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내겐 다행히 안면인식 장애가 없었다. 분명 얼마 전에 오빠랑 같이 데이트하다가 나와 부딪친 인물이 틀림없었다. 그땐 남장을 해서 억지로 목소리를 바꿨지만, 오늘 처음 제대로 된 모습을 본 나는 거침없이 불렀다.
“어, 으음…… 라, 라피?”
“네, 린 오빠…… 아니 린 언니라고 불러야 할까요.”
내 물음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구두를 신고 이쪽으로 오더니 옆에 앉았다.
“그땐 피치 못한 사정 때문에 남장을 했었단다. 라피, 아니 세라피나 판테르 양이 맞지? 그땐 몰랐는데 지금 보니 알 것 같아. 판테르 영애 곁엔 항상 까만 고양이가 있다고 했으니.”
어느새 존재감 없어진 씨엘은 나와 한 세트가 되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듯했다.
“그러는 언니는 이름이 뭐예요?”
“나? 으음, 조슬린 니콜라이야. 허슬러 니콜라이 백작이 내 아버지이시고.”
“아항, 그렇구나.”
말은 이렇게 했어도 니콜라이 백작이 누군지 나는 알지 못했다. 아빠가 굳이 귀족가의 이름을 알지 못해도 된다고 했다. 알아서 인사하러 올 테니까.
“귀한 판테르 영애가…….”
“라피라고 불러 달라고 했잖아요.”
“어, 응. 라피가 바깥에 나가도 공작님이 뭐라고 안 하셔?”
“네, 가족들이랑 돌아가면서 바깥 데이트를 하는 중이거든요. 그래서 좀 지겨운 면이 없지 않아요. 같은 곳을 여러 번 돌아다녀야 하니까요.”
이젠 사하라를 눈감고 돌아다녀도 길을 알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 정도로 나는 사하라 토박이를 제외하고는 많이 돌아다닌 귀족이 되었다. 비록 알아봐 주는 이가 아무도 없지만.
“와! 진짜? 부럽다. 난 아버지랑 바깥 데이트를 해 본 적이 없어. 아카데미의 개구멍으로 탈출해서 주말을 즐기기도 하지. 아! 이건 절대 비밀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저 입 무거워요. 그리고 우리 씨엘도요.”
냐오옹.
기지개를 켜듯 온몸을 쭉쭉 뻗은 씨엘이 다시 식빵을 구우며 입을 크게 벌렸다. 녀석의 등을 쓰다듬어 주자 내 손에 제 머리를 비비적댔다.
“라피는 좋겠다. 반려동물도 키우고…… 우리 집은 이것저것 다 금지거든. 특히 털 있는 동물을 혐오해서 키우지 못해.”
예전에 버려진 강아지가 있어서 데려갔다가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났다고 말한 조슬린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 답답하겠어요.”
“응, 정말 답답해. 그래서 아카데미에 다니는 중이야. 최소한 그곳은 아빠와 언니의 입김이 닿지 않으니까.”
자유를 위해 아카데미에 다닌다는 조슬린의 얼굴엔 티 없는 맑은 미소만 그득했다.
“아카데미에서 혹시 검술 배워요? 저번에 손에 굳은살 박여 있던데.”
“응, 맞아. 아버지는 손이 못나진다고 배우지 말라고 하지만 내 뜻을 꺾지 못하셨지.”
귀족가의 귀한 여식이 검술을 배운다면 당연히 못 하게 할 게 분명했다. 곱게 키워 시집보내 세력을 넓히는 게 첫 이유인데 손에 굳은살이 박이면 안 되니 말이다.
예쁘게 치장한 채 신부 수업을 받고 아버지가 원하는 혼처로 시집가는 게 이 나라의 귀족 여식의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런 제 운명을 살짝 비튼 조슬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기사 서임을 받은 후 어디로 가실 건가요? 집안의 기사가 되진 않으실 거고.”
“당연하지. 안 그래도 언니가 나를 경계하는데…… 아! 미안, 이건 개인적인 집안일인데 라피에게 말하고 말았네.”
“말씀하셔도 돼요. 저랑 씨엘은 입이 무겁다고 했잖아요. 니콜라이 백작가는 자매 둘만 있는 건가요? 그럼 언니가 집안을 물려받기 위해 동생을 견제하는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하아, 난 언니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나를 못살게 굴었어. 그걸 알면서도 아빠는 내게 언니니까 참으라고만 하고…….”
관심 가져 달라는 뜻의 장난은 아닌 듯했다. 귀한 화병을 깨서 누명을 씌우거나, 툭하면 제 덩치를 이용해 어린 동생을 쥐어박거나 하는 건 도가 지나쳤다.
심지어는 겨울에 동생을 난방이 안 되는 창고에 가둬 두고 반나절이 지나 집안이 발칵 뒤집혀서야 말하는 거 보면 말이다.
자신이 당한 것을 줄줄이 말한 조슬린은 두 손을 힘줘 쥐었다.
“그런데도 무작정 집에서 신부 수업이나 받으라니, 누가 그딴 걸 하겠어. 또 언제 언니한테 공격당할지도 모르는데. 그럴 바엔 내 힘으로 그 집을 떠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대놓고 동생을 괴롭히는 언니와 그걸 보고도 방치하는 아버지를 떠올린 조슬린은 치가 떨리는지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난산으로 나를 낳고 어머니께서 시름시름 앓다가 몇 년 후에 돌아가셨거든. 그래서 아버지는 내게 무심했고, 언니는 그게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
잠시 집안 이야기를 한 조슬린의 눈가가 빨갛게 변했다. 그런 조슬린의 손을 조심히 덮어 감싸 줬다.
“흐음, 린 언니! 우리 집으로 와요. 그럼 린 언니의 언니가 우리 집안까진 들먹이면서 함부로 말하진 못할 테니까요.”
심술로 덕지덕지 묻은 언니라면 조슬린을 고용한 가문에 유언비어를 퍼트려서 해고하게 만들고도 남을 것 같았다. 하지만 판테르 공작저라면 니콜라이 백작이 직접 온다고 해도 아무 말도 못 하리라.
“그렇지만 판테르 공작가의 기사가 되는 건 황궁 기사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들었어.”
“그건 그렇지만 우리 엄마도 그렇게 들어오셨는걸요. 그러니까 린 언니도 할 수 있을 거예요. 도전해 보는 것은 돈이 들지 않으니까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어떻게 전설인 세라피나 경과 견줄 수 있겠어.”
“안 되면 내 이름을 팔아서라도 오세요. 아카데미를 졸업했다면 실력은 갖췄다는 뜻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어떻게 라피의 이름을 대고 들어갈 수 있겠어. 그건 양심 없는 짓이야. 만약 판테르 공작가에 간다면 정당한 시험을 치를 거야.”
내 이름으로 들어온다면 나중에 자신이 잘못하게 되었을 때 내 이름이 더러워질 수 있기에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방긋방긋 웃었다.
성품이 좋아 보인다는 오빠의 말이 맞는 듯했다. 이런 언니가 오빠의 반려가 되어 준다면 정말 좋을 텐데 그건 내가 어찌하지 못할 일이었다.
한동안 계속 이야기할 때 갑자기 몸이 바르르 떨렸다. 아무리 봄이라고 하더라도 아직은 밤의 기온이 차가웠다. 오랜 시간 동안 밖에 있었더니 추위가 느껴졌다. 씨엘을 꼭 안자 조슬린이 제 카디건을 내 어깨에 걸쳐 줬다.
“음? 이건 린 언니 거잖아요.”
“난 괜찮아. 기사가 될 예정이거든. 그러니까 이건 라피가 쓰렴.”
“핏, 기사는 뭐 여자 아닌가요.”
“아닌데, 기사는 성별을 뛰어넘는 존재거든. 남녀 상관없이 똑같이 굴려지고 배우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이건 아직 어린 라피가 하는 게 옳아.”
달빛이 담긴 은은한 청안에 미소가 드리워지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의 기사님이 될 조슬린이 너무나 멋져 보였다. 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기사가 되려 하는 조슬린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는 라피는 뭐 하니? 혹시 신부 수업 같은 거 하니?”
“어, 저는 신부 수업 안 해요. 아빠 말씀에 의하면 신랑 수업할 남자를 데려오라고 했거든요.”
“뭐? 신랑 수업? 크크큭, 아 진짜 웃기다. 한데 판테르 공작가라면 그 말이 잘 어울리네. 어디 감히 우리 라피와 결혼하겠다고 나서겠어. 세 가문이 뒤에 버티고 있는데.”
잠든 정원의 공기를 흔드는 웃음을 지은 조슬린의 말에 품에 안긴 씨엘의 몸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녀석도 추위를 타는 듯했다. 좀 더 씨엘을 꼭 안아 준 나는 씩 웃었다.
“설마하니 아빠랑 할아버지, 그리고 형부가 내 남자를 죽일까요.”
“그건 아닐 거야. 근데 판테르 공작님 정도라면 남자를 죽이고 사고사로 위장하고도 남을지도 몰라.”
“흐음, 그럼 나는 내 남자를 지켜야겠네요.”
“푸흡,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네. 한데 어떻게 남자를 지킬 거야?”
“마법으로요.”
“음? 마법?”
“네, 마법이요.”
나 같은 어린아이가 당당하게 말하기엔 뜬구름 잡는 단어에 조슬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 혹시 라피, 마법 배우는 거야?”
“네!”
“아, 외가가 티그리스 공작가니까…… 외가의 능력을 물려받았나 보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깐이라도 마법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아카데미에선 마법을 가르치지 않아 늘 궁금했다는 조슬린은 내게 열렬한 시선을 보냈다. 순수한 궁금증이 가득한 청안에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파이어 볼.”
추운 날씨에 가장 알맞은 온기를 품은 불 공이 생겼다. 내 주먹 두 개를 합쳐 놓은 듯한 크기였다.
“우, 우와! 대단해. 신기해! 라피는 대마법사였구나.”
손뼉을 치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조슬린을 보니 나도 모르게 어깨에 뽕이 몇 개나 들어갔다.
“대마법사는 아직 멀었지만 어쨌든 이거 언니 줄게요. 물론 조금 있으면 사라지겠지만.”
“어, 어? 이거 만져 볼 수 있어?”
“네, 불 속성은 제 전문이 아니기도 하고 아직 배움이 얕아서 파이어 볼이긴 한데 온도가 높진 않거든요.”
생긋 웃으며 나는 파이어 볼을 조슬린에게 건넸다. 처음엔 뜨거울 것 같아서 무섭다고 했지만 막상 파이어 볼을 쥔 조슬린은 엄청 놀란 표정을 지었다.
“따뜻해. 마치 난로 같아.”
손으로 쥐고 있기에 딱 알맞은 온도인 파이어 볼을 보며 조슬린은 연방 탄성을 질렀다.
“그래도 다음에 만났을 땐 손에 쥐고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뜨거운 파이어 볼을 시전할 수 있길 바랄게.”
“고마워요. 제가 나중에 파괴력이 큰 파이어 볼을 만들 수 있다고 해도, 겨울엔 린 언니를 위해 따듯한 파이어 볼을 만들어 줄게요.”
“정말? 말만이라도 고마워. 마법사가 사람들 앞에서 마법을 보여 주는 걸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여 달라고 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우리 집의 고용인들은 매일 제가 마법 쓰는 거 보거든요. 처음엔 엄청 신기해하더니 이젠 제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 하더라구요.”
“푸하하하, 그게 뭐야.”
어두운 기운을 물릴 정도로 쾌활한 웃음이 사방으로 퍼졌다. 보통 아가씨라면 얼른 웃음을 갈무리했을 텐데 조슬린은 그런 법이 없었다.
할 이야기를 다 하면서 제 감정을 날것 그대로 표현했다. 이런 존재가 집 안에 틀어박혀 있으려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외향성의 조슬린과 긴 시간을 이야기하다가 보니 어느새 친구가 되어 있었다.
비록 나이 차이가 여섯 살이나 차이 났지만, 조슬린은 내게 언니로 불리는 것보다 친구로 있어 주길 원했다. 나 역시 또래의 동성 친구가 없었기에 조슬린의 뜻을 받아들였다.
“라피, 여기 있었니? 얼른 가자꾸나. 아버지의 애간장이 홀라당 타들어 가는 중이란다.”
조슬린과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중도에 온 오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먼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동생과 놀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라피, 작별 인사해야지.”
“린, 담에 봐요.”
“응, 잘 가. 다음에 찾아갈게.”
방긋 웃으며 인사하자 오빠가 나를 안아 올렸다.
“저번에 자유분방한 신사였는데 오늘은 아리따운 레이디가 되었군요. 그럼 다음에 인연이 닿는다면 그때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아, 파, 판테르 경.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역시 오빠도 안면인식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왠지 당황한 듯 보이는 조슬린에게 인사를 한 오빠는 씨엘을 품은 나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많이 친해진 모양이구나.”
“좀 떨어진 곳에서 우리 다 보고 있었지?”
“응, 우리 라피가 혹시 나쁜 친구를 사귀는 건 아닌가 싶어서 걱정되어서 말이야. 한데 저런 분이라면 언제든지 만나도 오빠가 방해하지 않을게.”
오빠도 인정한 조슬린과의 만남은 각자 개인 스케줄 때문에 몇 년을 미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