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순간 조슬린의 눈동자가 살짝 흐려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인가.
주변이 조용해졌다. 제니는 물론이고 방 안에 있는 고용인 중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씨엘마저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솜방망이로 내 다리를 꾹꾹 누를 뿐이었다.
“이러다가 황가의 자손이 끊기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그건…… 크흠흠, 방계 쪽 핏줄을 양자로 데려와 키우거나 하면…….”
“루카스는 안 되나?”
“루카스 황자님은 엄밀히 말해서 사반나 황족이되 그 핏줄은 아니기에 불가능할 거야. 루카스 황자님을 귀족들이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게 분명해.”
나란 인간은 이제 어쩌면 대가 끊길지도 모르는 황실 걱정이 앞섰다. 황제의 맥이 끊기면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질 것 같았다.
내 말년에 서로 황제가 되겠노라고 사반나 황족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흐르는 놈들이 서로 치고받는 것을 보고 있어야 하나 싶었다.
“하아, 이 모든 게 내가 너무 잘나서 생긴 일인 것 같아. 척추를 펴게 해 준다거나, 내가 가는 길에 보석 지압 발판을 만들어 주겠다고 한 거 말이야. 그거 전부 플러팅 같지?”
“어, 엉? 프, 플러팅? 그게 무슨 뜻인지…….”
“아, 왜 그런 거 있잖아. 호감을 가진 상대에게 뭔가 해 주겠다고 하면서 은근히 유혹하는 거.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장난으로 치부했는데 린의 말을 듣고 보니 클렌이 나를 유혹한 것 같기도 하네.”
“어? 으음…… 그, 그런가? 라피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런 건가 봐. 아하하하.”
조슬린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짧은 웃음이 가신 후엔 고요함이 방 안에 휘몰아쳤다. 어둠에 파묻힌 거룩한 밤에 부모가 둘러앉아 기도드리는 것도 아니건만.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린이랑 할 수 있다는 것에 기분 좋아. 이제껏 나랑 마주 앉아 이런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서 좀 심심했거든.”
간혹 식빵 굽는 씨엘을 앉혀 두고 혼잣말을 하곤 했지만. 피식 웃으며 말할 때 묘한 소리가 공기를 타고 들리는 듯했다.
“저런 걸 가지고 그 유명한 단어로 뭐라고 하더라.”
“도끼병? 아니면 공주병? 뭐 우리 집에서 공주는 맞으니까 두 번째는 아니고…… 제 동생이 설마하니 저런 이야기를 할 줄이야. 정말이지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 같습니다.”
“아비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오래 살고 볼 일 같다니, 얼마나 많이 살았다고. 나야말로 벌써…… 아니다, 이젠 나이 세는 것도 지겹구나.”
“아버지 나이가 몇인지 모르십니까? 할아버지도 아직 멀쩡하신데 벌써 노망이라니, 이 집안의 앞날이 걱정되는군요.”
바람 속성 마법사라 그런지 이런 건 또 잘 들렸다. 사위가 조용해서인지 문밖에서 아빠와 오빠가 말하는 게 귀에 파고들었다.
“아비한테 노망이라니, 이젠 아주 막 가는구나. 이왕 노망 난 김에 네놈 사유재산 압류해 놓을 테니 어디 일 년에 1골드로 살아 보거라.”
“아버지? 농담한 겁니다. 아니 이 세상에서 어느 누가 아버지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
“넌 이미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 잘 씻고 다니지 않더냐. 간이 부어서 이젠 배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아 보이는군.”
아빠와 오빠의 대화를 듣는 것도 좀 재미있었다. 평소 데면데면하면서 가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이 두 사람의 매력 포인트이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 문밖에 세워 둘 수 없었던 나는 조슬린에게 양해를 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을 이용해 최대한 기척을 죽인 나는 빠른 속도로 문을 열었다. 문 앞에 귀를 댄 이 집안의 미래와 오늘을 본 나는 픽, 웃었다.
“아빠, 오빠! 뭐 하세요?”
“어, 크흐흠. 아무것도 아니란다.”
기사답게 순식간에 무너지는 자세를 바르게 잡아 넘어지는 불상사를 막은 두 사람은 얼른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러고는 방긋 웃다가 헛기침을 하며 짐짓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딸이 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겠다고 해서 너무 놀라서 올라와 봤단다.”
“오늘은 린이랑 아니 그러니까 조슬린 경이랑 같이 먹으려고요.”
“두 사람이 벌써 같이 밥을 먹을 정도로 친해졌나 보구나. 아빠가 괜한 걱정을 했나 보다.”
이야기하며 매우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온 아빠와 오빠가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 앞에 서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의자 두 개가 대령되었다.
“공작님, 도련님! 식사는 하셨는지요.”
어색함이 풀풀 풍긴 조슬린이 식사 중에 급히 일어나 두 사람을 보며 인사를 했다.
“아직 안 해서 말일세, 라피, 우리도 이곳에서 같이 먹자꾸나.”
“네에? 여긴 좁아서 아빠랑 오빠가 끼어들면…….”
“자고로 밥은 복작복작한 곳에서 먹는 게 좋은 거란다.”
아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본디 식당에 차려져야 할 음식이 식탁에 대령되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두 사람이 작당하고 이곳으로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흐린 눈으로 봤지만, 아빠와 오빠는 짐짓 시선을 다른 쪽으로 피했다.
“뭐 어쩔 수 없죠. 오늘만 여기에서 같이 먹어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 조그만 테이블에 네 명이 둘러앉았다. 스테이크를 썰기 위해 손을 움직이면 팔꿈치가 닿을 정도로 좁았다. 그나마 나는 체구가 작아서 괜찮았지만, 오빠와 조슬린은 닿을 때마다 민망해서인지 서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불편한 식사가 끝나고 차가 들어왔다. 따끈한 차를 마시며 피곤함을 씻어 내릴 때 아빠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한데 진짜 황태자가 네게 시집오라고 했더냐.”
“네.”
이미 다 들은 걸 아니라고 할 수 없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의견은 어떠하더냐. 일찍이 황제가 황태자와 너를 엮어 주려고 했지만 내가 절대 안 된다고 하긴 했다만.”
“왜요? 제가 클렌이 좋다고 하면 결혼시키시게요?”
“그건…… 그러니까 생각 좀 해 봐야겠구나. 난 우리 라피가 결혼하지 않고 이곳에서 평생 같이 살았으면 하지만…… 내 딸이 간다면 무작정 말릴 수도 없으니.”
머뭇머뭇하며 말하는 아빠를 본 나는 커다란 손등을 꼭 감쌌다.
“그럴 일 없어요. 클렌이 처음부터 제게 적의가 아닌 호감을 가진 채 접근해서 친구가 된 거예요. 클렌은 지금의 황제와 다른 황제가 될 거라고 믿어요.”
황제파가 아닌 공작가의 세력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대신관과 짜고 성전을 일으켰다. 그 결과 동부와 남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남부는 선대 공작을 잃고, 동부와 북부는 공작부인이자 딸을 잃었다. 더불어 가장 강하다는 판테르 공작가의 친위대마저 유명무실해질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기사들도 죽고 다치는 이가 많은데 병사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서부는 공작이 출산 후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때 친인척의 내부 분란으로 부군을 잃었다.
그것도 모자라 마법탑을 지원해 북부의 세력을 더 줄이려는 계획이라고 했다.
그 모든 것을 클레어런스가 알려줬다. 서부 쪽은 황제가 루피노 공작가의 친인척 중 한 명에게 바람을 넣어 반란을 일으키면 도와줄 거라 했다고 말이다.
그간 클레어런스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 주자 아빠와 오빠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씨엘은 탈의실에서 인간형으로 변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씨엘의 날카로운 눈빛을 보아하니 지금 앞에 황제가 있으면 갈가리 찢어 죽일 태세였다.
“황태자가 그렇게 말했더냐.”
“네, 그리고 전에 오빠를 마중 갔을 때 습격한 것도 황제와 모르간 후작가의 첫째가 작당해서 벌인 일이었대요. 클렌이 황제 같은 멍청한 과오는 저지르고 싶지 않다고 말해 줬어요.”
공작가의 세력을 약하게 만들기보다는 그들과 함께하길 원한다는 말을 항상 했다.
“순진한 건지 영악한 건지 구분이 안 되는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알았을 시에 일어날 파급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아빠와 오빠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씨엘은 이를 갈면서 당장이라도 황궁에 달려갈 듯한 태세였다. 조슬린은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끼어들지 못하고 눈치를 살폈다.
“제가 보기엔 클렌은 순진하진 않아요. 꼭 뭐랄까. 미래를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랑 친하게 지내길 원했고요.”
현재의 황제와 같이 나라를 다스리면 망한다는 것을 아는 듯이 행동했다. 그래서 내게 비밀 이야기도 서슴없이 해 준 것 같았다.
“아마 그 말을 듣고 공작가가 들고 일어나서 황제를 갈아엎어 준다면 더 좋아할 것 같은데요.”
“황태자 본인이 아비를 처단하기엔 현재 명분이 없지. 그러니 라피에게 말해 준 것 같구나.”
클레어런스 입장에서는 공작가가 들고 일어나서 황제를 밀어내도 괜찮았다. 아니면 나는 너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이런 말도 해 준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으니 그것 역시 좋을 것이다.
“역시나 영악한 놈이군. 어쩐지 그놈이 나를 만지는 손길이 상당히 다정했어. 기분 나쁠 정도로.”
클레어런스를 만날 때마다 몇 번을 빼고는 항상 씨엘을 대동했다. 내 허벅지에 머리를 기댄 채 앉아 있을 때 클레어런스가 씨엘이 귀엽다며 옆으로 다가와 쓰다듬은 기억이 났다.
“생각해 보니 씨엘이 클렌에게 만져지는 것을 허락했구나.”
“그런 거 아니야. 라피가 옆에 있어서 얌전히 있었던 것뿐이야. 그곳에서 발톱으로 할퀴었으면 라피에게 피해가 갈 테니까 참은 거라고.”
안 그래도 좁은데 씨엘이 아빠와 내 사이로 의자를 가져와 끼어들었다. 그런 씨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아빠와 오빠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다 큰 남자가 여자애에게 쓰다듬어 달라고 반쯤 기대 있다니, 쯧쯧. 루피노 공작이 아들을 잘못 키웠군.”
“음? 저는 어머니가 키운 게 아니라 라피가 키워 준 겁니다만. 온전히 라피의 취향에 맞게 컸는데 무슨 문제 될 게 있습니까?”
순전히 내 취향대로 컸다는 씨엘의 말에 아빠와 오빠는 못 볼 것을 본 표정을 지었다. 그에 비해 조슬린은 탄성을 질렀다. 역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나 뭐라나.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니…… 어쨌든 황태자가 우리, 아니, 정확히는 라피의 편을 들어 끌어들이는 것을 보아하니 최소한 지금의 황제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것 같군.”
“그땐 우리가 사분오열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똘똘 뭉쳐 있지 않습니까. 황태자도 머리란 게 있으니 황제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함부로 할 수 없을 겁니다.”
“그건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어머니께 제가 한 마디만 해도 당장 달려오실 테니, 4대 공작가가 한 번에 행동한다면 아마 지금의 황제도 과거처럼 행동하지 못할 겁니다.”
“누가 형님이야.”
씨엘이 가끔 오빠에게 형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오빠는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굴었다. 그런 오빠를 본 씨엘이 느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오빠라고 부를까요? 옵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