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119)화 (119/164)

119화. 

열다섯 살의 여름-

가만히 있어도 나이만 먹어서 배가 부른 나는 해안가의 나무 그늘에 놓인 의자에 반쯤 누워 바닷바람을 고스란히 맞이했다.

뜨거운 여름임에도 바닷가는 시원하기만 했다. 새하얀 모래사장은 석영이 갈려 햇볕에 닿아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 좋다. 그렇지? 씨엘.”

뀨우우.

더워서인지 씨엘은 늘어진 흑임자 떡이 되어 내 옆에 누운 채 푹 퍼질러졌다. 대답하는 것도 상당히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그런 씨엘의 머리를 쓰다듬자 평소처럼 내 손에 제 머리를 비비적댔다.

“여기가 천국이었어. 왜 나는 이제껏 이런 걸 모르고 있었을까.”

“그거야 우리 인절미 처제가 판테르 공작저와 티그리스 공작저에서 살다시피 해서 그런 게 아닐까.”

마침 가벼운 옷차림의 형부가 옆으로 와서 빈 의자에 몸을 뉘었다.

“나름 마법사가 되려고 열심히 노력했답니다. 오늘은 그 결실을 본 것에 대한 대가랄까요.”

얼마 전에 난 정식으로 마법사가 되었다.

“그때 정말 험난하지 않았어?”

“허허, 말도 마세요. 전 진짜 무슨 전쟁 터지는 줄 알았어요.”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마법탑과 티그리스 가문, 둘 중 한 곳의 승인을 받아야 가능했다. 물론 두 집단이 보는 가운데 정당한 시험을 봐야 한다.

마법사의 시험을 위해서만 개방되는 곳이 있었다. 그곳엔 온갖 종류의 실드가 쳐져 있었다. 비록 두 집단으로 나뉘었지만 그들의 마법은 어딜 가서든 뒤처지지 않았다.

본래 나는 더 어렸을 때도 시험이 가능했지만, 할아버지가 최대한 미루고 미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마법탑의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특별 과외까지 해 주셨다.

그 결과 할아버지와 셀레스 백작의 합격점을 받고서야 일 년에 한 번씩 연다는 시험을 보러 갔다.

각 집단에서 직접 키운 초보 마법사들이 순서에 따라 마법을 시전했다. 더러는 긴장해서 마법을 제대로 하지 못해 떨어지는 이들도 있었다.

마법탑 측의 마법사가 나와서 시험을 보면 티그리스 공작가에서 고개를 저었다. 그 반대로 티그리스 공작가에서 키운 마법사가 나오면 역시나 마법탑 측에서 절대 안 된다며 거절 의사를 보냈다.

‘저런 놈도 마법사랍시고 티그리스 공작가에서 시험을 보라고 보낸 건가. 쯧쯧.’

‘저거 흔들리는 거 보소. 컨트롤도 못하는 놈이 마법사를 한답시고 여길 오다니, 마법탑도 한 물, 아니, 두 물 갔군 그래.’

‘뭐라고? 그러는 너흰 뭐가 그리 잘났어.’

‘너희보단 잘났다. 이 저질 체력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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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끼리 싸움이 붙어 마법이 난무했지만, 다행히 각 집단의 시험관들 앞엔 실드가 쳐져 있었다. 각자 집단에서 던진 마법이 상대방을 덮치는 일은 없었다.

쾅, 쿠앙-

시험 보기도 전에 시험장이 망가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들은 막말을 서슴없이 사용했다. 덕분에 두 집단의 골이 엄청나게 깊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전쟁이 터진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자욱하게 주변을 감쌌다.

이러다가 진짜 전쟁하는 건 아닌 건가 싶다가도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러곤 근엄한 표정으로 다음 순서를 알렸다.

‘됐고, 다음 나오게.’

그때야 다음 시험자가 나라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두 집단을 사이에 둔 채 나는 양쪽에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세라피나라고 합니다.’

마법사 시험을 볼 땐 성을 말하지 않는 게 관례였다. 만약 귀족이라면, 그 가문의 이름만으로 시험관을 압박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문제라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외가의 핏줄임을 그대로 드러내는 외모는 마법탑 측의 인상을 절로 찌푸려지게 했다.

이게 시험인지 아니면 난장판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정해진 시험에 응했다. 처음엔 마법탑 측에서 무조건 불합격이라고 외쳤지만, 나중엔 잠잠해졌다. 그들의 뒤엔 모르간 후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간 후작이 두 눈을 부라리며 쳐다보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난 합격을 줌세. 저 나이에 저 정도의 성취를 이룬 것을 보니 우리 마법계의 앞날이 밝아지는 것 같군.’

처음으로 마법탑 측에서 칭찬의 말이 나왔다. 정확히는 모르간 후작이 먼저 말했다.

‘뭐 어린 나이에 성취력이 대단하군요.’

‘누가 핏줄 아니랄까 봐. 티그리스 가문이 오늘만 조금 부럽군. 내 손녀는 같은 나이인데 이제야 손톱만 한 파이어 볼을 잠깐 만드는 게 고작인데.’

그날 처음으로 두 집단의 승인이 동시에 떨어졌고, 어느 누구의 반발도 없이 나는 마법사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마법사가 된 기념으로 나 스스로에게 그간 힘들게 공부해 온 대가로 휴가를 줬다. 물론 아빠랑 오빠가 펄쩍 뛰면서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본인과 함께 가면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난 두 사람의 말을 깨끗하게 거절했다. 대신 형부와 언니가 있는 지역으로 간다고 하며 남부의 관광 도시로 휴가를 왔다.

문제라면 내가 언니에게 남부를 관광할 거라며 몇 군데를 추천해 달라고 했을 뿐인데 두 사람이 딸려왔다는 거다. 무려 아퀼라 공작과 공작부인이 내 휴가에 동참한 것이다.

본래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아퀼라 공작가의 보좌관들은 피눈물을 흘렸다.

“언니는요?”

“에리카는 지금…… 저 미친놈들이!”

항상 내 앞에서는 되도록 예쁜 말을 골라 하는 형부의 입에서 상스러운 소리가 터졌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을 보니 그곳엔 얇은 옷차림의 언니가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있었다.

자연스레 바닷바람에 까만 머리카락이 찰랑찰랑 흔들렸고, 관광 온 남자들이 작업을 걸었다.

형부의 눈에 불똥이 튄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언니가 웃으면서 그 남자들의 말을 다 들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내 휴가에 살인이 날 것 같았기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한 몸 불살라 언니에게 뛰어가 안기며 말했다.

“엄마!”

“어, 엄마?”

아직 조금 덜 큰 처자가 엄마라고 부르자 그때야 추근대던 남자들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솔직히 말해서 언니가 내겐 엄마뻘이라고 해도 맞는 표현이었다. 언니가 낳은 콜린이 나보다 한 살 위니까 말이다.

“이렇게 큰 아이의 엄마…… 크흠, 시, 실례했습니다. 부인.”

작업을 하던 남자들은 나와 언니를 보더니 곧장 자리를 이탈했다. 탁월한 선택을 한 남자들은 오늘 제 목이 떨어지지 않은 게 천운임을 모를 것이다.

“라피, 갑자기 엄마라니.”

“내가 나서지 않았으면 형부가 저놈들 썰어 버릴 예정이라서요. 내 휴가에 피 보는 것은 사양하고 싶어요.” 

주먹 쥔 손에서 엄지만 빼서 뒤를 슬쩍 가리켰다. 그곳을 본 언니는 픽, 웃었다.

“네 형부가 사십대가 되면서부터 의처증이 생겼단다.”

“그게 다 젊은 아내를 둔 나이 많은 남자의 숙명이 아닐까요.”

“풉! 맞아. 우리 동생은 역시나 똑똑하다니까.”

언니와 형부의 나이는 아홉 살 차였다. 삼십대 중반이지만 아직도 이십대처럼 젊어 보이는 언니를 보는 사십대 중반의 형부의 눈동자는 불안하기만 했다.

“우리 라피는 신랑감을 데려올 때 나이를 보려무나. 나이 차이가 나는 남자는 안 돼. 네 형부처럼 늘그막에 저렇게 변할 수 있으니 말이야. 뭐 아버지처럼 동안이면 좀 봐 줄 만은 하지만.”

뀨우, 뀨우.

언니의 말에 씨엘이 동의하듯 고개를 까닥까닥 움직였다.

“라피의 곁에 있더니 씨엘도 많이 보고 배운 것 같네. 자! 이제 가자.”

강렬한 햇볕을 맞고 있던 우린 곧장 나무 그늘로 향했다.

“에리카, 방금 그놈들과 무슨 이야기를…….”

“별것 아니었어요. 그냥 같이 놀자는 말에 안 된다고 말했답니다. 그 와중에 우리 라피가 와서 자연스럽게 헤어졌어요.”

해안가에서 거닐며 자신이 아퀼라 공작부인을 밝히지 않은 언니였다. 한 번쯤은 공작부인이 아닌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지금 실행하는 중이었다.

“신분을 숨긴 상태라지만 눈웃음 지으면서 말하니 그놈들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거 아닙니까.”

약간 못마땅한 투로 말한 형부를 본 언니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당신은요. 저랑 같이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린 영애들이 붙어 눈웃음 살살 지으며 말하니까 당신도 웃으면서 받아 줬잖아요.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었으면서.”

언니의 말에 형부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끽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언니의 말이 사실인 듯했다.

“대 판테르 공작가의 영애와, 그것도 아홉 살이나 어린 영애와 혼인신고 하고는 딴 여자랑 바람만 안 피웠다 뿐이지 이야기할 것 다 해 놓고는…… 라피! 넌 절대 형부 같은 남자 만나지 말렴.”

“네.”

이 순간 왜냐고 묻는 순간 언니에게 잔소리 폭격을 들을 것 같은 나는 눈치껏 대답했다.

“내가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 여자들이 와서 이야기하는데 밀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다 받아 주지 않아도 되었잖아요. 사교계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아내를 두고 딴 여자들이랑 희희낙락한 게 뭐 그리 잘했다고 지금 말하는 건데요.”

“에리카,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자꾸 꺼내는 겁니까. 대체 이게 몇 번째인가요. 이제 그만 좀 하세요.”

“그만 좋아하시네요. 전 더 할 건데요. 제가 그때 얼마나 상처받았는데요.”

평소 잉꼬부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언니와 형부의 부부 싸움을 처음 본 나는 씨엘을 안은 채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지만 이 순간만큼은 살이 갈리고 뼈가 끊어질 것 같았다.

비록 언니는 정식으로 기사 수업을 받진 않았다. 하지만 판테르 가의 사람인 만큼 골격이 보통 사람보다 튼튼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무거운 검을 들고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 언니의 손에 지금 검이 없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안 그랬다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 하나를 죽여 버릴 것 같으니 말이다.

싸우는 부부를 두고 얼른 호텔로 돌아온 나는 직원이 받아 놓은 미지근한 물로 씻은 후 침대에 누웠다.

“어휴, 왜 내 휴가에 따라와서 싸우는 거야.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부부 싸움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절대로 저렇게는 안 살 거야.”

뀨우우웃.

옆에서 몸을 쭉 늘린 씨엘은 내 옆으로 오더니 팔을 꾹꾹 눌러줬다.

“우리 씨엘, 벌써 외조하는 거야?”

뀨우, 뀨우.

씨엘을 보며 우스갯소리를 한 나는 하품을 하고는 그대로 늘어져 버렸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오후를 침대에서 뒹굴며 즐긴 나는 다음 날 화해한 부부와 함께 이동했다.

목적지를 알려 주지 않고 무작정 옷을 입고 나오라는 통에 대충 세수만 하고 나와 마차를 탔다. 평상복을 입은 채 비밀 호위를 하던 아퀼라 공작가의 기사가 제 모습을 드러낸 채 호위를 했다.

내 시선을 요리조리 피한 형부와 언니를 보니 무슨 일이 생기긴 생긴 모양이었다. 물어도 대답 없는 이들을 보던 중 마차가 멈췄다.

“다 도착했습니다.”

형부가 문을 열고 내린 후 손을 내밀자 언니와 내가 차례대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곳에서 난 보았다. 멋들어진 크기의 해군 함정을 말이다.

한데 내 휴가 계획엔 이런 게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미간을 슬쩍 찌푸리자 해군 제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각 잡힌 모습으로 걸어 나와 인사했다.

“아퀼라 공작 내외분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제1 함정의 함장인 엘리엇 헤인스 자작입니다. 오늘 아퀼라 공작 내외분을 모시게 되어 정말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음? 분명 이곳에 온 것은 절대적으로 비밀인데. 저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아퀼라 공작 부부의 휴가는 절대 비밀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언니와 형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는 시선에 형부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사실 어제 부부 싸움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들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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