문제로 라피를 신경 쓰게 하지는 않을 거야. 어렸을 때부터 내게 유일한 친구이자 여인은 라피뿐인걸.”
내 엉덩이 밑에 깔린 후로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위해 살아온 씨엘이었다. 나 이외의 여자는 생각해 보지도 못할 정도로 내 손에 길들여진 씨엘은 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씨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씨엘의 체향을 흠뻑 마셨다. 포근한 온기와 특유의 청량한 체향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나는 미소를 지었다.
예쁜 미녀를 보는 듯한 얼굴과는 달리 요즘에 수련을 하는지 떡 벌어진 가슴은 상당히 탄탄했다.
“라피, 우린 언제 결혼하게 될까?”
“아마 쉽게 허락이 떨어지지 않을걸.”
“그럼 우리 지금 사고칠까? 나 처음이라 서툴겠지만, 열심히 노력할게. 그래도 만족하지 못하겠다면…… 라피랑 계속 연습해서 만족할 수 있도록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