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씨엘을 어이없단 듯 본 오빠의 시선이 쓰러진 기사에게 향할 땐 매우 매섭게 변했다.
“고작 이 녀석 하나에게 전멸당하다시피 한 것인가. 이래서야 씨엘 같은 인간이 우리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겠군.”
오빠의 묵직한 말에 쓰러진 기사들은 하나둘 일어났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이렇게 약해 빠져서 전쟁이라도 터지면 다들 나자빠지겠군. 이런 줄도 모르고 아버지는 황제에게 공격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넘어오라고 하셨는데.”
싸우질 못하니 폭약이라도 들고 자살 특공 기사단이라도 만들어야 국경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며 신랄한 말을 쏟아냈다. 그 말을 들은 기사들은 더욱더 고개를 숙였다.
이 사달을 일으킨 씨엘은 내 옆으로 와서 방긋 웃었다. 마치 이번 일과 자신은 조금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다.
“씨엘, 대체 왜 그랬어?”
“저들이 어머니가 나를 이곳에 버려서 라피를 유혹하게 했다고 했어. 나를 욕하는 것은 괜찮은데 어머니를 욕하니까……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저들이 욕해도 그냥 꾹 참을게.”
나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말하는 씨엘이 울망울망한 눈으로 날 보았다. 그런 씨엘의 손을 잡아 준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그럴 땐 참지 마.”
“하지만…….”
“만약 다른 사람이 내 욕을 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그런 놈들이 있으면 멱을 따 버릴 거야.”
순간 살기가 스쳤다가 금방 음전한 표정을 지은 씨엘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 집안사람이니 목숨만은 살려 줘. 그리고 저들을 대신해 내가 사과할게. 미안해, 저 사람들은 씨엘이 누구 자식인지 몰라서 함부로 말한 거야.”
남부로 휴가를 갔다가 온 내 곁에 까만 고양이가 사라지고 대신 까만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를 한 같은 이름의 인간이 존재하자 다들 기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곧장 퍼즐을 짜 맞췄고, 씨엘이 수인이라는 소문이 집 안에 순식간에 퍼졌다.
수인이 아니고서야 고양이 씨엘과 같은 외형을 가진 존재가 내 옆에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 소문의 진위에 내가 딱히 답은 하지 않았지만 다들 그리 알고 쉬쉬하더니 기어코 사달이 터졌다. 만약 씨엘이 서부의 루피노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함부로 하지 못했을 터이다.
하지만 평범하게 내 곁에 있고 싶다고 해서 씨엘의 출신을 숨겼더니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자네들, 모두 한동안 두 다리로 출퇴근하지 못할 터이니 각오하게나. 오스카에게 미리 말해 둘 테니까.”
“히익!”
오빠의 말에 다들 기겁한 표정을 지으며 헛숨을 들이켰다. 그 정도로 기사들에게 집사인 오스카의 이름은 잘 들어 먹혔다. 현 판테르 공작가의 기사단장 안젤라 경은 늦은 나이에 결혼해서 지금은 만삭이라 부부가 같이 휴가 중이었다.
안젤라 경 역시 비혼을 꿈꿨지만, 후배이자 제 부하 기사인 비안코 경을 보고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 결과 안젤라 경이 먼저 반지를 들고 와서 비안코 경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프러포즈를 했다. 그것도 다들 수련하는 연무장 한가운데서 말이다.
연애 경험이 전무한 안젤라 경의 프러포즈에 당시 비안코 경의 하얀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은 휘파람을 불거나 바람을 넣는 등의 행위는 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너무 놀라 넋을 놓은 탓이다. 그러다가 현실로 돌아온 기사들은 입술만 움직여서 욕했다. 비안코 경이 안젤라 경과 결혼하게 되면 막내 기사이되 더는 막내로 여길 수 없게 되니 말이다.
얼떨결에 반지를 받은 비안코 경은 속전속결로 그 달에 안젤라 경과 결혼을 했다.
서로 껄끄러워진 상황 속에 선배들은 막내인 비안코 경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누가 뭐래도 제 직속상관의 부군이 되니 말이다.
만삭인 안젤라 경이 휴가를 받아 쉬어서 지금 기사들을 훈련시키는 사람은 집사인 오스카였다. 전엔 몰랐는데 그제야 오스카의 전직이 이곳의 기사단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아 지옥을 지키는 켈베로스를 흠씬 두들겨 팬 후 지옥 불에 구워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기사라는 평이 자자했다. 그 정도로 매우 무서웠던 과거를 뒤로한 채 나이가 들어 기사단장에서 물러나 집사로 제2의 인생을 사는 오스카였다.
처음엔 안젤라 경이 휴직 후에 오스카가 임시 기사단장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기사들은 희희낙락했다. 대부분 오스카가 기사단장직에서 물러난 후에 들어온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기사들은 오스카의 위명을 알고는 사시나무처럼 떨다가 갑자기 없던 지병이 도졌다며 병가를 냈다.
오스카 입장에서는 햇병아리라고 지칭된 도망가지 못한 기사들을 일주일간 훈련시켰다. 그 결과 훈련을 빙자해서 흠씬 두들겨 맞았다가 그 화풀이를 씨엘에게 했다가 날아다니게 되었다.
“흐음,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도련님, 그리고 아가씨, 씨엘 님.”
하얀 장갑을 착용하고 정장을 입은 채 이곳으로 온 오스카가 우릴 보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이렇게 보면 진짜 집사가 맞았다. 하지만 오빠가 씨엘에게 당해서 붕붕 날아다녔다는 말을 듣자마자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제가 검을 놓은 지 오래되다 보니 날이 무뎌진 듯합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가르쳐 놓겠습니다.”
기합이 빠짝 든 오스카가 두 눈을 흉흉하게 뜨더니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착용하게.”
기사로서 무릇 하체가 튼튼해야 한다며 아침마다 기진맥진할 정도로 기사들에게 달리기를 시켰다.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매단 채 말이다.
다들 죽을 듯한 표정으로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오빠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자고 고작 한 놈에게 전부 당할 수 있단 말인가.”
푸념을 하자 오스카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도 모래주머니를 착용하시지요.”
“뭐?”
“비록 아카데미를 졸업하셨다지만 제 눈엔 저 기사들보다 더 경험이 없고 어립니다. 그러니까 같이 훈련을 받으셔야지요.”
“아니 난 그럴 필요가…….”
“공작님의 뒤를 이어서 우리 구운 찹쌀떡 아가씨를 지키셔야지요. 안 그러십니까.”
집사답게 오빠 사용법을 잘 아는 오스카의 한 마디에 고개를 숙였다. 다른 기사처럼 모래주머니를 착용한 오빠가 오만상을 지은 채 연무장을 돌았다.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있노라니 지겨워서 자리를 뜨자 씨엘도 내 뒤를 따라왔다.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씨엘을 앉힌 후 마법책을 펼쳤다. 새 마법책은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저자가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담은 말랑 콩떡을 위한 고위급 마법서’라는 매우 긴 제목을 가진 책에 픽, 웃음이 터졌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 일 년간 각고의 노력을 다해 만들어진 마법서는 옆에 할아버지가 안 계셔도 고위급 마법을 쓸 수 있을 정도였다. 마법서를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 때 씨엘이 옆에 찰싹 몸을 붙여 왔다.
고양이 시절의 습성이 아직도 남은 듯했다. 마치 놀아 달라며 내 다리에 치대듯이 말이다. 그런 씨엘 덕분에 정신 집중해야 가능한 마법 공부의 흐름이 깨졌다. 그렇다고 씨엘을 무작정 혼내지는 않았다. 그저 어린 나이에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만 한 씨엘이 안쓰러웠다.
“씨엘, 설마 놀아 달라는 신호는 아니겠지?”
“맞아. 라피가 계속 마법서만 보니까 심심해.”
딱히 이곳에서 할 일이란 게 없는 씨엘이었다. 인간보다 더 월등한 조건을 타고난 신체적인 특징 때문에 딱히 검을 배우지 않아도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십 수년간 검 하나만 잡고 싸워온 카이를 한밤중에 연무장에서 검으로 이겼다.
비밀 친위대 대장인 카이는 순간 회의감이 느껴진다며 옅게 웃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구운 찹쌀떡 낳는 것도 실패했는데 이젠 씨엘한테도 졌다며 삶의 낙이 없다는 말을 남긴 채 휴가를 가 버렸다
그날 이후로 비밀 친위대는 씨엘을 볼 때마다 더는 설치지 않았다. 물론 그 소식을 접한 오빠 역시 씨엘에게 와서 시비를 걸지 않았다. 카이가 졌다는 소식에 적잖아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씨엘한테 낚싯대를 흔들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난 라피가 뭘 해 줘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씨엘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 한쪽이 또 허물어지듯 아려 왔다.
“그래, 그럼 나가자. 나가서 우리 산책하고 오자.”
“응.”
갑자기 방긋 웃음을 지은 씨엘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자 씨엘은 나를 정원으로 에스코트하며 데려갔다.
씨엘과 한동안 정원을 산책하고 돌아오자 매우 힘겨운 표정을 한 오빠가 내 방에 있었다. 아직 훈련 시간일 텐데 뭔가 핑계를 대고 빠져나온 것 같았다.
“무슨 일로 왔어?”
오빠에게 물을 따라 주며 물었다. 물컵에 담긴 물을 한 번에 마신 오빠는 나에게 말했다.
“호박떡, 아니 라피! 제발 씨엘에게 연무장에서 기사들 두들겨 패지 말라고 해 주렴.”
“왜? 이번 일은 기사들이 먼저 씨엘의 엄마를 욕해서 생긴 일인데.”
“뭐라고? 후우, 그건 내가 대신 사과하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감히 부모 욕을 하는 놈들을 앞에 두고 참는 것은 패륜이나 마찬가지니까.”
잘못한 점을 짚어 주자 오빠는 씨엘을 보더니 곧바로 사과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방긋 미소 지었다.
“그럼 이제 볼일은 다 끝난 거야?”
“아니,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어. 조만간 우리 라피의 호위기사를 모집할 거야. 가족들이랑 이미 상의 다 끝낸 상태야.”
나만 빼고 가족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 듯했다.
“왜? 나는 씨엘만 있으면 되는데.”
“이 녀석이 순수한 인간이 아닌 수인이라고 해도 엄연히 남성체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그러니 이번에 여자를 뽑기로 했어. 네 말 친구를 겸해서.”
친구라는 단어에 나는 나직하게 숨을 뱉어냈다. 내게 가까이 있는 친구는 마법서였다. 그리고 이성 친구라고 할 수 있는 황태자 클레어런스와 비밀 친구 하나 있는 정도랄까. 그 외 동성 친구는 딱 한 명만 생각이 났다. 나보다 나이 많은 아카데미 학생인 조슬린이 떠올랐다.
긴 금발에 청안을 지닌 조슬린과는 연락을 못 한 지 꽤 오래되었다. 일방적으로 연락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조슬린이 멋진 기사가 되면 그때 연락하겠노라고 해서 편안히 수련할 수 있도록 연락을 끊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할머니께서도 허락한 일이니 토 달지 말고, 얌전히 공부하고 있어. 알겠니?”
내 두 볼을 살짝 잡아당긴 오빠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호위기사라니 난 그런 거 필요 없는데. 내가 밖에 나가서 매일 노는 것도 아니고.”
인력 낭비에 돈 낭비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게다가 내 곁엔 씨엘이 찰싹 붙어 있으니 이제껏 호위기사는 바란 적도 없었다.
“씨엘은 내가 호위기사를 둬도 괜찮겠어?”
“응, 괜찮아. 여자라잖아.”
아무리 수인이라고 해도 남성체랍시고 여자를 뽑는다고 하니 마음을 놓은 듯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픽 웃으며 침대에 앉았다.
그러자 평소처럼 씨엘이 옆으로 뽀짝뽀짝 다가와 나를 봤다. 씨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몸을 기울이자 제 몸으로 나를 받아들였다. 씨엘의 유독 따뜻한 온기를 품은 가슴에 안긴 채 몇 번 하품을 했다.
“졸려? 졸리면 편히 자. 아무 짓도 하지 않을게.”
남자들이 하는 말 중에서 믿어서는 안 될, 손만 잡고 자는 것과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는 말 중에 하나를 말했다. 그런데도 난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아닌 씨엘이 하는 말은 믿을 수 있으니까.
크림처럼 달콤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씨엘은 이불로 나를 덮어 줬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내 눈동자 위에 따스함을 품은 커다란 손을 올리더니 제 손등에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잘 자, 라피…… 내가 꿈속으로 지켜 주러 곧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