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순간 오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삿대질을 했다.
“너, 너어어…….”
“오빠의 손가락은 참 가늘고 길군요. 한눈에 반할 것 같아요. 오빠!”
목에 핏대를 세우던 오빠는 씨엘이 제 손가락을 잡고 밑으로 내리자 맥없이 그대로 움직였다. 비록 기사라지만 수인족에겐 당해내지 못하는 듯했다. 이럴 때만큼은 먼치킨이 아닌 현실 속 오빠는 이를 살짝 갈았다.
“오빠라니, 정신이 나간 건가!”
“그럼 제가 뭐라고 부를까요? 유진 님 혹은 판테르 경이라고 부를까요? 그리한다면 오빠도 제게 루피노 경 혹은 씨엘 님이라고 부르셔야 할 텐데요.”
오빠와 씨엘은 동부와 서부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비록 나이 차이는 날지언정 말이다. 그렇기에 본래대로라면 오빠가 씨엘에게 함부로 말하면 안 될 처지였다.
한동안 씩씩대던 오빠는 씨엘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식은 찻물을 한 번에 마신 오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형님이라고 하든가 말든가.”
“네, 그럼 형님이란 호칭을 허락해 주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형님.”
이젠 될 대로 되라는 듯 오빠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쯧, 못난 놈. 이젠 하다못해 씨엘한테까지 지는 거냐.”
“그러는 아버지는 씨엘한테 이겨 본 적이 있습니까?”
“내가 굳이 어린애랑 이기려고 싸울 이유는 없다. 뭐 저번에 잠시 검술 대련을 한 적은 있다만.”
실제로 아빠가 씨엘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본다고 대련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씨엘은 오십대인 아빠한테 지고 말았다. 순전히 실력에서 진 씨엘은 절대 분하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약해서 졌다며 내 품에 안긴 채 시무룩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실력을 키우겠다며 밤새도록 검술 수련을 하곤 했다. 실제로 검을 들고 싸운 적이 없었던 씨엘이 지는 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역시 아버님의 실력은 대단했습니다. 만일 제게 아버지가 계셨다면 지금의 아버님처럼 세지 않으셨을까 생각이 듭니다.”
“루피노 공작 부군께서는 친인척의 반란을 잠재우고 공작과 자네를 살리셨다. 그 정도면 나를 능가했을지도 모르지. 자네는 훌륭하고 멋진 아버지를 뒀음을 자랑으로 삼아도 될 거야.”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를 떠올린 듯한 씨엘이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자 아빠가 뭔 바람이 불었는지 씨엘의 어깨를 두들기며 기운을 북돋아 주는 말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럽구나. 난 내 아내와 자식을 지키지 못했는데…… 솔직히 말해 자네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이를 지킨 루피노 공작 부군이 존경스럽구나.”
그리움이 슬쩍 묻어난 목소리로 말한 아빠는 내 이마에 입맞춤을 해 주고 자리를 떴다. 그러자 오빠도 아빠가 입맞춤한 곳에 입술을 포개더니 내일 보자고 말한 후 밖으로 나갔다.
아빠와 오빠가 나가자 비로소 조촐한 자리로 돌아왔다. 씨엘은 다시 고양이로 돌아왔고, 조슬린은 넋을 놓은 듯했다.
“라, 라피…… 네 가족은 원래 이래?”
“왜?”
“그냥 좀…… 귀족 같지 않다고 해야 하나, 멋지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대단한 것 같아.”
“평소에도 이래. 그리고 씨엘은…… 옷 함부로 벗어 던지지 말랬지?”
뀨웅.
내가 방긋 웃으며 말하자 씨엘은 곧장 다리 위에서 내려와 제가 변신하며 벗어 버린 옷 중 하나를 입으로 물었다. 그러곤 낑낑대며 탈의실로 끌고 갔다.
“씨, 씨엘 님이 좀 버거워하시는 것 같은데 안 도와줘도 될까?”
“응, 수인이라 원래 힘이 쎄. 지금 저건 본인이 하기 귀찮아서 다른 사람 시키려고 저러는 거야. 린은 처음이라 잘 모르니까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고 끼 부린다고 생각하면 돼.”
“풉!”
실제로 씨엘은 내가 저 말을 하자마자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제 옷을 전부 물고는 거뜬하게 탈의실에 가져다 두고 왔다.
사람으로 변신할 때 옷을 안 입은 상태이기에 날것 그대로를 보여 줄 수 없어 특별히 아빠가 내 탈의실에 씨엘의 옷방도 꾸미라고 명령을 내렸다.
실제로 우리 가족이 내 방에서 이야기할 때 씨엘이 사람으로 변신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빠와 오빠가 기겁하며 내 눈을 동시에 가렸다. 뭔가 우람한 게 보일 듯했지만 두 사람의 손이 견고하게 내 눈을 가린 탓에 제대로 보지 못했다.
“여긴 진짜 신기한 것들 투성이야. 나 여기에 취업한 거 엄청 잘한 것 같아.”
“그렇게 여긴다면 다행이야. 근데 이 정도로 신기하다고 여기면 안 될 거야. 린은 내 호위기사니까 앞으로 이곳저곳 같이 다녀야 할 테니까.”
* * *
조슬린은 저녁 식사가 끝나자 시녀의 안내를 받아 제게 배정된 방으로 움직였다. 다른 기사들은 별채에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조슬린은 라피의 전속 호위기사로 본채에 방이 있었다.
“이곳이 앞으로 조슬린 경이 사용할 방이랍니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그리고 우리 라피 아가씨, 잘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두 손을 배에 대고 공손하게 말한 시녀가 뒤로 물러섰다. 상당한 교육을 받은 티가 나는 시녀를 흘끔 본 조슬린은 처음으로 제가 지낼 곳으로 들어갔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좁은 기숙사에 익숙해진 조슬린이었다. 기사 숙소 역시 개인 방을 줬지만 그리 넓지는 않다고 선배가 한 말을 들었다. 한데 이곳은 제가 아는 그 어떤 숙소보다 넓었다.
“니콜라이 백작저에 있는 내 방보다 훨씬 좋은데.”
아무것도 없는 제 방보다는 이곳이 더 화려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넓고 쾌적했다. 달빛이 온전히 들어온 것으로 봐서는 아침에 해가 뜨면 금세 밝아질 것 같았다.
“남향이네, 판테르 영애의 호위기사 겸 친구로 왔다고 해도 너무나 호사스러운 방인데.”
앞으로 자신이 사용할 방을 구경한 조슬린은 자신이 가져온 가방이 한쪽에 얌전히 놓여 있는 걸 보았다. 아무래도 시녀들이 함부로 손대지 못하고 놓아둔 것 같았다.
가방을 열고 짐 정리를 하던 중 작은 상자 하나가 보였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엔 노트 한 권과 액자가 놓여 있었다.
“내가 이런 걸 여기에 넣었던가.”
이걸 가방에 넣은 기억이 없었다. 그저 세면도구와 검, 그리고 옷 몇 벌이 고작이었는데 말이다.
살짝 눈을 찌푸린 조슬린은 뒤집어진 액자를 바로 보았다. 그 안엔 아기 때의 조슬린이 행복한 웃음을 지은 채 가족과 함께 있는 그림이 존재했다.
“내게 이런 시절이 있었나.”
이젠 까마득해서 기억조차 아득한 시절을 잠시 떠올려 보았지만 잘 생각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행복한 니콜라이 백작가의 모습은 마치 봄날 같았다.
작은 액자에 담긴 봄은 이내 쉽게 시들어 여름과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어 버렸지만.
희미한 미소를 지은 조슬린은 노트를 펼치기 전에 앞면에 붙은 종이를 봤다.
「조슬린, 아비다. 이건 네게 주는 선물이란다. 마린이 하늘에 가기 전까지 쓰던 일기인데 네게 선물로 주마. 부디 어딜 가서든 행복하게 지내길 바라마. 그리고 꼭 한 달에 한 번씩 편지를 보내 줬으면 하는구나. 마지막으로…… 미안하구나.」
아버지의 필체였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일 년간 집에서 죽을 정도로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절대 자신이 이 집안을 탐한 게 아니라는 것을 언니인 리아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리아는 기사가 되어 돌아온 동생을 더욱더 경계함과 동시에 무시했다. 분명 니콜라이 백작이 되고 싶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아니 이미 리아에게 백작가에 미련이 없다고 말했음에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결혼을 하라고 남자와 만남을 주선했다. 듣도 보도 못한 남자는 리아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한 번 만난 것으로 남편 노릇을 하려 들었다.
한 번은 강제로 입맞춤을 하려고 하자 조슬린은 그를 제압해서 직접 경비대에 넘겨 버렸다. 그러곤 리아와 더는 가까워질 수 없음을 깨닫고 완전히 인연을 끊어 버렸다.
그때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며 리아에게 뭐라고 했지만, 언니는 반성하는 척하더니 돌아서서 다시 남자와의 만남을 주선하려 했다.
“하아, 결혼을 하려거든 본인이나 할 것이지 왜 나를 못 내보내서 안달이 나서는…… 뭐 덕분에 좋은 곳에 오게 되어서 다행이지만.”
픽, 웃은 조슬린은 아버지가 몰래 넣은 어머니의 일기장을 봤다. 그 안엔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어머니의 마음이 절절하게 적혀 있었다. 이걸 본들 니콜라이 백작가에 다시 들어가고 싶은 생각 따윈 들지 않았다.
“아버지, 당신은 정말…… 너무하시네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제 탓이라도 된 것처럼 무심하셨으면서 그곳을 떠나오니 이제야 관심 있는 척하시다니.”
어머니의 일기장을 덮은 조슬린은 제복을 벗었다. 그러고는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자신이 씻을 거란 걸 알았는지 욕조엔 물이 채워져 있었다.
“세상에나, 따뜻한 물이잖아. 게다가 입욕제도 종류별로 있어.”
니콜라이 백작가에서도 누린 적 없는 호사였다. 고용인들이 전부 리아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해서 언제나 안 좋은 것들만 가져다줬다. 목욕물 역시 따뜻한 적이 없었다. 한겨울에도 차가운 물로 씻어야 할 정도로 냉대받았다.
백작가의 여식으로 그런 대우를 받았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하지만 진실이기에 수년을 포기한 듯 살아온 조슬린은 따끈한 물에 몸을 담갔다.
순간 눈동자가 시큰해졌다. 수증기에 두 눈을 감았고 이내 한 김 식은 눈물이 속눈썹에 엉겨 붙었다.
“치이, 뭐가 이렇게 대우가 좋은 거야. 고작 호위기사일 뿐인데.”
너무 좋았다. 이 집 가족의 의외의 평범함이, 그리고 따스함에 기대고 싶었다. 가지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감히 제가 탐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 순간 자신이 아슬아슬하게 이뤄 온 모든 게 한순간에 무너지게 된다.
“라피라도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서 정말 다행이야. 덕분에 내가 이곳에 있게 된 것이겠지만.”
물에 비친 굳은 표정이 흘러내린 눈물에 파문이 일어나 일그러지며 자연스레 곡선을 그렸다.
“이곳이 내가 앞으로 뼈를 묻을 곳이야. 그러니까 잘하자. 그래서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뭐 하지?”
결혼은 애초에 꿈도 꾸지 않았다. 그렇기에 갑자기 돈을 모으면 뭘 하면 좋을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건 뭐 그때 결정하자. 라피라면 뭔가 알 것도 같으니 나중에 물어봐야겠어.”
비록 자신보다 어렸지만, 정신연령은 높은 라피가 훌륭한 조언자가 되어 줄 것 같았다. 이래저래 깊은 생각을 하던 조슬린은 따끈한 물로 씻은 후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아, 뭐야. 침대도 폭신폭신해. 세상에나, 내가 내 집이 아닌 곳에서 이런 대우를 받다니 참…….”
할 말을 잃게 한 판테르 가의 호의에 조슬린은 깊이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이 가족의 따뜻함이 담긴 도톰한 이불로 몸을 휘감은 조슬린은 그대로 단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