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깨어나 보니 아빠가 걱정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아빠?”
“응, 우리 구운 찹쌀떡이 홀쭉해졌구나.”
내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조심스레 쓸어 만진 아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빠의 온기가 얼굴에 닿자 눈을 감고 그 손을 내 손으로 꼭 잡고 비볐다. 한동안 온기를 느끼며 마음을 편안히 하고 있을 때 한쪽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여봇! 그런 건 진작 말씀을 하셨어야죠. 혼자만 알고 있다가 왜 애들 걱정시키는 겁니까.”
“아, 아니 부, 부인, 소피아. 나도 나이가 있어서 깜빡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들이 다 보는 곳에서 이렇게 하시면 나도 체면이 있는데…….”
팡팡-
“우리 말랑 콩떡이 찌그러졌는데 여보의 체면이 문젭니까. 젊었을 땐 삼시세끼 직접 요리해 달라고 해서 나를 힘들게 하더니 나이 들어서 왜 이리 사고만 치신답니까.”
“아니 난 우리 라피가 마법 쓰다가 위험해질까 봐 미리 손을 쓴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만 때리십시오. 당신 손이 아플까 무섭습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들어 가는 꽃과 같던 할머니였다. 동백꽃처럼 떨어져 내릴까 무섭게 여겼건만 지금 보니 생생하셨다. 두 손으로 할아버지의 등을 팡팡 두들기며 말씀하시는데 듣는 이들은 죄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이들의 시선이 전부 내 쪽으로 쏠렸다.
“라피, 언니가 정말 많이 걱정했단다. 눈앞에서 우리 동생이 쓰러지는데 진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너무 무력했어. 후우…….”
말로 표현 못 할 심적 고통을 당한 듯한 언니의 말에 나는 배시시 웃었다. 나 자신도 왜 쓰러졌는지 알지 못했다가 방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대화로 어렴풋이 짐작을 했다.
실베스터 왕국에서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 할아버지가 내 손목에 보석 팔찌를 채워 주셨다. 씻을 때도 절대 빼지 말라는 당부에 나는 이제껏 일반적인 보석 팔찌인 줄 알고 계속 착용을 하고 있었다.
“우리 딸을 닮아서 정의감이 넘쳐 마나 고갈이 되더라도 생명력을 짜내서 마법을 쓸 말랑 콩떡입니다. 그러다가 또 우리 딸처럼 먼저 갈까 봐 팔찌를 채워 준 건데…….”
할아버지의 말에 등짝을 팡팡- 때리던 할머니의 손이 멈췄다. 그러곤 눈물을 꼭 참으며 할아버지를 안아 주셨다.
“여보, 아까도 그랬듯이 그런 건 진작 말을 했어야지요. 어찌 혼자만 끙끙 앓으면서 그런 깜찍한 생각을 하셨습니까.”
“내가 먼저 갔으면 갔지 이젠 내 새끼들을 앞세우는 건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급한 마음에…… 후우, 사위, 그리고 놀랐을 우리 손녀사위랑 큰손녀……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아, 아닙니다. 아버님, 우리 라피가 세라피나를 닮아서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란 걸 아는데도 조치를 하지 못했는데…… 아버님 덕분에 우리 라피가 산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번엔 오히려 아빠가 할아버지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내 머리카락을 매우 사랑스럽게 쓸어 만졌다. 한동안 가족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무언가가 빠진 게 생각났다.
“씨엘, 씨엘 어디 있어?”
내가 말하기가 무섭게 침대 위로 까만 귀가 쫑긋 올라왔다. 파르르 떨리는 귀가 안쓰럽게 여겨졌다.
“씨엘?”
두 번째 부름에 씨엘의 머리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수심이 가득한 표정의 씨엘은 시무룩한 표정을 짓다가 내가 웃자 같이 미소를 지었다.
“이모, 이 녀석이 진짜 그 까만 고양이 씨엘이 맞아?”
아카데미에 있다가 내 일을 전해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콜린이 험악한 표정을 지은 채 내려다봤다.
“응, 내가 봤어. 변신하는 거. 근데 씨엘, 왜 거기에 무릎 꿇고 있어? 얼른 이리로 와.”
아빠와 같이 자지 않은 날부터 씨엘은 내 침대 한쪽을 차지했다. 그렇기에 평소처럼 빈 공간을 팡팡 두들기며 말하자 씨엘이 훌쩍 올라왔다.
“어, 으음…… 상당히 크구나.”
해군과 싸우고 있을 땐 다급해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지금 자세히 보니 상당히 컸다. 항상 나보다 훨씬 작은 씨엘만 보다가 큰 씨엘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씨엘, 원래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던 거야?”
끄덕끄덕-
씨엘이 인간형이 되었음에도 난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평소 씨엘이 하는 것만 봐서는 사람이 고양이로 둔갑한 것 같았다. 게다가 분홍 젤리 발바닥에 침까지 묻혀 가며 책을 넘기거나 연무장으로 가서 기사들의 훈련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마치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인간형의 씨엘이 낯설지 않았다.
“씨엘, 혹시 말은 못 하는 거야?”
도리도리-
이제껏 고갯짓만 하는 씨엘에 조금 답답해진 나는 녀석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아빠와 오빠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내가 있으니까 말해도 돼. 어느 누구도 씨엘한테 뭐라고 하지 못해. 씨엘은 내가 위험할 때마다 곁에서 지켜 준 기사님이잖아.”
“…….”
“할 말 있으면 다 해. 응? 내가 다 들어 줄게.”
씨엘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씨엘이 내 손 안에서 꼼지락대며 말했다.
“라피, 좋아해.”
순간 방 안에 있는 이들은 충격이라도 받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눈만 부릅뜬 채 씨엘을 노려봤다. 하지만 씨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근데 라피는 너무 무모해. 라피는 나랑 가족들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딴 사람을 구할 생각만 해.”
“아…….”
“그래서 더 좋긴 하지만, 그래도 때론 곁에 있는 나랑 가족들 생각을 해 줬으면 좋겠어. 라피가 다치거나 잘못되면 난 더는 살아갈 수가 없어.”
글썽글썽-
눈물을 매단 채 말하는 씨엘의 안쓰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녀석의 눈가를 꾹꾹 눌러 줬다.
“미안해, 이번엔 나만을 위해 살려고 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잘 안 되네. 그러니까 울지 마. 앞으로는 항상 조심할게.”
“그럼 약속해 줘. 절대로 위험한 일에 휘말리지 않기로.”
그게 원한다고 그리되는 건 아니지만 씨엘이 울지 않길 바라며 녀석이 내민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었다. 손가락 약속을 하자 씨엘이 내 손을 다른 손으로 꼭 잡은 채 입술 도장을 찍었다.
“이모!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벌건 대낮에 외간 남자, 그것도 동물이었던 놈이랑 손을 잡고 약속을 하다니!”
콜린이 씩씩댔다. 아카데미에서 방학만 되면 우리 집으로 쪼르르 와서 여전히 결혼해 달라고 조르던 녀석이었다. 분명 결혼은 안 된다고 말했건만 조금만 더 있으면 멋진 남자가 될 거라면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아카데미로 갔다.
그랬던 콜린 앞에 갑자기 나타난 씨엘은 불편한 존재이리라.
“뭐긴, 미래의 네 이모부 되실 분이지.”
“이모, 재미없는 농담이야.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들?”
내 농담에 콜린이 이번엔 에이든과 제이든을 보며 물었다. 하나같이 씰룩씰룩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자 이젠 오빠를 봤다.
“외삼촌이랑 외할아버지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해요?”
“당연히 안 될 일이지. 근데 너랑도 안 돼.”
“칫! 안 돼요. 전 무슨 일이 있어도 이모랑 결혼할 거라고요.”
아카데미에 가서 배울 것은 다 배운 주제에 아직 촌수에 관해 배우진 못한 건가. 사반나 제국법에 6촌 이내는 결혼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나와 콜린은 엄연히 3촌이었다. 결혼을 못 하는 촌수였건만 녀석은 네 살 아이처럼 떼를 썼다.
덩치는 산만 한 녀석이 말이다.
“콜린이 말했다시피 나도 반대야. 아무리 씨엘이 고양이 시절에 처제를 도와줬다고 해도 감정 문제는 다르니까. 갑자기 결혼이라니, 절대 안 될 말이지.”
“매형의 말이 옳습니다. 갑자기 인간이 되었다고 콜린의 이모부라니, 라피! 기절했다가 깨어나서 아직 제정신이 아닌가 보구나. 얼른 집으로 가서 요양하자꾸나.”
형부와 오빠가 강하게 거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내게 약혼자가 없는 이유가 아빠와 오빠가 매우 강하게 막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혼담을 청하는 편지가 집으로 산더미처럼 쌓이는 중이었다.
심지어는 실베스터 왕국에서도 종종 청혼서가 오곤 했다. 어린 내 모습을 보고 반한 실베스터의 귀족이 제 아들과 결혼시키려고 시도하는 중이었다.
“아버지, 이젠 라피도 어느 정도 컸으니 전속 기사를 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내 전속 기사는 씨엘인데.”
“저 녀석은 고양이잖아.”
“무슨 소리야. 씨엘은 엄연히 실베스터 왕국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출신성분도 모르는 녀석을 우리 집에 받아들일 수 없어.”
내가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다 들어주던 오빠가 처음으로 거절을 했다. 오빠 마음을 이해하지만, 이제껏 나와 함께 생활한 씨엘이 인간이 되었다고 내쫓는 것은 안 될 말이었다.
“다들 씨엘이 갑자기 인간이 되어서 놀란 것은 이해해.”
“근데 우리 호박떡은 왜 덤덤한 거야? 가장 놀라야 할 사람은 우리 라피인데.”
“어, 그게 말이야. 사실은 씨엘이 하는 행동을 보면 고양이 같지가 않았거든. 그래서 안 놀랐어. 씨엘이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계속했으니까.”
“그런데도 씨엘이랑 같이 잔 거니? 씨엘이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너보다 적거나 동갑일 수도 있는데.”
새끼 고양이 시절부터 내가 키웠으니 오빠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씨엘에게 물었다.
“씨엘은 몇 살이야?”
“라피랑 몇 달 차이 나는 열여섯 살.”
난 몇 달 후면 열여섯 살이 되지만 씨엘은 이미 생일이 지난 열여섯 살 즉 나와 동갑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같은 남자랑 한 침대에서 자다니!”
“그런 것으로 따지면 나는 씨엘 외의 사람한테 결혼하면 안 되겠네. 씨엘이랑 매일 동침했으니까.”
“라피, 오빠를 계속 놀릴 거니?”
오빠가 조금 씩씩대며 목소리를 높이자 옆에 있는 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곤 움츠러든 씨엘의 어깨를 다독였다.
“난 네가 누군지 모르지만 우리 라피를 살뜰히 지켜낸 것은 안다. 그 대가는 아버지가 치러 주실 거야. 그래서 말인데 넌 대가를 받고 떠나고 싶니?”
“아니요. 라피의 곁에 계속 있을 겁니다. 라피가 저를 구해 줬으니까 끝까지 제가 그녀를 책임질 겁니다.”
“호오, 그 마음가짐 하나는 정말 만점짜리네. 한데 아버지가 뭐 하시는 분이시지?”
부모 없이 태어난 존재는 없었다. 그렇기에 언니가 씨엘에게 아빠를 묻자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하늘나라에 계십니다.”
“뭐? 그럼 아비도 없는 놈이잖아. 그런 놈이랑 우리 라피를 엮어 줄 수는 없…….”
“유진! 그런 걸로 따지면 우리는 어미 없는 놈이야. 감히 부모가 없는 것 가지고 논하면 안 되지.”
순간 발끈한 오빠는 언니의 한 마디에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씰룩댔다.
“그럼 어머니는 계시느냐?”
“네.”
이번엔 아빠가 물었다. 아무래도 내 곁에 있었던 녀석이니 그래도 부모가 누군지는 알고자 하는 듯했다.
“어머니는 어디에서 뭐 하시는 분이시지? 네 어머니가 행상을 하든 농사를 짓든 신경 쓰지 않으니 말해 보거라. 어찌 직종에 귀천이 있겠느냐.”
아빠는 평소에 하지 않은 배려라는 것을 해 주며 씨엘에게 물었다. 그 물음에 씨엘의 황금색 눈동자가 빛이 났다.
“서부에서 공작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어? 뭐?”
“서부의 미네르바 루피노 공작님이 어머니가 되십니다.”
순간 방 안에 있는 가족들의 입이 바닷물을 만난 조개처럼 쩍 벌어졌다. 물론 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