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122)화 (122/164)

122화. 

“라, 라피! 안 돼. 위험해. 라피? 라피!”

에리카가 애타게 외쳤지만 라피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홀로 안전처에 남겨진 에리카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라피, 돌아와! 안 돼! 네가 거기 안 가도 다 처리될 수 있을 거야. 제발…… 나 좀 살려 줘.”

그랬다. 라피가 남부로 휴가를 오고자 하자 에리카와 제롬이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절대 안 된다며 길길이 날뛴 판테르 공작에게 라피를 안전하게 지키겠다며 호언장담을 한 지가 바로 얼마 전이었다.

라피에게 생채기라도 생긴다면 아버지가 자신들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라피가 누구란 말인가. 바로 새어머니 세라피나가 남긴 마지막 보물이었다.

“어, 어머니…… 저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아녀자는 이럴 때 괜히 끼어들면 민폐를 끼친다고 어렸을 때 친모가 해 준 말이 떠올랐다.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고 아버지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향하자 딸을 학대한 친모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퀼라 공작부인이 된 이후로 친모가 가끔 연락을 했지만, 에리카는 단 한 번도 답장을 준 적이 없었다. 대부분 용서를 비는 편지였지만, 도와 달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자신이 도와 달라고 빌고 빌 땐 신경도 안 쓰더니, 이제 친정이 몰락하니 의지할 곳이 없었던 친모는 아퀼라 공작가 쪽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판테르 가문에는 차마 줄을 댈 수 없었던 친모의 애타는 편지는 불쏘시개가 되어 사라졌다.

“어, 어머니…… 아니 엄마!”

친모가 이혼당해 쫓겨난 이후로 온 새어머니 세라피나를 떠올렸다. 항상 어머니라고 부르면 늙어 보인다며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던 세라피나의 다정한 목소리가 기억났다.

새어머니와 똑 닮은 제 동생을 볼 때마다 안타깝고, 한편으로 기뻤다. 자신과 처음 만난 시절의 세라피나가 나이 먹어 가는 모습을 가까이 볼 수 있기에 다행으로 여겼다.

한데 그 동생이 저를 두고 안전처를 나가 버렸다. 이제 햇병아리 마법사인 주제에 말이다. 제 능력으로 마법사가 된 존경해 마땅한 동생이 나가자 에리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세라피나는 가족이 없는 곳에서 외롭게 전사했다. 그 후 4년 만에 유언이 된 편지가 도착했다. 그걸 읽고 라피를 안은 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제 목숨을 바쳐 아이를 놓지 않은 세라피나가 준 귀한 선물이자 보물인 라피를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라피나가 죽어갈 때 도와주지 못했던 에리카는 이번만큼은 라피를 살려내야만 했다.

한동안 세라피나에게 빌고 빌며 라피를 도와 달라고, 살려 달라고 기도했다. 그 와중에 병장기 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분명 이곳은 안전처라 상당히 안쪽에 위치한 곳인데 이곳까지 소리가 들릴 정도면 바깥은 아비규환일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검술이라도 제대로 배워 둘걸.”

후회는 언제 해도 늦었다. 판테르 공작가는 기사 가문이었다. 아직 유진이 태어나지 않아 유일한 후계자였을 때, 아버지는 검을 배울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원한다면 배울 수 있게 해 준다고 했지만, 당시 반항심이 일었던 에리카는 검술을 배우지 않았다.

“역시 부모님께 반항해 봤자 남는 건 무능한 내 자신이네.”

검술 대신 행정과 경제 쪽을 배운 에리카는 이럴 때 제가 배운 게 쓸모없다는 것에 탄식했다.

“후우, 정신 차려. 그리고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떠올려. 제발!”

지금 라피는 목숨을 걸고 갑판으로 올라가 싸우는 중이었다. 제 귀한 동생도 싸우는데 언니가 되어서 안전처에 얌전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미안, 제롬……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요. 이곳에서 안전하게 있길 바라겠지만, 판테르 공작가의 여식들은 무슨 일이든 절대로 피하지 않아요.”

에리카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절대 열지 말라고 했던 문을 라피처럼 스스럼없이 열었다. 아직 이곳까지 해적이 오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해군이 무작정 밀리진 않은 듯했다.

“라피, 언니가 갈게. 잠시만 기다려!”

갑판으로 가는 중에 무기가 될 만한 게 없는지 문이 있는 선실은 다 열어 봤다. 그러다가 우연히 식당으로 들어갔다. 한데 그곳엔 안타깝게도 식칼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주방 담당 해군이 식칼을 뽑아 들고 나간 게 분명했다.

깊이 심호흡을 하며 다시 식당을 둘러보다가 적당한 크기의 프라이팬이 보이자 우선 집어 들었다. 그러곤 곧바로 갑판 위로 올라갔다.

라, 라피!

소리 내어 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안 될 상황이었다. 라피의 목에 단검을 들이댄 해군 제복을 입은 남자를 보자마자 에리카의 두 눈이 뒤집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 동생의 귀한 피에 이젠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저 인간을 직접 어쩌지 못하면 천추의 한이 될 것 같았다. 조심히 달려간 에리카는 남자의 대가리를 힘껏 프라이팬으로 올려붙였다.

순간 박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신을 타동시킬 정도의 진동에 남자는 막힌 혈관까지 경쾌하게 뚫린 탓인지 그대로 쓰러졌다.

“어디 감히 내 귀한 동생한테 칼을 겨눠. 이 미친 새끼가! 판테르 가문의 여식이 호락호락할 줄 알아! 이 새끼들을 확 마!”

평소 영지를 돌아다니며 영지민들을 볼본 탓에 그때 배운 말을 거침없이 내뱉으며 씩씩댔다.

터엉-

쓸모를 다한 찌그러진 프라이팬을 던진 언니는 곧장 내게 달려와 손수건으로 목을 감쌌다.

“라피! 괜찮아, 언니가 왔어. 언니가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 근데 저건 뭐니?”

언니의 물음에 그곳을 보자 어느새 쓰러진 해군의 망토를 허리에 두른 까만 머리카락의 황금색 눈동자의 남자가 서 있었다.

“어, 그러니까…….”

내 눈으로 보고도 못 믿을 광경이었다. 찰나였지만 고양이 씨엘이 인간으로 변하는 것을 매우 자세히 보고 말았다. 그리고 인간형으로 변한 그의 몸엔 아무것도 걸쳐져 있지 않았다는 것도. 

날것 그대로 보고 놀란 나는 두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씨, 씨엘?”

끄덕-

“정말 씨엘이야? 내 고양이 씨엘?”

끄덕끄덕-

고양이가 인간이 되었다는 것에 해군은 물론이고 해적도 놀라 경악을 금치 못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씨엘의 사정을 들을 때가 아니었다. 우선은 이것들을 한 번에 쓸어내야만 했다.

“형부!”

공작님답지 않게 정신을 빼놓고 있던 형부는 내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씨엘, 저 사람들 다 쓰러뜨…….”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씨엘은 나를 겨눴던 이가 든 단도를 들어 올리더니 제 혀로 내 피를 쓱 닦아냈다. 순간 소름 끼치도록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야 옳았지만, 녀석의 훌륭한 얼굴과 몸매가 그걸 정화시켰다.

샤샥 샤샤샥-

법보다 주먹이 빠른 법이라고 했던가. 씨엘은 인간이 낼 수 없는 속도로 뛰어 정확히 해적의 급소를 노렸다. 엄청난 속도와 정확도로 해군들 사이에 있는 해적들을 솎아냈다.

자신과 싸우고 있던 해적이 갑작스레 쓰러지는 것을 보고 놀라 두 눈을 부릅뜬 해군도 더러 있었다.

씨엘이 해적들을 손보고 있을 때 나 역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워터 퀘이크!”

이젠 해적이 아닌 곳에 제대로 신경 쓸 수 있었던 나는 마법을 시전했다. 해군 함정 옆에 붙은 해적선을 물의 떨림을 이용해 어느 정도 떨어뜨렸다. 물론 해군 함정도 워터 퀘이크의 영향력에 의해 흔들려서 다수가 쓰러지거나 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파이어 애로우!”

“윈드!”

함정에서 해적선을 떨어뜨린 나는 커다란 불화살을 만들어 날렸다. 고농도의 산소가 그득한 바람을 불어넣어 주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큼직하게 변해 해적선에 꽂혔다.

굉음과 동시에 해적선은 곧장 불타올랐다. 그 방법을 이용해 다른 해적선들도 불태워 버렸다.

“후우, 이제 한 척 남았어. 한 척 남았으니까…….”

마나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곧 있으면 고갈되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틈이 없었다. 지금 일망타진해야 미래가 좀 밝아질 것 같았다.

마나를 쥐어짜며 마법을 시전하려고 할 때 갑자기 팔찌가 반짝 빛이 나는 듯했다. 햇볕에 닿아 반사된 건가 싶어 무시하며 마나를 억지로 끌어올리자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어, 아, 안 되는데…….”

“라피!”

온몸에 힘이 쑥 빠지면서 시선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뒤에서 언니가 놀라 외쳤다. 그러자 해적들을 솎아내던 씨엘이 이쪽으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라피!”

씨엘이 애달프게 라피를 부르며 쓰러지는 조그만 몸뚱이를 받아들었다. 그러곤 곧장 호흡을 확인했다. 다행히 안정적으로 호흡하는 것으로 봐서는 기절한 듯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이들이 몇 있었다.

“라피!”

“처제!”

얼굴이 새하얗게 들뜬 이들은 곧장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러곤 쓰러진 라피의 상태를 살폈다.

“처제, 이대로 가면 안 돼!”

“제롬!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재수 없는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이 와중에도 창백한 얼굴을 한 에리카가 제롬의 말에 눈을 찌푸렸다. 마치 벌써 라피가 저세상으로 간 것처럼 말한 제롬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하지만 놀란 제롬은 꼬집힘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라피는 괜찮아요.”

“뭐? 진짜?”

“네, 그냥 기절한 것 같습니다만.”

씨엘의 말에 아퀼라 공작은 급히 하나뿐인 처제의 가슴 위에 손을 올리려다가 두 쌍의 날카로운 시선에 곧장 목에 손을 얹었다.

경동맥이 매우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으로 봐서는 당장 문제 될 건 없었다. 하지만 라피가 깨어나지 않자 걱정이 앞섰다.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라피를 보며 원인을 찾으려는 아퀼라 공작을 본 씨엘이 나직하게 말했다. 

“얼른 해적들을 쓸어 버리시지요. 이런 기회가 흔치 않을 건데요.”

분명 많은 해적의 목을 땄지만, 제 몸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씨엘을 본 아퀼라 공작은 뒤를 봤다. 승기가 이미 기울었다. 게다가 저 멀리서 해군 함정이 오는 게 보였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끝이 났군.”

해적 대장으로 보이는 이는 이미 씨엘에 의해 쓰러져서 꿈틀댔다. 특별히 목이 아니라 쥐방울만 한 땅콩을 터트린 씨엘이었다.

“넌 대체 정체가 뭐지? 수인인가?”

전설 속에 존재하는 수인이냐는 물음에 씨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쓰러진 라피만 끌어안으며 절대 놓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아퀼라 공작은 곧장 품에서 작은 통신구를 꺼냈다.

라피에게만 휴대용 통신구가 있는 게 아니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티그리스 공작이 몇 개 넣어 줬던 통신구를 쥐었다. 이 통신구는 마나가 필요하지 않았다. 물론 마나를 사용하는 이가 쥐면 얼굴까지 세세하게 볼 수 있었지만 마나가 없는 이는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지금 연락받고 그곳으로 가고 있네만, 대체 무슨 일인가!]

티그리스 공작의 노여움이 담긴 목소리에 아퀼라 공작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해적이 공격해 왔고, 지금은 거의 진압이 된 상태입니다. 한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혹시 내 손녀들에게 문제라도 생긴 건가?]

손녀 걱정에 순간 목소리가 누그러진 티그리스 공작의 물음에 아퀼라 공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티그리스 공작에게 라피의 상태를 알려 주면 당장에 달려와서 함정마저 불태워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사실을 숨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깊은숨을 들이마신 아퀼라 공작은 두 눈 딱 감고 말했다.

“처제가 갑자기 마법을 쓰다가 쓰러졌습니다. 이 일을 어찌합니까.”

[어? 아! 그건 걱정하지 말게나. 내가 준 팔찌 때문일세. 착용자의 마나가 고갈되기 직전이 되면 더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기절시키는 팔찌거든.]

순간 아퀼라 공작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런 건 공유하셔야지요. 전 처제가 죽은 줄 알고 걱정했단 말입니다.”

판테르 공작에게 처맞고, 에리카와 콜린에게 쫓겨날 것 같은 미래에 바들바들 떤 아퀼라 공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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