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두툼한 살집이 느껴진 궁둥이를 어루만지자 씨엘이 움찔움찔대며 내 가슴에 머리를 묻고 파르르 떨었다.
“우리 아빠가 나를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삼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지.”
옅은 미소를 지은 나는 씨엘을 쓰다듬었다. 귀족가에서 정략혼은 매우 흔하게 권력과 세력을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아빠는 나와 오빠에게 정략혼을 권하지 않았다.
그러니 올해 스물일곱 살인 오빠도 억지로 결혼하기 위해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 아직 자유로운 영혼인 오빠는 결혼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 모든 게 아빠가 우리를 사랑해서, 그리고 정략혼을 이용할 정도로 우리 집안이 못나지 않아서라는 것을 모를 내가 아니었다.
“아버님이 구운 찹쌀떡은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 같다옹. 아니 공작님들이 우리 라피를 데려가려고 하면 나를 먼저 잡아먹을 것 같다옹.”
지금은 아직 나이가 어려 결혼하고 싶다고 해도 부모가 막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 결혼시켜 달라고 하면 내가 아닌 씨엘을 잡아먹으려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괜찮아. 씨엘은 루피노 공작가의 후계자니까. 아무리 서부의 후계자가 망나니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손댈 수는 없어. 후아아암.”
진짜 씨엘이 망나니는 아니지만, 비유를 해서 말해 준 후 하품을 하고는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씨엘이 내 품에서 비비적대더니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달이 서서히 밤하늘 높이에 떠오를 때쯤에 라피의 품에 안긴 씨엘의 눈동자가 뜨였다. 한밤중에도 빛이 나는 황금색 눈동자가 몇 차례 깜빡이더니 라피를 봤다.
라피가 깨어나지 않게 조심히 품에서 빠져나온 씨엘은 탈의실로 가서 인간형으로 변한 후 옷을 껴입었다. 날 것 그대로의 몸이 천으로 가려지자 탈의실에서 나와 라피의 곁으로 다가갔다.
“요즘 계속 마법 공부를 하더니 체력이 전부 소진되었나 보네. 항상 이 시간까지 눈 뜨고 책만 보더니.”
밤늦도록 마법책과 씨름했다. 오죽했으면 판테르 공작과 유진이 쫓아와서 제발 책 좀 그만 보고 쉬라고 말했겠는가. 그런데도 라피는 고집을 부렸다. 이 집안, 아니 3대 공작가에서는 라피가 고집을 부리면 꺾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어엿한 마법사가 되었으면서 얼마나 높이 올라가려고 그러는 거야. 난 지금도 라피가 힘들어해서 그만뒀으면 하는데.”
물론 이 말을 라피 앞에서 꺼낸 적은 없었다. 그랬다가는 소박맞을 게 분명했다. 라피가 유일하게 잘할 수 있는 것을 못하게 말리진 않지만, 몸 생각해서 적당히 했으면 하는 소원이 있었다.
“라피, 내 사랑…… 내 유일한 반려.”
라피의 엉덩이에 깔렸을 때부터 그녀 외의 사람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마치 엉덩이에 깔린 게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씨엘은 라피를 맹목적으로 따랐다.
솜뭉치 분홍 젤리 발바닥이 아닌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으로 앞으로 흘러내린 라피의 머리카락을 조심히 뒤로 넘겼다.
“으음…….”
손길이 느껴졌는지 라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라피의 미간에 제 입술을 포개 조심히 펴 준 씨엘은 어둠을 비치는 은은한 달빛을 닮은 미소를 지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옅은 따스함에 라피의 입술이 자연스레 곡선을 그렸다.
“라피는 나 안 좋아해?”
“으응, 좋아해…… 아빠 가슴…….”
기분이 좋았다가 갑자기 팍 식은 씨엘은 피식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건 참 일관되었다.
“나는 라피가 제일 좋아, 사랑해, 라피.”
세뇌라도 하듯 라피의 귓가에 계속 속삭인 씨엘은 하늘에 뜬 달을 보고 시간을 가늠한 후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연무장에 간 씨엘은 수련용 장비를 둔 창고를 열었다.
날이 제대로 서지 않은 물품이라 지키는 이는 없었다. 검 중에 가장 무게가 나가는 무딘 검을 든 씨엘은 가볍게 들고 몇 시간이고 몸을 움직였다.
그간 기사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기에 그들의 흉내를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며 개인 수련을 할 때, 마침 판테르 공작이 천천히 연무장 쪽으로 걸어왔다.
“이 시간에 자네가 무슨 일이지?”
이 시간엔 항상 라피와 함께 잠을 자곤 했다. 한데 새벽에 씨엘의 모습이 보이자 판테르 공작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라피의 이상형이 되기 위해 수련 중입니다.”
“라피의 이상형? 그게 뭔데 그러지?”
“가슴이요. 아버님 가슴!”
“음? 아…… 크흠, 그건 좀 어려울 건데. 이건 수련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제 가슴을 슬쩍 어루만진 판테르 공작은 어린 시절의 제 딸이 가슴에 찰싹 들러붙어 볼을 비비적대던 기억에 절로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그럼 무슨 약이라도 드신 겁니까?”
“아니, 이건 유전이네만.”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라피의 가슴은 아버님보다 더 작지 않습니까.”
그 누구와도 대적할 수 없는 빵빵한 가슴을 지닌 판테르 공작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나를 닮지 않아서 그러네만, 실제로 유진도 가슴은 나를 닮지 않았지.”
“그렇다면…….”
“라피는 외탁이네만.”
“끄응, 어쩐지…….”
옅은 신음을 내뱉은 씨엘은 판테르 공작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봐 온 티그리스 공작가의 직계는 전부 가슴이 작았다. 왜 하필이면 그런 걸 닮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단지 당당하게 말할 뿐이다.
“저는 작은 가슴을 더 좋아합니다.”
“닥치고 검이나 제대로 잡게. 이 변태 고양이!”
라피의 체형이 어찌 되었든 모든 것을 좋아한 씨엘은 그날 미래의 장인과 대련을 하며 입에 단내가 난다는 게 뭔지 알게 되었다. 오십대이기에 슬슬 근육이 소실되고 그만큼 실력이 떨어질 나이였다. 하지만 판테르 공작은 나이를 역행이라도 하듯 씨엘을 신나게 압박했다.
선천적인 능력을 뛰어넘은 경험치에 밀린 씨엘이 무릎을 꿇었다. 그런 씨엘을 본 판테르 공작이 거친 숨을 억지로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비릿한 쇠를 긁는 맛이 목구멍에서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앞으로 이 시간대에 오게. 내가 친히 검술과 인생을 가르쳐 줄 터이니.”
온전한 인간이 아니더라도 루피노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라피를 곁에서 수차례 지켜 준 존재이고, 제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씨엘이었다. 그런 씨엘이 어떤 이유에서라도 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비록 기사들을 단체로 날려 버리긴 했지만, 그건 그들이 약한 거라고 결론지은 판테르 공작이었다.
“최소한 우리 라피의 곁에 있으려면 나 정도는 능가해야지 않겠나.”
“아, 그런 이유라면 언제든지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아버님이 저를 타작하려고 일부러 오라고 한 줄 알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씨엘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애써 제 뜻을 숨긴 판테르 공작은 그날 이후로 검술을 가르쳐 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씨엘을 조금씩 팼다. 라피의 눈에 절대 띄지 않을 정도로.
얼마 전부터 씨엘의 상태가 좀 이상해졌다. 언제나 파릇파릇한 새싹처럼 활기차기만 했는데 요즘엔 푹 자고 일어났음에도 식빵을 구우며 눈을 감았다.
평소엔 날이 밝으면 인간형으로 변해서 옆에 찰떡같이 달라붙는데 요즘엔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씨엘, 무슨 일 있어? 요즘 들어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보이는 거야?”
뀨우우우.
유독 아침에 힘이 없는 씨엘을 쓰다듬어 준 나는 조슬린과 함께 정원을 산책했다. 그 후엔 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동생은 언니가 보고 싶지도 않니? 듣자 하니 할아버지 댁엔 가끔 가는 것 같던데 왜 우리 집엔 안 오는 거야? 언니 정말 심심해.]
“할아버지네 집엔 공부하러 가는 거니 오해하지 마세요. 나도 거기에 가면 쌍둥이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니까요.”
[에이든 그 녀석이 애들 교육을 제대로 못 하니까 그런 거지. 쯧쯧, 라피 덕분에 부인만 잘 얻으면 뭐 하니,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니 그런 사달이 일어나는 거야.]
일전에 쌍둥이와 언니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쌍둥이가 언니에게 아줌마라고 부르며 치맛자락에 우유를 쏟은 이후로 언니는 에이든을 갈궜다. 애들 교육을 잘못시켰다고 아주 매우 심하게.
[우리 콜린만 봐도 어렸을 때부터…….]
“태교와 아이 재울 때 로맨스 소설을 읽어 준 분은 없을 거랍니다. 덕분에 애가 어렸을 때부터 로맨스에 눈을 떠 버렸잖아요. 그것도 매우 과도하게.”
[아 몰라, 어쨌든 언니는 삐쳤어. 그러니까 알아서 하렴.]
언니와 잠시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눈 후 통신을 끊었다. 늘어지게 하품한 나는 두 앞발로 눈을 가린 채 잠든 씨엘을 두고 가방에 이것저것을 챙겨 넣었다.
“오늘은 어딜 갈 거야?”
“언니네 집에 잠시 다녀오려고. 요즘 거길 안 갔더니 언니가 삐쳤어.”
“아, 아퀼라 공작저에 갈 예정이구나. 그럼 얼른 준비하자.”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은 곳에선 자연스럽게 말을 놓는 조슬린은 어느 정도 나에게 적응이 된 상태였다. 처음엔 우리 가족에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려 한 자신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자신은 절대 가져 본 적 없는 가족애에 부럽기도 했지만, 나라도 사랑을 받고 사는 게 다행이라고 말하는 조슬린이었다.
“린,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인데 지금은 행복해?”
“당연하지, 집에서 나온 것이 두 번째로 잘한 것 같아.”
“그럼 첫 번째로 잘한 것은?”
“우리 라피와 라피의 사랑스러운 가족을 만난 것이랄까.”
이젠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번지르르하게 잘하는 조슬린을 본 나는 씩, 웃었다. 그러곤 마침 안으로 들어온 제니의 도움을 받아 대충 짐을 쌌다.
언제나 그렇듯 내 가방엔 구운 찹쌀떡이 필수로 들어갔다. 내가 외부로 나갈 때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는 제니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이건 오렌지맛 물의 정령입니다. 아퀼라 공작저에도 있겠지만 그래도 따로 챙겨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물의 정령 덩어리가 담긴 병을 본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온 지 14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이것엔 적응이 되지 않았다.
“특별히 정령사가 챙겨 준 거니 빼지 말고 치카치카 하셔야 해요.”
오래전에 물의 정령사를 본 적이 있었다. 자연 친화적인 물의 정령사는 그 정도가 과했는지 존재감이 없었다. 그저 흐르는 물과 바람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인지 전쟁이 터지면 정령사는 정령을 이용해 첩보 활동을 한다고 했다.
그 결과 대륙 협정서에 전시에 정령사의 개입을 막는 황당한 법안이 존재했다. 서로 정보를 빼내 치고받고 싸우면 기간이 길어지고 사상자가 늘어난다는 이유가 붙었다.
어이없는 내용을 떠올리던 나는 제니가 챙겨 준 가방을 들었다. 그러고는 아빠와 오빠에게 언니 집에 가겠노라고 말한 후 조슬린과 워프 게이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오려무나. 잠은 꼭 그곳에서 자지 않아도 되니, 잘 땐 집으로 와도 된단다.”
평소와 같은 아빠의 배웅에 방긋 웃었다. 손을 뻗어 아빠에게 안기자 자연스레 눈높이를 맞춰 줬다. 아빠의 볼에 입맞춤을 하자, 아빠도 내 볼이며 이마에 입맞춤을 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입맞춤으로 인사를 끝낸 나는 방긋 웃으며 워프 게이트에 섰다. 막 마나를 불어 넣으려는 찰나에 씨엘이 뛰어와 나를 안았다. 그 상태로 언니 집으로 향했다.
아퀼라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반갑게 두 눈을 접으며 인사한 이가 순간 눈을 흘겼다.
“이모 어서 와, 근데 왜 그 시커먼 놈은 데려온 건데! 아버지가 털 있는 동물 싫어하시는 거 알면서.”
콜린의 말에 씨엘이 보란 듯이 나를 더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난 지금 인간인데, 미래의 처조카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