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콜린을 도발하는 방법을 매우 잘 아는 씨엘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러자 콜린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당장 떨어지지 못해! 우리 이모는 나랑 결혼할 거라고. 내가 얼마나 멋진 남자가 되려고 노력하는데.”
“우선 아카데미나 먼저 졸업하고 말하지? 미래의 처조카님.”
올해 열여덟 살인 콜린은 씨엘의 하찮은 도발에 잘 걸려들었다. 나이 차이가 몇 달밖에 나지 않은 두 사람은 나를 두고 한동안 으르렁거렸다.
“어머, 라피! 어서 오렴. 안 그래도 아버지가 우리 집에 귀한 보물을 보낸다는 말에 와 봤더니 우리 인절미가 떡하니 왔구나.”
“언니 목소리에 힘이 안 들어가 있어서 얼른 왔어요.”
“남자들만 득시글한 곳에 있었더니 우울증 와서 하마터면 치매에 걸릴 뻔했지 뭐니. 거기서 뭐 해? 얼른 오렴.”
콜린과 씨엘이 싸우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언니는 그 둘에게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나를 챙겼다.
“조슬린 경도 어서 오게, 우리 인절미를 지키느라 고생 많겠어.”
“아닙니다. 아퀼라 공작부인, 저처럼 편하게 일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내 호위인 조슬린에게도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은 언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언니가 저런 미소를 지을 때마다 아빠와 닮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언니, 표정이 별로 안 좋은 것 같아요. 무슨 일 있었어요?”
“어휴, 있다마다. 근데 여기에서는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으니 내 방으로 들어가자꾸나.”
딸이 없는 언니는 형부와 아들에게 하지 못하는 일이 터지면 우울해졌다. 터놓고 말할 친구조차 마땅치 않은 언니에게 나는 친구 같은 동생이자 딸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이곳에 와서 이야기 상대가 되었다.
방으로 들어온 언니는 나를 옆에 둔 채 손을 꼭 붙잡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차 한 잔 마실 틈도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네 형부가 내 말을 안 들어.”
“말도 안 돼요. 형부가 얼마나 언니를 사랑하는데요.”
“말로만 하는 사랑은 누군들 못하겠어. 후우, 네 형부가 어렸을 때 알고 지낸 여자가 있는데 이번에 사별했다고 하더구나.”
아직도 팔팔한 이팔청춘인 언니를 두고 형부가 최근에 남편을 먼저 보낸 여자와 함께 시간을 자주 보낸다는 게 요지였다. 결혼 전에 만난 적이 없어서 그 여자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언니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라피, 이 일을 어쩌니.”
“어쩌긴요. 만나서 이야기를 해 봐야지요.”
이런 문제일수록 언니 말만 듣고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형부의 말도 들어 봐야 했다.
“난 이제 네 형부랑 이야기하는 것도 싫어. 얼마 전에 분명 소문날 것 같으니까 그 여자는 그만 만나라고 했는데 오늘도 또 만나러 갔어.”
만일 언니 말대로라면 형부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를 위로차 만난 게 분명했다. 문제라면 한두 번 만난 게 아니라는 게 핵심이었다.
“형부는 지금 어디 있어요?”
“응? 아, 또 그 여잘 만나러 호텔에 갔단다. 그곳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한다는데, 자존심상 그곳에 쫓아갈 수 없어서…….”
이러니 우리 언니가 우울증이 왔다는 게 이해되었다. 언니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피?”
“제가 대신 갈게요. 언니는 여기 계세요.”
“하지만…….”
“가서 상황을 지켜볼게요. 그러니까 마차 한 대만 빌려 주세요. 그리고 옷도 한 벌 필요해요. 저랑 조슬린 경이 입을 거요. 아! 그리고 씨엘 것도요.”
아직도 콜린과 신경전을 펼치느라 이곳에 오지 않은 씨엘을 데려오라고 했다. 그랬더니 콜린도 딸려 왔다.
“이러다가 미운 정이 들겠구나.”
“이모는 못 하는 말이 없어. 내가 미쳐도 저런 인간, 아니 저런 고양이랑 정이 들 리가 없잖아.”
“콜린, 이제껏 네가 내 조카라서 봐 줬는데 씨엘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렴. 씨엘은 엄연히 루피노 공작가의 후계자이자 내 기사님이셔. 그리고 지금은 내 보호자이고. 알겠니?”
“이모! 어떻게 내 앞에서 저 사람 편을 들 수 있는 건데. 이모가 너무 매력적이라서 남자들이 따른다고 해도 나는 뒤에서 조신하게 다 참아냈단 말이야.”
멋진 남자가 되라고 해서 공부도 하고 아카데미도 갔는데, 씨엘의 편을 들자 서운하다는 듯 말하는 콜린을 본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콜린, 잘 들어. 나는…….”
“후우, 아냐. 괜찮아. 미안해, 이모. 내가 너무 감정이 격했어. 이모가 누굴 만나서 뭐 하든 다 참을게. 그게 요즘 남자의 미덕이니까. 그러니까 꼭 나를 선택해 주…….”
따악-
내 손을 꼭 붙잡고 말하는 콜린의 머리에서 순간 경쾌한 박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듣다 못 한 언니가 아들의 머리에 꿀밤을 놓은 것이다.
“내가 네 앞에서 로맨스 소설을 읽은 게 죄구나. 후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라피의 말을 들을걸. 라피, 여긴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 보렴.”
얼른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온 우리는 준비된 마차를 탔다.
“린, 미안해.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라서.”
“아니야. 내가 보기엔 달콤하고 구수한 콩가루 집안이던데.”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한 조슬린은 빙긋 웃기만 했다.
“근데 우리는 어디로 가는 중이야?”
“응? 아, 이글스 호텔로 형부 만나러 가. 형부가 거기서 웬 여자를 만나고 있다고 그러네. 한데 언니 말을 들어보면 바람이 유력한 것 같아.”
“그런 거라면 미래의 처형께서 직접 가시면 모든 게 다 끝나는 거 아니야?”
씨엘의 말에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본부인이 가서 현장을 덮쳐 남편놈 멱살을 붙잡고 여자의 머리채를 붙든 채 돌리는 게 빠른 방법이긴 했다. 하지만 언니에게 쏠린 눈과 귀가 많았다.
귀부인인 언니가 그런 행위를 하면 즉시 사교계의 놀림감이 되기 쉬웠다. 그렇기에 지체 높은 귀부인은 남편이 정부를 둬서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도 터치하지 않았다.
아직 인생 공부가 부족한 씨엘에게 간단한 설명을 해 주자 이해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같으면 아마 보란 듯이 딴 남자 만나서 정부로 만들 건데, 아쉽네.”
“우리 언니한테 남자가 오로지 형부밖에 없어서 그건 불가능해. 나처럼 친분 있는 남자라도 있으면 써먹기라도 할 건데 말이야.”
“설마하니 그 친분 있는 남자가 황태자 전하는 아니겠지? 세상에, 황태자 전하를 정부로 들일 생각을 하다니 우리 라피는 참 꿈도 이상도 높고 넓구나.”
우스갯소리를 하는 조슬린에 비해 씨엘은 그 말을 경계라도 하듯 나를 뭉근한 시선으로 봤다. 얼른 부정하라는 듯한 눈빛에 나는 싱긋 웃은 채 장난스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저기요, 라피? 나의 반려, 나의 주인님?”
“응? 아! 다 왔네. 자! 다들 모자 눌러쓰고 행동 개시하자.”
씨엘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대신 얼른 로브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제대로 된 작전도 짜지 않았지만, 우선은 같은 공간에 들어가서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가문장을 떼어낸 마차에서 내린 우리는 곧장 이글스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 안에 있는 찻집의 끄트머리에 낯익은 뒤통수가 눈에 박혀들었다.
다행히 주변 테이블에 손님이 없자 우린 자연스레 약간 거리를 둔 채 앉아서 말은 하지 않고 메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커피를 주문했다. 그러곤 커피가 나오기 전에 귀를 쫑긋 세웠다.
“이블린, 왜 부른 거야?”
언니 외의 여자에게 다정하게 얘기하는 형부의 목소리에 나는 순간 팔에 소름이 살짝 돋았다.
“제롬…… 나 요즘에 불면증으로 잠도 못 자. 남편이 없는 곳이 너무나 무서워. 그렇다고 그곳을 팔고 갈 수도 없고. 내게 친자식이라도 있었다면 이러지 않을 텐데.”
“네 친자식은 아니더라도 친자식처럼 키웠잖아. 왜? 클로이 백작이 너를 업신여기는 거니? 전에 보았을 땐 참 멋진 청년이었는데.”
“내가 남편과 재혼해서 전 부인의 아들을 키우긴 했지만, 눈치란 게 보이잖아. 남편도 없고 아들이 작위를 이어받은 시점에서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작스레 여자의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커피를 뿜어내는 사고를 칠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이블린, 이제 그만 울어. 남편을 잃은 슬픔이 크다지만 매일 울다가 탈진하면 어쩌려고 그래.”
형부가 손수건을 건네는 게 아니라 손수 여자의 눈가를 꾹꾹 눌러 닦아냈다. 보면 볼수록 너무나 친근한 모습에 언니가 신경 쓰는 건 어쩔 수 없어 보였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될까? 제롬, 부탁할게.”
“내게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눈치를 살핀 형부의 물음에 여자는 눈물이 스민 미소를 지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절로 위로해 주고 싶어질 정도로 측은한 눈동자를 본 조슬린이 몸을 바르르 떨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거 아무리 봐도 꼬리치는 것 같아.」
형부도 나름 기사랍시고 청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글씨를 써서 대화를 했다.
「내가 보기엔 꼬리치는 여자도 문제지만 넘어가는 남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아니 어떻게 미래의 처형을 두고 저런 여자한테 홀딱 넘어갈 수 있지? 난 도저히 이해가 안 돼 」
일편단심 민들레인 씨엘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형부와 여자 쪽을 힐끔 봤다. 그러곤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좀 더 두고 봐야 알 것 같아」
남자는 단순하게 그저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만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자 쪽에서는 남자의 그런 모습에 제게 뜻이 있다고 여길 수도 있기에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와, 이럴 땐 우리 라피가 너무 이성적인 것 같아. 나 같으면 벌써 공작님 멱살을 잡고 흔들면서 무릎으로 급소를 쳐 버렸을 건데」
조슬린이 쓴 상당히 과격한 문장에 씨엘은 얌전하게 두 다리를 오므렸다. 그러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쓰디쓴 커피에 설탕을 들이붓고야 만족한 미소를 지은 씨엘은 다시 형부와 여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롬, 있잖아. 나 너희 집에서 살면 안 될까?”
“그게 말이 될 거라고 생각해? 당연히 안 되지. 정 클로이 백작저에 가고 싶지 않다면 작은 집 정도는 마련해 줄 수 있어.”
형부의 파격적인 말에 우리는 화들짝 놀랐다. 이건 마치 정부를 위해 따로 집을 마련해 준다는 뜻으로 여기기에 충분했다. 본인이 생각하는 게 그것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나도 집을 구할 정도의 돈은 있어. 후우, 뭐 됐어. 이제 돌아가 볼게. 제롬, 우리 다음에 보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가 형부에게 인사를 하더니 돌연 제 발에 걸려 허우적댔다. 그 모습을 본 형부가 급히 여자의 허리를 받쳐 줘서 넘어지는 것을 막았다.
“괜찮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뭔갈 먹지도 못한 거야? 여기에서 식사라도 하고 갈래?”
온갖 걱정이 범벅된 목소리에 여자의 눈동자엔 다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형부가 손수건을 주머니에서 빼려고 할 때 여자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형부의 목에 손을 걸더니 다짜고짜 얼굴을 가까이 댔다. 순간적으로 가까워진 두 사람의 얼굴은 서로 다른 표정이 되었다.
“이, 이블린…….”
놀라 당혹스러워하는 형부는 여자의 허리를 감싼 손을 풀지도 못했다. 그런 형부를 좀 더 끌어당긴 여자의 입술이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제롬, 사랑…….”
“거기까지! 이건 뭐 찾아가는 로맨스 소설인가.”
여자와 형부의 입술 사이로 메뉴판을 들이밀어 가까스로 막은 나는 두 사람을 지그시 보며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