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구운 찹쌀떡을 보면 비혼주의자도 결혼해서 아기를 낳게 한다는 구운 찹쌀떡 신드롬이 지금 동부를 들쑤시고 있었다. 덕분에 요즘 동부에 인구가 늘어나서 아빠가 매우 좋아했다.
솜사탕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웃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한 오빠를 보며 얼른 표정을 갈무리했다.
“뭘 그리 생각해?”
“구운 찹쌀떡 신드롬.”
“갑자기 이상한 말 하지 말렴. 그건 정말 우연의 일치야. 어느 누가 우리 호박떡을 본다고 제 신념을 깨뜨리고 결혼해서 아기를 낳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오빠는 내 솜사탕을 조금 뜯어서 제 입에 넣었다. 그러곤 잔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이제 찌그러진 호박떡이 서서히 부풀어 올랐으니 오빠랑 마저 데이트하자.”
황도에 오면 항상 나는 가족들과 데이트를 해야만 했다. 그것도 한 번에 하는 게 아니라 나의 데이트는 며칠 이상이 걸렸다. 오늘은 오빠랑 데이트하는 날이기에 나는 장성한 오빠 품에 안긴 채 여기저기 둘러봤다.
또 나 혼자 걷다가 부딪쳐서 넘어지면 안 된다는 이유로 그날은 종일 오빠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씨엘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 따라붙었다.
나름 실베스터 왕국의 기사로 임명되었지만, 매우 평화로워 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씨엘이었다. 그렇다고 우리 씨엘이 활약할 수 있도록 주변에 싸움이 일어나길 바라진 않았다.
“내일은 누구랑 데이트하니?”
“음, 할아버지랑 할머니.”
사다리 타기를 해서 순서가 정해졌다. 그러자 먼저 데이트하고 싶어서 적절한 협박과 회유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첫 데이트 상대인 아빠가 두 눈을 크게 뜨자 다들 한숨만 내쉬었다.
“오늘은 내가 전담이니 실컷 놀다가 들어가자. 알겠지?”
“응.”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를 정도로 나는 오빠와 사하라를 구경 안 해 본 곳이 없을 정도로 돌고 돌았다. 겨우 집에 왔을 땐 저녁도 먹지 못하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부터는 황실에서 주최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체력이 달린 나는 아침에 제때 일어나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른 아침부터 판테르 공작저에 오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기다린다는 말에 억지로 일어났다.
낮엔 가족들과의 데이트, 저녁부턴 황실 연회에 잠깐 얼굴을 들이밀었다. 피곤에 쩔어서 졸면 아빠는 내 핑계를 대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고 아무 곳도 나가지 않아도 되자 나는 씨엘을 품은 채 이른 저녁부터 곤히 잠들었다.
그러다가 얼굴에 닿는 따뜻한 감촉이 느껴지자 잠결에 눈을 슬쩍 떴다. 캐노피 사이로 들어온 달빛에 안이 흐릿하게 보였다.
까만 귀가 쫑긋한 아이가 나를 안고 있었는데 엉덩이 쪽에는 기다란 꼬랑지가 흐느적댔다. 순간 이게 꿈이란 걸 깨달은 나는 그대로 다시 눈을 감았다.
“라피, 좋아해.”
“우웅.”
잠결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다시 눈을 뜨려고 하자 따뜻하고 말랑한 감촉이 눈에 닿았다.
“이대로 계속 자. 내가 밤에 잘 때 지켜 줄게.”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는 작게 하품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 * *
공식적인 행사가 모두 끝났다. 그리고 모두 내 손에 주목했다. 초대장이 가득한 커다란 바구니에 장갑을 낀 손을 푹 넣고 휘저었다. 내가 초대장을 뽑으면 그곳에 가는 것으로 결정한 탓이다.
“올핸 어떤 초대장이 걸릴까요.”
“작년엔 어디였죠? 이디스 후작가였나. 우리가 갔을 때 이디스 후작 부부의 모습이 아직도 훤하군요.”
언니와 형부가 웃으며 말했다. 실제로 그들은 우리가 그 초대에 응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고 예의상 보냈다. 한데 갑자기 세 공작가가 동시에 들이닥치니 어찌나 놀라워하던지, 둘 다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릴 정도였다.
그나마 재빨리 이디스 후작부인이 정신 차리고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이러나저러나 우리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기념비적인 일이니 말이다.
“아가씨, 말랑 콩떡 먹던 힘까지 내서 뽑으세요.”
“초대장 뽑는 게 일이라고 말랑 콩떡 먹던 힘까지 내겠습니까. 그나저나 어느 가문이 걸리려나.”
가족들이 전부 모여서 초대장 뽑기를 구경했다. 나직하게 하품을 하며 대충 손에 걸린 초대장을 꺼냈다. 하얀색 심플한 디자인의 초대장엔 붉은색 리본이 곱게 묶여 있었다.
“아이리스 백작가의 초대장이로군. 그럼 내일은 6시에 모여서 같이 가기로 하지요.”
리본을 풀어 내용을 확인한 아빠가 발신인을 보고 말했다. 판테르 공작가에만 초대장을 보냈을 리가 없었다. 각 집안마다 돌렸을 테니 이제 각자 집으로 가서 초대장을 뒤져 찾아서 가면 되었다.
“그럼 우리 내일 보도록 하지. 라피는 할머니랑 같이 가자꾸나. 할머니가 우리 라피 먹이려고 이것저것 준비해 뒀단다.”
초대장 뽑기를 하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씨엘을 보듬은 나는 할머니의 말씀에 두 눈을 깜빡이며 아빠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은 티그리스 공작저에서 자고 내일 보자꾸나. 아빠가 내일 입을 옷을 보내 주마.”
“네!”
이제 팔십대를 향해 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요즘 많이 늙은 모습이었다. 보통 평민이었다면 진즉 이 세상 사람이 아닐 나이였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요즘 아빠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하면 예전처럼 거절하진 않았다.
“할머니, 오늘은 저랑 같이 밥 먹어요. 그리고 같이 씻고 잠자요.”
“그러자꾸나. 이 할미는 우리 라피랑 같이 먹을 때가 제일 입맛이 돌더구나. 호호호, 가자꾸나. 우리 말랑 콩떡이.”
마차를 타지 않고 바로 워프 게이트에 선 우리는 곧장 티그리스 공작저로 이동했다. 저녁 시간대라 우린 곧장 식당으로 갔다.
이제는 할머니가 요리할 수 없어 주방장에게 레시피를 알려 줘 만든 음식이 차려졌다. 내가 오든 안 오든 항상 내 몫의 식사까지 준비되기에 고용인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멋스럽게 데커레이션이 된 요리를 먹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요. 근데 할머니가 해 준 그 맛은 아닌 것 같아요.”
“그건 어쩔 수 없단다. 이 할미가 몇 년만 젊었으면 우리 말랑 콩떡이 좋아하는 것을 전부 만들어 줬을 텐데.”
기력이 많이 쇠한 할머니는 서서히 외출이 줄어들었다. 다른 귀족가에서 파티를 열면 할머니는 헬레나와 다니엘을 대신 보냈다. 그런 할머니 곁을 할아버지가 지키며 손을 꼭 잡았다.
“저는 할머니가 해 주신 음식을 좋아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가족과 함께 밥 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할머니, 입맛 없으면 언제든지 저를 부르세요. 쓩- 달려올게요.”
방긋 웃으며 말하자 할머니의 입가에 곡선이 그려졌다.
“어휴, 우리 라피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쁜 말만 골라서 할꼬.”
“할아버지랑 할머니 닮았지요.”
“이런 예쁜 내 새끼를 두고 내가 어찌 눈을 감을까.”
“할머니! 저 결혼해서 아가 낳는 거 보셔야죠. 그때까지 제 곁에 있어 주실 거죠? 안 그러면 라피 삐짐!”
전생에서는 단 한 번도 애교를 부린 적이 없었기에 이곳에서 원 없이 하는 중이다. 내 애교 아닌 애교에 할머니는 언제 심각한 이야기를 했냐는 듯이 방긋 웃었다.
“그런 김에 우리 라피의 재롱 보고 싶구나. 한 번만 보여 줄 수 있겠느냐.”
요즘엔 재롱이랍시고 율동을 첨가한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다. 나도 나이가 있다 보니 그런 것을 은근히 꺼린 탓이다. 하지만 할머니가 원하니 나는 식사가 다 끝나고 티타임이 되자 어렸을 때처럼 허리에 양손을 짚고 노래를 불렀다.
이런 모습을 처음 본 사하라의 티그리스 공작저의 고용인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왼쪽 가슴을 부여잡았다.
“어휴, 내 새끼, 잘한다. 잘한다. 어쩜 이리도 잘하누.”
“그치만 라피는 나이 먹어서 재롱부려도 덜 귀여워요.”
“그게 무슨 말이더냐. 이 할미의 눈엔 영원히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어휴, 우리 말랑 콩떡 같은 손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아마 아무도 없을걸.”
“할머니도 참, 위로 너무 띄워 주지 마세요. 또 재롱부리라는 뜻이라는 거 이젠 모르진 않거든요.”
이런 재롱은 대여섯 살에 다 뗀 상태다. 열 살에 재롱을 부리려니 조금 뻣뻣하고 귀여움이 반감되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저 좋다고 손뼉치며, 내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박자를 맞춰 줬다.
율동을 하며 노래를 부른 나는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려 에이든과 제이든을 봤다. 서로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딴짓을 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당연히 조카들이 나서야 하는데, 우리 나이 많은 조카들 체면을 봐서 안 시킬게.”
예전엔 내가 재롱부리면 당연히 다음 순서가 에이든과 제이든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렇고 나이 많은 조카들도 더 나이 먹은 상태였다. 그들에게 재롱부리라고 하기엔 체면이 많이 상할 것 같았다. 특히나 애 아빠가 될 에이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가 서서히 풀렸다.
고개를 돌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에이든과 제이든을 보며 픽, 웃으며 찻잔을 어루만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유를 마신 내 앞엔 상큼한 레몬차가 놓였다.
레몬차를 홀짝홀짝 마신 나는 곧이어 할머니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대기 중인 고용인 손에 의해 옷이 홀딱 벗겨졌다. 할머니랑 같이 욕조에 들어간 나는 예전과는 달리 주름이 늘어난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할머니, 평생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라피를 봐서라도 오래오래 같이 살아요.”
“오냐, 이 할미는 우리 말랑 콩떡이 있어서 너무 좋구나. 세라피나는 이런 호강도 못 누려 보고 눈을 감았으니, 이 어미가 대신 누리고 가서 말해 줘야겠어.”
촉촉하게 젖은 할머니의 목소리에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옆에 뽀짝 다가가 앉았다. 그러곤 옆에 대기 중인 고용인에게 샤워볼을 받아 할머니의 몸을 닦아 줬다.
“우리 손녀가 이 할미를 씻겨 주는 것이더냐. 너무 기분이 좋구나. 한데 우리 말랑 콩떡이 힘들 것 같으니 그만하렴.”
“좀만 더 할게요. 할머니는 저 어렸을 때 씻겨 줬잖아요. 그러니까 이젠 제가 씻겨 줄게요.”
말없이 미소만 지은 할머니의 눈가가 조금씩 젖어들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수건으로 톡톡 두들겨 닦았다.
“이야, 우리 할머니 너무 예뻐요.”
“못 하는 말이 없구나. 호호호, 나중에 우리 손녀가 이 할미를 씻겨 줬다고 자랑해야겠구나.”
말랑 콩떡이 너무 일찍 어른이 된 것 같아 그게 서운하다고 말하는 할머니를 꼭 안아 줬다.
“손녀가 할머니를 씻겨 주는 건 당연한 건데 그게 자랑거리가 되는 건 좀 부끄러울 것 같아요.”
“우리 새끼, 내 아가…… 어쩜 이리도 말하는 게 예쁠꼬.”
내 볼에 연신 입맞춤을 해 준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셨다. 할머니가 웃자 주변에 있는 이들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고, 나를 뽀득뽀득하게 씻겼다. 더불어 요즘 존재감 없는 씨엘도 한쪽에서 빨렸다.
깨끗하게 씻은 후 침대에 눕자마자 나는 할머니 품에 빈틈없이 안겨들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나를 다독다독해 주며 조용히 자장가를 불렀다.
“자장, 자장 말랑 콩떡, 잘도 잔다. 말랑 콩떡.”
뭔가 조금 이상한 자장가였지만 할머니의 나직한 목소리에 좀 전까지 말똥말똥한 두 눈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하무니…… 후아아암, 졸료여.”
졸음이 몰려들자 어렸을 때처럼 혀 짧은 소리가 나왔다.
“졸리면 자렴, 할미가 꿈속에서 지켜 줄 테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의 발에 낙엽이 밟히듯 장난스레 바스러진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