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다음 날이 되자 아이리스 백작가로 가기 위해 치장을 하느라 공을 들였다. 누가 보면 그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기라도 하는 듯 다들 두 눈에 힘을 줬다.
“으음, 그것은 아니에요. 딴 거, 딴 거!”
화장을 마친 헬레나가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할머니의 품에 안겨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피의 말을 듣지 못했느냐, 얼른 다른 드레스를 꺼내 오도록. 이번에 이곳에 오기 전에 맞춘 옷을 죄다 대 봐야겠구나.”
“히익!”
순간 헬레나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입술 사이에는 헛숨을 들이킨 소리가 들렸다.
“새언니의 드레스를 많이 맞췄어요?”
“그렇단다. 네 할아비 생신에만 옷을 맞추는 게 참 고약하게도 내탕금을 아끼는 손자며느리란다. 그 많은 티그리스 공작가의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저한테 쓰는 것은 소금 같단 말이야.”
그게 못마땅한 할머니는 황실 연회에 맞춰 직접 재단사를 불러 헬레나의 치수를 쟀다. 그러곤 다양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만들라고 명했다. 돈 조금 쓴다고 티 난 것도 아니라고 말이다.
“하, 할머님…… 전 돈에 욕심이 없어요. 단지 돈이 불어 가는 것을 보는 걸 좋아한답니다. 한데 제 드레스와 보석을 맞추면 불어난 돈이 줄어들어서…….”
“돈은 쓰라고 버는 거란다.”
“맞아요. 돈을 벌어들이기만 하고 안 쓰면 내수경제가 흔들릴 거예요. 그러니까 자주 예쁜 옷 입은 거 보여 주세요.”
내 말에 언니의 눈동자가 부정을 뜻하는 듯 흔들렸다. 하지만 곁에 할머니가 계셔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인형놀이를 하는 것처럼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라피가 보기엔 어떠니?”
“후움, 딴 것도 봐야 알 것 같아요. 자! 다음 드레스!”
열 번째 드레스를 갈아입은 헬레나의 얼굴은 벌써 핼쑥해졌다. 그에 비해 주변에 있는 고용인들의 눈동자엔 생기가 돌았다. 언제 이렇게 헬레나의 옷을 갈아입혀 보겠는가. 오늘만 가능한 일이기에 고용인들은 날 잡은 듯 드레스를 계속 가져와 날랐다.
복부에서 가져온 드레스를 전부 입혀 본 나는 그중에서 가장 예뻐 보이는 것으로 골랐다.
“처음에 입어 본 게 제일 잘 어울린 것 같아요.”
“아, 아가씨…… 저를 탈진시켜 죽이려고 하신 거예요? 제가 아가씨께 잘못한 게 있으면 말로 해 주세요.”
고개를 푹 숙인 헬레나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떤 옷이 제일 잘 어울리는지 보려면 다 입어 보고 결정하는 게 맞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네, 아가씨의 말씀이 전부 옳습니다. 호호호호.”
드레스를 들고 서 있는 고용인들이 어깨를 바르르 떨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껏 해 보지 못한 것을 하루에 몰아치기로 한 그녀들은 헬레나의 시선에 모르는 척했다. 얼른 처음 입어 본 드레스를 가져와 헬레나에게 입혀 준 후 물러섰다.
“우리 라피가 보는 눈이 확실하구나. 내 눈에도 그 드레스가 제일 잘 어울려 보여.”
할머니의 말에 헬레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아가씨도 새 옷을 입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갑자기 사악한 표정을 짓는 헬레나를 본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아빠가 보내 준 옷 입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새언니가 걱정해 줄 필요는 없어요. 그렇지? 씨엘.”
꾸우웅.
이곳에 오기 전에 아빠가 아이리스 백작저에 갈 때 입을 옷을 보내 주겠노라고 했다. 그렇기에 헬레나처럼 여러 벌을 갈아입을 필요는 없었다.
똑똑똑-
헬레나가 잔뜩 아쉬워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판테르 공작저에서 라피 아가씨의 옷을 보내셨습니다.”
“들어오거라.”
할머니의 말에 문이 열렸다. 고용인이 곱게 포장된 상자를 가져와 조심히 풀었다. 상자 안엔 검은색 원단에 하얀색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원피스가 담겨 있었다.
“판테르 공작저에서는 누가 우리 말랑 콩떡이 옷을 골라 주니?”
“아빠가 직접 골라 주세요.”
“그렇구나. 우리 사위는 센스가 상당하구나.”
아빠가 골라 보내 준 옷이 마음에 드는지 할머니가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으셨다. 헬레나를 다 꾸민 고용인은 곧장 내게 검은색 원피스를 입혔다. 그러곤 머리카락을 조심히 빗겼다.
“머리를 땋아서 예쁘게 올려 줄게요.”
“네.”
비록 머리 손질은 사비나가 제일 잘했지만, 임신을 한 그녀는 이곳에 오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이곳으로 오려는 사비나를 눌러 앉혔다.
보석 핀으로 고정을 시킨 고용인은 제 할 일을 끝마치고 뒤로 물러섰다.
“우리 손자며느리랑 손녀가 제일 예쁘구나.”
나란히 선 나와 헬레나를 본 할머니는 매우 좋아했다. 몸만 예전 같았으면 본인이 직접 나와 함께 파티장에 갔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안타까운 할머니였다.
“자! 그럼 잘 다녀오려무나.”
“네, 잘 다녀오겠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배웅을 받은 우리는 곧장 마차에 올라탔다. 다들 한 인물 하는지라 마차 안이 환해진 느낌이 들었다.
한 마차를 타고 가는 중에도 입은 쉬지 않았다. 수다를 떨던 이들은 마차가 아이리스 백작저에 도착했다는 말이 들리자마자 곧장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마치 언제 수다를 떨었느냐는 듯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리자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는 나의 가족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어서 오너라. 오늘도 우리 딸은 예쁘구나.”
“아빠, 언제 오셨어요?”
“방금 도착했단다.”
아빠와 하루 만의 재회를 만끽하고 있을 때 옆에서 오빠가 약간 불만인 표정을 지었다.
“우리 호박떡은 오빠는 안 보이나 보네.”
“미안, 오빠는 언제나 자체 발광이라서 눈부셔서 제대로 보지 못했어.”
“어휴, 하여튼 우리 동생은 내가 할 말을 잃게 만든다니까.”
금세 눈꼬리가 낭창낭창한 버들가지가 물결에 휩쓸리듯 곡선을 그린 오빠는 나를 꼭 안았다. 젊었을 적의 아빠를 닮은 오빠는 나를 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빼앗겼다.
“라피, 언니랑 형부 왔단다.”
“우리 인절미 처제는 오늘도 따끈따끈 쫀득쫀득하네.”
오빠의 품에서 빼앗다시피 안은 형부는 제 볼에 내 볼을 비비적댔다.
“여기에서 이러지 말고 얼른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이곳에서 가장 큰 어른인 아빠의 말에 다들 하루 만의 재회를 마치고 아이리스 백작저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아이리스 백작저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판테르 공작님, 그리고…….”
손님맞이에 한창인 아이리스 백작 부부는 우릴 보고 급히 달려와 인사했다. 세 가문이 세트로 다녀서인지 아이리스 백작의 인사말이 길어졌다. 한 번에 호명할 수 없었던 그는 우리와 일일이 눈을 마주하며 이름을 불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하하하, 네 그러하옵니다. 오늘 이곳에 세 가문이 오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해 준비가 미흡합니다. 하오니 너무 욕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내가 보기엔 충분히 화려해 보입니다만, 안 그런가.”
아빠의 질문에 다들 파티장을 한 차례 훅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차린 것은 없으나 즐겨 주십시오.”
“아이리스 백작부인이 고심해 준비를 하셨는데, 우리가 즐기고 나가려다 보니 좀 미안해서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언니가 우리를 대표해서 말하며 뒤에 있는 고용인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벨벳 상자를 아이리스 백작저의 고용인에게 건네줬다.
그 자리에서 뚜껑을 열어 확인한 아이리스 백작부인의 표정이 매우 환해졌다. 남부에서 유명한 갈색 다이아몬드로 만든 물방울 모양의 귀걸이였다. 일명 커피 다이아몬드로 유명세를 탄 원석을 세공해 만든 귀걸이에 아이리스 백작부인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부인이 커피 다이아몬드를 구하고 싶어 했답니다.”
이미 아이리스 백작부인이 이걸 찾는다는 말을 듣고 언니가 구해 온 것이다. 어차피 아퀼라 공작가의 소유인 광산에서 캐내는지라 커피 다이아몬드가 많았다. 전량 판매하지 않아서 수요 조절을 하기에 커피 다이아몬드는 귀한 취급을 받았다.
“원하던 것이라니 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호호호, 어머! 손님을 너무 오래 세워 뒀습니다. 얼른 안으로 들어오셔서 즐기시지요. 정원에도 아름다운 꽃이 피었으니 잠시 바깥바람을 쐴 때 이용하시면 됩니다.”
진심으로 좋아하며 우리를 안내하는 아이리스 백작부인의 얼굴엔 미소가 그득했다. 잠시 우리 곁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아이리스 백작 부부는 곧이어 다른 손님이 오자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요즘 아이리스 백작의 사업이 잘된다더니 파티 규모가 상당하군.”
“파티를 개최하는 이유가 바로 자신의 재력을 보여 주려 함이니까요.”
아빠의 말에 형부가 대답하며 지나가는 고용인을 불러 와인을 부탁했다. 남자들이 와인을 마실 때 잘 차려입은 이들이 서서히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자 쪽도 마찬가지였다. 닭털을 폴폴 풍기는 부채를 접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서로 안면을 트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본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런 것엔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도 판테르 가의 여식으로 사교 모임에 무작정 빠질 수 없어 나오긴 했지만 내 또래는 어딜 봐도 없었다.
애초에 어린아이들은 이런 파티에 오지 않은 게 당연했다. 하지만 아빠가 딸이 가지 않으면 파티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져 초대장에 내 이름이 오르내렸다.
어떻게든 아빠를 모시기 위해 혈안이 된 가문들 덕분에 나는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사교계 데뷔를 너무 일찍 하고 말았다. 그것도 네 살에 말이다.
“언니, 저 잠깐 정원에 다녀올게요.”
“응, 그러려무나.”
내가 스크롤 없이 워프를 할 줄 알게 된 후 다들 내게 혼자 있을 권리를 줬다. 나를 호위하는 기사들이 눈이 보이지 않게 진을 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아이리스 백작부인이 말한 정원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가는 동안 새 구두가 발을 아프게 하자 곧장 힐 마법을 써서 낫게 했다.
아름다운 꽃이 만개한 정원에 들어선 주변을 둘러보며 좀 더 깊숙이 들어갔다. 적당한 벤치가 보이자 체면 불사하고 그대로 철퍼덕 앉아 등받이에 기댄 채 하늘을 보며 말했다.
“아, 지겨워. 귀찮아.”
뀨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 옆에 붙어 다니는 씨엘이 불쑥 튀어나와 내 옆에 앉았다. 그러곤 같이 하늘을 봤다.
“얼른 시간이 흘러갔으면 좋겠다. 그렇지?”
뀨우, 뀨우.
씨엘도 파티가 마음에 들지 않은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내 허벅지에 머리를 비비적댔다. 잠시 씨엘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 녀석의 귀가 쫑긋 세워지며 오른쪽을 봤다. 그곳에서 인기척을 느낀 게 분명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려나 싶어 신경 쓰지 않고 딴 곳을 볼 때 익숙한 푸념이 들렸다.
“으윽, 지겨워, 귀찮아 죽겠네. 얼른 시간이 후다닥 가 버렸으면 좋겠어. 이런 곳에서 있을 바엔 집에서 발 닦고 잠을 자는 게 낫…….”
아마도 혼자인 줄 알고 소리를 죽이지 않고 푸념을 하다가 나와 씨엘을 발견하고 입을 다문 듯했다. 한데 묘하게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구두를 한 손에 든 채 맨발로 서 있었다. 금발을 내려뜨린 여인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보더니 살짝 커졌다. 눈이 마주친 나는 방긋 웃으며 매우 자연스럽게 말했다.
“린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