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한동안 벤스의 푸념을 들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딸을 만들고 말겠다고 다짐하는 벤스를 보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았다.
“벤스는 부인이 걱정되지도 않아요? 아이를 연년생으로 낳으면 몸이 망가질 텐데.”
인간적으로 아들 넷을 연년생으로 줄줄이 낳은 것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 도구도 아닌데 말이다.
“그건 그런데 세실이 더 원하는 중이라서요.”
“네? 아이 키우는 것은 고용인이 어느 정도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열 달을 배에 담고 있어야 하잖아요. 그게 얼마나 힘든데요.”
비록 아이를 낳은 후보다 배에 담고 있을 때가 낫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게…… 저와 결혼하기 전에 아가씨를 멀리서 뵈었는데 사랑스러움에 푹 빠졌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우리 찹쌀떡 같은 딸을 낳자고 프러포즈했더니 바로 받아 줬지요.”
이른바 ‘내 아를 낳아도’ 의 동부식 프러포즈인가.
찹쌀떡 같은 아이를 낳자는 프러포즈를 한 벤스나 그걸 받아준 부인이나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잉, 몰라요. 아이를 열을 낳든 몇을 낳든, 일에 지장 없게 하세요. 그리고 우리 선생님이 편하게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시고요.”
남의 가정사에 계속 참견할 생각이 없는 나는 오빠의 품에서 어느새 아빠의 가슴에 안겼다. 벤스와 이야기하느라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게 지체되자 아빠가 달려 나온 것이다.
“딸도 못 낳는 인간 말에 휘둘리지 말고 얼른 들어가자꾸나. 아직 날씨가 쌀쌀하다.”
“공작님, 아니 어떻게 측근의 가슴에 대못을 찍습니까.”
“아무리 찍어도 자네는 가슴에 뼈밖에 없어서 아프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일세. 자, 라피! 들어가자꾸나. 유진, 너도 따라오너라.”
이상기온 때문인지 봄이지만 유독 날이 쌀쌀했다. 그렇기에 나는 잔뜩 움츠린 채 아빠의 넓은 가슴에 찰싹 붙어 온기를 느꼈다. 검술 수련으로 다져진 가슴팍에 안기자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예전엔 안기는 게 불안해서 죽을힘을 다해 옷을 붙잡았지만, 어느샌가 능숙해졌다. 이젠 굳이 옷을 잡지 않아도 안정감이 느껴져 안기면 편해서인지 잠이 솔솔 올 정도였다.
“아빠, 우리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귀족가에서 초대장을 많이 보냈단다. 황궁 연회에 참석 후에 귀족가에서 온 초대장 중 뽑기 해서 몇 군데만 돌면 될 것 같구나.”
전엔 내가 매우 어리다는 이유로 황궁 연회 외엔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동부가 고립될 수 있기에 아빠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타 귀족가에서 온 초대장 중 눈 감고 손에 잡히는 곳으로 가곤 했다.
이미 초대장이 몰려와서 커다란 바구니에 가득이라는 말에 나는 갑자기 피곤해졌다.
“파티 열 돈이 있으면 차라리 나를 줬으면 좋겠네.”
우린 생일 외엔 따로 연회를 주최하지 않았다. 생일 기념 연회도 세 식구 생일을 일 년에 한 번, 한꺼번에 하곤 했다.
연회나 파티를 주최하려면 돈도 돈이지만 고용인들이 매우 피곤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피곤해한다는 것을 알기에 아빠는 파티 같은 것은 열지 않았다.
“귀족들은 파티를 주최함으로써 자신들의 재력과 사교력을 내보이려 하는 것이지. 자신들 몸뚱이 하나로는 가문을 알릴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없으니 말이다.”
자신의 가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파티나 무도회를 여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특히 이 시기엔 지방의 귀족들도 중앙으로 몰려오기에 파티를 열기엔 적기였다.
“그런 이유라면 우린 굳이 파티 같은 거 열지 않아도 되네요?”
“그렇지. 굳이 다른 이들에게 권세를 내보이지 않아도 모르는 사람들이 없으니 말이다.”
자연스럽게 내 방으로 들어간 아빠는 나를 침대 위에 올려 줬다. 그러곤 이마와 볼에 입맞춤을 했다.
“조금 이따가 보자꾸나. 우리 딸, 잠시 쉬고 있거라.”
아직 일을 끝마치지 못했는데 중도에 뛰어나온 티가 역력한 아빠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밖으로 나갔다.
“하여튼 우리 아빠는 나를 한시라도 못 보면 눈에 가시가 돋치는 분이라니까.”
폴짝 뛰어와 내 품에 안겨든 씨엘을 보며 말하자 녀석은 비비적대며 얕게 울었다.
그날 이후로 나와 씨엘은 아빠와 오빠를 따라 평소처럼 사하라를 거닐었다.
“어이쿠, 우리 아가씨의 오빠는 벌써 어른이 다 되었군 그래. 그리고 꼬마 아가씨도 많이 컸고.”
일 년에 한 번씩 이곳에 오면 솜사탕을 파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아저씨는 항상 우리를 보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채 말하며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솜사탕을 만들어 줬다.
나날이 솜사탕 만드는 솜씨가 늘어난 아저씨는 우리를 보며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잘 먹을게요.”
솜사탕 아저씨에게 인사하며 몽실몽실한 솜사탕을 날름 핥았다. 혀에 닿는 치명적인 단맛에 몸이 바르르 떨렸다.
“감사합니다. 우리 동생에게 커다란 솜사탕을 만들어 주셔서요. 이건 솜사탕값입니다.”
여전히 집에서는 일 년에 1골드라는 치명적인 용돈을 받지만 생일 선물로 받은 것들을 처분해서 현금으로 만든 오빠는 이런 날만큼은 돈을 뿌려댔다.
일부러 작은 돈으로 바꿔서 들고 다닌 오빠는 보통 솜사탕값보다 두 배로 지불했다.
“저기 손님, 이거 너무나 과하게 많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우리 동생의 솜사탕이 남들에게 주는 것보다 더 크니까 이 정도 받으시는 게 맞습니다. 그러니 금액에 부담을 느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아무리 그러셔도 그렇지…… 후우, 알겠습니다. 그럼 이 돈으로 우리 아들놈 교육비로 쓰겠습니다.”
“부디 이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인재가 되길 바라겠습니다.”
오빠가 솜사탕 아저씨와 이야기할 때 나는 솜사탕 먹는데 정신이 팔려서 앞에 누가 오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무작정 걸었다.
퍽-
“읏!”
뭔가에 부딪힌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솜사탕이 찌그러진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런, 미안해. 괜찮니?”
앞에 있는 사람이 급히 내게 사과를 하더니 손을 내밀었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손을 본 나는 거부하지 않고 잡았다.
상대의 손을 잡고 일어난 나는 그때야 앞을 제대로 봤다. 바지 차림을 한 사람은 남자처럼 꾸미긴 했지만 내 눈엔 여자로 보였다. 무슨 이유 때문에 남장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목소리마저 억지로 변조한 티가 역력했다.
금발을 가리는 모자를 고쳐 쓴 사람의 키는 보통 여인보다 좀 커 보였다.
“나 때문에 솜사탕이 엉망이 되었구나. 새로 하나 사 줄게. 한데 같이 온 보호자가 없니? 보호자에게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분명 부딪치기는 같이 부딪쳤는데 상대는 내 보호자까지 찾으며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라피, 무슨 일이니?”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오빠가 내게 다가와 묻자 상대방이 곧장 사과했다.
“혹시 이 아이의 아빠?”
“이 아이의 오빠 되는 사람입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아빠라고 불렸지만 그리 기분 나빠하지 않은 오빠는 내 엉덩이 부분의 치마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어 줬다.
“죄송합니다. 저랑 부딪쳐서 아이가 넘어졌습니다. 혹여나 치료가 필요하다면…….”
“우린 공갈협박단이 아닙니다만. 우리 호박떡이 약간 찌그러졌지만, 이 정도는 시간이 흐르면 원상 복구되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지만…….”
“괜찮습니다. 라피, 여기 있는 분께 부딪쳐서 죄송하다고 사과해야지.”
오빠의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곧장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니 뭐가 죄송하다는 거니, 잘못은 내가 했는데.”
내가 넘어졌음에도 오빠는 상대방에게 무조건 화를 내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그냥 보내 줬다. 내일은 해가 어디에서 뜨는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
“그 사람이 무작정 뛰어와 네게 부딪치지는 않았을 거야. 솜사탕에 정신 팔려 있었지?”
끄덕끄덕-
솜사탕의 달콤함에 빠져 있어서 앞을 보지 못한 것엔 내 실수도 존재했다. 그렇기에 핑계대지 않고 깔끔하게 고갯짓으로 내 의사를 표현했다.
“이건 앞을 보지 않고 무작정 걸은 라피에게도 잘못이 있어. 그러니까 사과하는 게 당연한 거야. 혹시 오빠가 사과하라고 해서 기분 나빴니?”
“아니.”
“그래, 우리 호박떡은 사랑스러운 것도 모자라 착하기까지 해서 너무 좋다니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 오빠는 씨엘이 바닥에 떨어진 솜사탕을 앞발로 건드리는 것을 봤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솜사탕은 갱생 불가능했다.
“이건 버리자. 오빠가 더 큰 솜사탕 사 줄게.”
“응.”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에 오빠가 솜사탕을 버릴 때 아까 나와 부딪쳤던 사람이 돌아왔다. 한 손엔 커다란 솜사탕을 든 채.
“나랑 부딪쳐서 솜사탕이 떨어졌잖니. 이것 받고 마음 풀렴.”
푸른 눈을 찡긋하며 윙크를 한 사람은 내 손에 솜사탕을 쥐여 주며 방긋 미소 지었다. 입술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데 모자로 가린 모습마저 어여뻐 보였다.
“고맙습니다. 예쁜 언니.”
“응? 난 언니 아니고 오빠인데.”
“네, 예쁜 오빠.”
솜사탕을 사 준 이가 오빠라고 하니 오빠라고 불렀다. 그러자 씩 웃은 이는 내가 예쁘다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만약 우리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땐 린이라고 불러 주렴.”
“네, 린 오빠. 전 라피예요.”
어쩌다 보니 통성명을 하게 된 우리는 서로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부모님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정말 부럽네. 나도 나중에 라피 같은 아이를 낳고 싶어.”
“그럼 우리 오빠나 아빠랑 결혼해야 해요.”
“풉! 맞네, 라피의 말이 맞아. 근데 어쩌지. 난 남자라서 라피의 아빠나 오빠랑 결혼 못 하는데. 혹시 언니 있니?”
“네, 있는데 이미 결혼해서 아빠보다 가슴이 빈약한 형부랑 나이 많은 조카도 있어요.”
“푸풉, 그렇구나. 그럼 라피, 다음에 인연이 닿으면 보자꾸나.”
매우 짧게 말을 했지만 린과 이야기하는 게 상당히 재미있었다. 내게 제대로 된 친구가 없어서 그러나, 처음 보는데도 상당히 친근해서 마치 오래전에 사귄 친구 같은 느낌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멀어지는 린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솜사탕을 먹었다. 솜사탕은 입안에서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달곰한 여운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라피, 대체 저 여자랑 무슨 대화를 나눈 거야?”
오빠 역시 린이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것 같다.
“나 같은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하기에 아빠나 오빠랑 결혼하면 된다고 했어.”
“크큭,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정확히는 티그리스 피를 이어받아야 가능하지 않을까?”
“근데 외갓집엔 결혼 안 한 남자가 제이밖에 없잖아. 아! 제이 소개해 줄 걸 그랬나. 근데 제이랑 결혼한다고 나 같은 아이가 나올 확률은 별로 없을 것 같아.”
“그 말을 들으면 나이 많은 조카님이 엄청 서운해할 것 같구나.”
그건 그렇지만 제이든이랑 결혼하면 고대어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천진난만하기만 한 아이가 태어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제이든에게 소개해 주고 싶진 않았다.
“역시 남은 선택지는 오빠밖에 없네. 오빠도 티그리스의 피가 이어졌잖아. 물론 마법사는 아니지만.”
“흐음, 하긴 우리 라피를 모르는 상태에서 사과하고 친절을 베푸는 것을 보니 성품이 좋아 보이긴 했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결혼은 결혼이란다.”
나를 두고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 오빠가 멀어지는 린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 픽, 웃었다. 내 주변에서 비혼을 선언한 오스카를 제외하고 다들 결혼해서 지금 육아 전쟁 중이라는 걸 내가 모르진 않았다.
얼마 전 카이도 구운 찹쌀떡 같은 딸을 낳으려다가 실패했다고 내게 하소연을 했으니 말이다.
비혼주의를 고수한 이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을 본 아빠가 딱 한 마디 하긴 했다.
구운 찹쌀떡 신드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