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128)화 (128/164)

128화. 

처음으로 내 방으로 들어온 오빠가 굉장히 조심스러워하자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터졌다.

“오빠가 언제부터 그런 것에 신경을 쓰셨을까?”

“나야 뭐 항상? 크흠흠, 그나저나 멋진 기사님이 되어 오셨군요. 안 그래도 새로운 기사를 뽑는다는 연락은 듣긴 했는데, 이곳에 합격하실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군요.”

조슬린을 본 오빠가 상당히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 말했다.

“라피 아가씨가 계신 곳에 오려고 지원해서 운이 좋아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라피 아가씨의 친구가 되길 원하셔서 일부러 저를 뽑은 게 아닌 게 싶습니다.”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실력이 없다면 바로 떨어뜨리고도 남을 위인들이 많으니까요. 합격하신 거 정말 축하드립니다. 우리 라피의 호위기사라니 앞으로는 자주 마주치게 되었군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오빠가 조슬린과 인사가 끝나자 문 옆에서 비켜섰다. 그러자 들어오는 고용인의 손에 뭔가가 바리바리 들려 있었다.

“이건 오빠가 틈틈이 라피에게 주려고 준비한 거야. 국경에서 일하고 저녁엔 사하라에서 우리 호박떡한테 어울릴 것 같은 것을 하나둘씩 사다 보니까 양이 많아졌어.”

대략 두 달간 국경에 있었던 만큼 고용인의 손에 들린 선물 개수도 대략 60개 안팎이었다. 매일 나를 생각하면서 하나씩 사 모았다는 선물을 보며 활짝 웃었다. 매우 풍족한 삶을 살기에 저런 선물은 필요 없었다.

하지만 매일 워프 게이트를 타고 사하라를 오갔을 오빠의 정성을 생각해서 웃으며 선물 중 하나의 포장을 뜯었다.

“이건 뭐야?”

고양이 인형인데 이건 하루 만에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고양이 눈동자가 무려 보석이었다. 폭신폭신한 감촉하며, 빈틈없는 재봉선을 보아하니 이건 장인의 솜씨였다.

“뭐긴, 고양이 인형이지. 장인이 우리 라피를 생각하며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든 거란다. 어때? 씨엘보다 귀엽지? 씨엘은 이제 다 컸으니까 이 고양이 인형을 안고 자렴.”

참고로 씨엘의 비밀이 밝혀진 후, 공작저엔 씨엘의 방이 따로 마련되었다. 그런데도 씨엘이 자꾸만 고양이 모습으로 변해 내 침대로 꾸물꾸물 기어오르는 것을 본 오빠가 일부러 인형을 사 온 듯했다.

약간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얼른 갈무리한 후 해사하게 웃었다.

“고마워. 오빠, 나머지 선물은 내가 알아서 풀어 볼게. 오빠는 피곤할 테니 얼른 씻고 자.”

“응? 나 안 피곤해. 오빠는 젊어서 괜찮단다. 그리고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다 씻고 잠도 충분히 잔 후에 왔어.”

오늘 쉽게 본인 방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선물을 다 뜯어 보기 전에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다급한 마음에 곁에 있는 제니를 불러 포장을 뜯게 했다.

“어머나, 이건 어여쁜 드레스네요. 이건, 보석 달린 구두이고…….”

드레스와 구두 그리고 온갖 종류의 장신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래서 아빠가 과소비하지 말라고 일 년 용돈으로 1골드를 준 것인가 싶었다. 생일마다 동부 귀족들이 갖다 바친 선물이 아니었으면 이런 것들을 사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참! 오빠가 잠깐 깜빡한 게 있네. 다녀오는 동안 선물을 뜯어 보렴.”

뭔가 생각난 듯한 오빠가 나가자 나는 부랴부랴 포장을 뜯다가 조슬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저번에도 보고 느꼈지만, 정말이지 판테르 경은 라피 아가씨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어머나, 조슬린 경!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사랑하시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진짜로 사랑하고 계시답니다. 호호호.”

차기 시녀장으로서 절대 기사에게 꿇리지 않은 제니는 조슬린에게 미개봉 선물을 맡겼다.

포장지를 뜯을 때마다 진짜 각양각색의 선물이 나왔다. 아빠가 보면 몇 마디 하고도 남을 분량이었다.

“이러다가 오빠가 가문을 맡게 되면 과소비로 말아먹는 거 아닐까.”

“라피 아가씨도 참, 그럴 리가 없잖아요. 벤스 님이랑 도련님이 작당해서 뭐든 다 사들인다고 하더라도 워렌 후작님이 가만 안 있을 예정이실 거예요.”

이 집안에서 벤스의 기대치는 절대 높지 않았다. 그에 비해 성실한 맥스는 상당히 후한 점수를 받았다.

가까스로 선물을 전부 개봉했을 때쯤 오빠가 안으로 들어왔다. 빈손으로 오지 않은 오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뭔가를 조슬린에게 건넸다.

“이건 우리 라피에게 주었던 카디건입니다. 그때 바로 드렸어야 했는데 깜빡한 바람에 5년이 지나서야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약간의 두께감이 있는 하얀색 카디건을 본 나는 그때야 생각이 나서 손뼉을 쳤다.

“맞다, 그때 아이리스 백작가의 정원에서 추워 보인다며 내게 걸쳐 준 카디건이지?”

그날 이후로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카디건을 오빠가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굳이 돌려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이젠 이게 맞지 않아서요.”

5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슬린은 체형이 바뀌어서 십대 시절에 입은 카디건이 맞지 않는다고 설명하며 오빠에게 조심히 건네받았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사죄의 의미로 카디건을 하나 맞춰 주겠습니다. 내일이라도 재단사를 부를 터이니…….”

“아, 아닙니다. 이건 맞춘 게 아니라 사하라 시장에서 우연히 마음에 들어 산 기성품일 뿐이에요.”

은은한 미소를 지은 조슬린은 오빠의 말을 거절했다. 이젠 이걸 입고 귀족가의 파티에 참석하는 게 아니라 기사 제복을 입기에 필요 없다고 설명했다.

“그렇군요. 그럼 어쩔 수 없군요. 나중에 제복이 아닌 옷을 입고 파티에 참석하게 될 땐 제가 꼭 한 벌 맞춰 드리겠습니다. 그때 추워하는 동생을 따뜻하게 품어 준 귀한 옷이었으니까 이 정도는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뭐지? 우리 오빠가 원래 여자한테 저리 매너가 좋았던 건가. 

처음 본 오빠의 모습에 나는 씨엘을 보며 눈치를 줬다. 저런 점은 오빠를 보고 배우라는 뜻으로 보자 씨엘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나랑 결혼만 하면 평생 다 입지도 못할 드레스를 계절 별로 수십 벌씩 맞춰 줄게.”

부잣집 도련님 마인드인 씨엘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예쁜 언니, 아니, 어머니가 벌어 놓은 돈을 자식이 죄다 가져다가 쓰려고 하면 안 되지.”

“그건 걱정하지 마. 라피에게 사용할 돈이라고 하면 어머니는 집안의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주실 분이니까.”

상당히 무서운 이야기를 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씨엘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와중에도 주고자 하는 이와 받지 않겠다고 사양하는 이를 번갈아 본 나는 식은 차를 마셨다. 대체 저 행위는 언제쯤 끝날 것인가.

계속 보고 있기 힘들어진 나는 부득이하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린, 그냥 오빠가 준다고 할 때 받아 챙겨. 안 그랬다가는 오늘이 끝나도록 끝이 없을 것 같으니까.”

“아! 그러하다면…… 판테르 경의 선물은 나중에 잘 받겠습니다.”

조슬린이 청을 받아들이자 오빠도 그때야 물러났다. 그러고는 내 볼에 입맞춤을 하고는 돌아갔다.

“고작 내가 입던 카디건 하나를 라피에게 둘러 줬을 뿐인데 너무 과한 선물을 받은 것 같아 부담스럽네.”

“괜찮아. 자고로 선물은 준다고 할 때 재빨리 받아 챙기는 게 이득이니까.”

실제로 난 누가 내게 선물을 줄 때 절대 빼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안 받는다고 해도 몰래 찔러 주고 갈 거니 앞에서 당당하게 고마움을 표하며 받는 게 서로 마음이 편하니 말이다.

내 앞에 놓인 선물을 고용인이 가져다가 정리하는 동안 다시 들어온 따뜻한 차를 마시며 여유를 부렸다.

“근데 라피는 마법 공부 안 해?”

“오늘은 린을 오랜만에 본 날이니까 쉴 거야. 마법 공부는 내일부터 해도 충분해.”

수년 만에 만났는데 고작 공부 때문에 조슬린과 해후를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방긋방긋 웃으며 실컷 먹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식사 시간이 되었지만 나는 처음으로 식당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에서 린이랑 먹을 거예요.”

“호호호, 알겠어요. 아가씨께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같이 먹겠다고 하신 거 처음이라서 신기하기까지 하네요. 그나저나 가주님과 도련님 표정이 볼만해질 것 같아요.”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요. 아빠랑 오빠한테는 잘 말해 주세요.”

제니가 곧장 내 말을 듣고 밖으로 나가자 조슬린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나 때문에 가족끼리 식사하지 않는 거라면…….” 

“괜찮아. 오빠랑 아빠도 바쁘면 가끔 식당에 안 내려오시니까. 오늘은 내가 튕기는 날이랄까. 아빠가 린을 내게 붙여 준 이유를 제대로 상기시켜 줄 수 있으니 더 좋을 것 같아.”

내가 호위기사 겸 친구랑 밥 한 끼 같이 먹는다는데 아빠랑 오빠가 눈치 없이 끼어들진 않을 것이다.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싶은 나는 그간 쌓인 세월 동안 묵힌 이야기를 했다. 식사하는 중에도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심지어는 씨엘이 옆에 와서 비비적댔지만, 살짝 밀어냈다. 그러자 녀석은 곧장 고양이 모습으로 돌아가 내게 안겨들었다.

제니와 다른 이들이 안으로 들어와 시중을 들어 줬지만 나와 조슬린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편히 말을 놓은 채 대화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고 말하자 다들 우리의 말투를 고치려 들지 않았다.

“그 비만 도마뱀이 라피를 데려가려고 했다고?”

“그렇다니까, 그때 얼마나 어이없었는데. 내가 인사하는데도 안 받아 주더라고. 지금까지 말이야.”

“배만 튀어나온 도마뱀이 마음은 개미 똥구멍만 한가 보네. 그래도 지금 황태자는 똑똑하고 괜찮은 편이라 황제처럼 대신관만 싸고돌진 않을 것 같다고 사람들이 말하더라.”

“황태자? 걘 그냥 애늙은이 같아.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내가 좀 삐딱하게 앉았기로서니 자신한테 시집오면 허리를 교정시켜 준다고 하는 거 있지? 진짜 웃기지도 않더라고.”

“푸웁!”

조슬린 앞에서 클레어런스에 대해 평소 생각한 것을 말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마시던 물을 내뿜었다.

“미, 미안해. 실례했어.”

상당히 당황한 표정을 지은 조슬린과는 달리 제니는 매우 평온한 모습으로 물이 튄 곳을 대충 닦아냈다. 얼굴을 붉힌 조슬린은 아직도 숨이 고르지 않는지 조금 힘들어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내가 뭐 없는 일을 부풀려 말한 것은 아니니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연스레 고기를 썰었다. 한데 내 허벅지에 앉은 씨엘의 솜방망이에서 날카로운 발톱이 삐죽 솟아 나왔다. 클레어런스와 이야기하는 당시에 씨엘은 그 자리에 없었기에 처음 듣는 이야기일 것이다.

“씨엘, 발톱 집어넣어. 안 그러면 고양이 인형 안고 잘 거야.”

뀨웅.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씨엘의 수염이 파르르 떨리는 듯했다.

“저기 라피, 진짜 황태자 전하가 그런 말을 한 거야?”

“어, 나 만날 때마다 시집오면 얼굴에 광이 나게 해 준다니, 손가락만 까딱여도 낙엽처럼 쓰러질 사람들 만들어 주겠다니, 온갖 장난을 다 치거든.”

“어, 그, 그렇구나. 근데 왜 내 귀엔 진담이 섞인 말처럼 들릴까. 내가 듣기로는 황태자 전하께서는 귀족 영애 누구에게도 호감을 드러내거나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없다고 했는데.”

조슬린의 말을 듣고 보니 클레어런스가 여자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작년에 황태자 전하께 먼저 고백한 던컨 후작 영애를 보고 대놓고 ‘너 따위가?’라고 했다던데.”

클레어런스에 대해 조슬린이 말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심각해졌다. 그리고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렌이 나만 봐서 눈이 한없이 높아졌나 봐. 이러다가 나 때문에 클렌이 노총각이 되면 어떻게 하지? 내가 평생 책임져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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