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127)화 (127/164)

127화. 

세상에나, 이게 누구야?

이제껏 바빠서 연락을 서로 하지 않은 조슬린이었다. 그래서 소식이 궁금했지만, 괜히 수련을 방해하는 건 아닌가 싶어 꾹 참고 기다렸는데 집에서 볼 줄이야.

“라피 아가씨가 뭐예요. 예전처럼 라피라고 불러 주세요.”

“네? 하지만 전 이곳에 고용된 기사일 뿐인걸요.”

“기사? 와! 진짜 기사님이 되신 건가요? 원하시는 거 이뤄서 다행이에요. 엄청 멋져요.”

여성 기사는 실베스터 왕국에서 실컷 봤다. 한데 이 나라에서 여성 기사는 흔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조슬린이 기사가 되기 위해 흘린 피땀을 존경하는 의미로 투박한 굳은살이 박인 손을 꼭 잡았다.

“크흐흠, 저기 아가씨? 지금 신입 기사들이 인사하러 왔습니다만.”

내가 조슬린만 붙잡고 있자 하메른 경이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환기하며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죄송해요. 오랜만에 지인을 이곳에서 봐서 반가운 마음에…… 절대 무시한 건 아니에요. 여러분, 정말 반가워요. 아빠랑 오빠가 막 굴린다고 하더라도 절대 떠나지 마세요. 몸은 고달파도 월급이 많거든요.”

실제로 판테르 공작가 소속 기사가 되려고 일부러 몇 년을 힘들여 수련을 하곤 했다. 모집 공고를 붙임과 동시에 이력서를 들고 온 이가 수두룩했다. 그 이유가 일은 힘들어도 월급이 많기 때문이다. 보통 기사 월급보다 1.5배 많다고 알고 있었다.

자고로 사장은 미워도 돈은 밉지 않다고 하지 않던가. 일이 힘들어서 사장 욕을 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돈 때문이었다. 그래서 판테르 가문의 기사 굴림 정도가 소문을 타서 모르는 이가 없지만 자진해서 퇴사하진 않았다.

게다가 후일 피치 못한 사정으로 퇴직하더라도 메리트가 있어서 귀족가의 검술 선생님이나, 혹은 재취업하기가 매우 용이했다.

신입 기사들과 간단하게 인사한 후 하메른 경을 봤다. 조슬린만 빼고 가 보라는 의미의 눈짓에 하메른 경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가씨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제껏 사교 활동도 하지 않아서 친구가 없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답니다.”

“어? 그 무슨 말씀을요. 저, 친구 정도는 있어요. 비록 대놓고 말할 처지의 친구는 아니지만.”

“아가씨께서 그러하다면 그러한 것이죠.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조슬린 경, 부디 아가씨를 잘 부탁하겠네.”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조슬린의 대답을 들은 하메른 경은 남은 기사들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 우선 차 마시면서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떨까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요.”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요. 한데 뒤에 서 계신 분은 누구신지요?”

“음? 아! 소개를 안 했네요. 씨엘이에요.”

“씨엘? 씨엘이라 함은 라피 아가씨의 곁에 있던 고양이와 이름이 똑같군요.”

씨엘을 보던 조슬린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를 알기에 굳이 부정하지 않은 나는 조슬린을 데리고 급히 내 방으로 움직였다.

“씨엘 님이랑 같이 산책하고 오시는 길이시군요. 차 내올까요? 으음? 뒤에 계신 분은 누구신지…….”

오전 내내 이레나에게 막바지 교육을 받고 온 제니의 눈동자엔 피곤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나를 보고는 얼른 방긋 웃다가 뒤따라온 조슬린을 보고 짐짓 경계하는 듯했다. 얼른 나를 제 뒤로 옮기며 조슬린을 봤다.

“제니, 이번에 내 호위기사님으로 뽑힌 조슬린 니콜…….”

“조슬린입니다. 아가씨!”

“아, 크흠흠. 그렇다네요. 여긴 조슬린 경이에요. 조슬린 경, 여긴 내 시녀이자 조만간 시녀장이 될 제니!”

기사 중엔 귀족 출신이 아닌 자도 많았다. 그렇기에 귀족 출신 기사여도 본인의 가문을 숨기고 싶어 하는 이들은 평민 출신 기사처럼 성이 아닌 이름 뒤에 경이란 호칭을 붙이곤 했다. 

“어머나! 이번에 아가씨 전담 호위기사를 뽑을 거라더니, 여자분으로 뽑으셨을 줄이야. 호호호, 안녕하세요. 우리 구운 찹쌀떡 아가씨의 전담 시녀인 제니라고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부터 라피 아가씨의 전담 호위기사가 된 조슬린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간단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본 나는 소파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보통 귀족 집안이라면 체통을 지키라느니, 자세를 똑바로 하라는 주의를 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집뿐만 아니라 티그리스 가문과 아퀼라 가문에서는 내 자세가 비뚤어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족 외엔 감히 내 자세를 지적질할 귀족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 황족 중에서는 클레어런스만 황궁 연회 때 약간의 지적을 할 뿐이었다.

‘그렇게 흐트러진 자세로 있으면 늙어서 허리 굽어져서 고생할지도 몰라.’

‘걱정도 팔자시네. 걱정 마셔. 내 남편이 될 것도 아닌데 노후까지 걱정하는 건 너무 앞서간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일 년에 황궁 연회 때만 마주치는 게 고작이었지만, 어느새 나는 그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놓게 되었다. 그러자 더 친근한 티를 내듯 그간 밀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엔 나를 떠보려고 진심을 숨기는 줄 알고 잔뜩 경계한 적도 있었다. 한데 알고 보니 진짜로 나를 친구처럼 여긴 것이다. 내 출신 때문에 그런 줄은 모르겠지만.

‘그럼 나한테 시집오든가. 내가 제대로 허리 교정시켜 줄 수 있는데.’

‘그거 하기 싫어서라도 황후 안 할 건데, 누군지 모르겠지만 클렌의 마누라 될 사람이 불쌍하네.’

크큭, 웃는 클레어런스를 본 나는 콧방귀를 꼈다. 실제로 황후가 되면 허리 교정은 시시때때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뒤에서 황궁 예절로 범벅이 된 시녀들이 줄줄이 따라다니면서 계속 허리를 굽힐 수 없게 잔소리를 할 테니까.

내가 잠시 딴생각을 할 때 조슬린과 대화를 끝낸 제니가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린, 얼른 앉아요. 계속 바른 자세로 서서 걷느라 힘들었을 테니.”

“아, 전 계속 서 있어도…….”

“여기 누가 본다고 그러세요. 얼른 앉으세요.”

내가 맞은편을 가리키며 말하자 조슬린의 눈동자가 씨엘에게 향했다. 아무래도 씨엘을 신경 쓰는 듯했다.

“우리 씨엘은 괜찮아요. 입이 무거워서 어디 가서 떠들지 않거든요. 그렇지 씨엘?”

“응, 난 라피만을 위해서 움직이니까.”

항상 그러하듯 씨엘이 내 옆에 앉자 조슬린은 어정쩡한 모습으로 맞은편에 앉았다.

“한데 진짜 씨엘…….”

“린이니까 말할게요. 씨엘은 수인족이에요.”

“아, 그래서 고양이 모습으로 있었던 거군요. 저, 수인족은 처음이에요.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노골적으로 보고 있어서.”

씨엘을 찬찬히 뜯어보던 조슬린은 곧장 사과를 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린, 여긴 우리밖에 없으니 말 편하게 하세요. 저도 편하게 할 테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라피 아가씨의 호위기사로 고용된 입장이라…….”

입장이 서로 달라 감히 내게 친근하게 대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조슬린을 본 나는 방긋 웃었다.

“혹시 아빠가 다른 전제 조건을 달지 않으셨나요? 친구 같은, 아니 친구로 있어 주길 원한다고 하셨을 텐데.”

항상 내게 동성 친구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아빠였다. 그래서 황궁 연회가 끝난 후 다른 귀족의 파티 같은 곳에서 내가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길 바랐다. 하지만 내게 다가온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에게 등 떠밀려서 온 경우였다. 

그런 아이들하고 무슨 대화를 나누겠는가. 묘하게 빙의자나 회귀자처럼 정신연령이 높은 클레어런스 외엔 대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요즘 유행하는 인형이랄지, 좋아하는 케이크를 말하는 걸 듣는 것도 지겨웠다. 뭐 간혹 이야기하는 맛이 있는 영애도 있긴 했지만.

겉모습은 어려도 속은 어른이라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게 귀찮았다. 그래서 귀족가의 파티에 가도 대부분 씨엘과 함께해서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사귀지 않아서 동성 친구가 없었다.

그런 나이기에 아빠는 호위기사에게 내 친구 역할까지 같이해 주길 바란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러셔도 엄연히 저는…….”

“린, 우리끼리만 있을 땐 편하게 있어요. 네?”

“그, 그럼…… 라피라고 불러도 될까?”

“당연하죠.”

“그럼 라피도 나를 린이라고 부르고 말도 낮춰. 친구인데 높임말 쓰는 것도 이상하잖아.”

비록 나보다 조슬린의 나이가 많았지만, 꼭 친구가 동갑일 필요는 없었다. 간단하게 친구가 된 기념으로 마침 제니가 안으로 가져온 다과를 먹으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판테르 가의 디저트가 맛있다더니 진짜네. 황도에서 유명하다는 비타돌체에서 만든 오렌지 케이크보다 더 맛있어.”

오렌지를 가장한 설향으로 만든 케이크에 조슬린이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 이거 실베스터 왕국의 설향으로 아가페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케이크니까 맛이 없으면 큰일나.”

“뭐? 서, 설향? 설향은 실베스터 왕국에서 절대 밖으로 유출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과일이잖아.”

조슬린이 말한 게 정확했다. 실제로는 실베스터 왕국은 설향을 타국으로 수출하지 않았다. 실베스터에서 설향을 맛본 이들이 자국으로 돌아가 협상을 해도 그들은 거절을 했다. 그 정도로 꽁꽁 묶여 있는 설향을 이곳에서 먹게 된 조슬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리 집엔 설향이 많이 있어. 라엘이 항상 부족하지 않게 주거든. 보존 마법을 걸어 둬서 오래오래 두고 먹고 있으니까 조슬린이 평생 친구가 되어 준다면 이런 거 매일 먹을 수 있어.”

“라엘? 라엘은 또 누구야?”

“라파엘 실베스터.”

“헙!”

본명을 말하자 조슬린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내가 실베스터 왕국 왕자의 본명을 부른 것도 모자라 애칭을 부른 것 때문에 놀란 게 티가 났다.

“라피가 예전에 실베스터 왕국에 갔다는 말은 들었는데 자세한 건 몰라. 이야기해 줄 수 있어?”

조슬린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단순하게 설명했는데도 조슬린은 입을 쩍 벌렸다. 그 입에 나는 소복하게 담은 설향 케이크를 넣어 줬다.

“대, 대단해. 아, 진짜…… 라피, 정말 존경해. 멋져. 훌륭해.”

조슬린의 입에서 온갖 찬사가 나왔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실제로 진짜 서너 살짜리 아이였으면 하지 못할 일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15년, 베네딕트 제국에서 18년을 경험했기에 가능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친구가 되었다지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는 없었다.

설향으로 만든 케이크, 사탕, 젤리가 가득한 테이블은 같이 나눈 이야기만큼이나 빨리 사라졌다.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조슬린은 부른 배를 쓰다듬다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국경에 출장 갔었던 오빠가 노크도 없이 바로 내 방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나를 보고 활짝 웃은 오빠가 말하다가 멈칫했다.

“라피, 오빠 왔…… 음? 오빠가 혹시 방해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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