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그냥 에이든에게 지금보다 어린 시절에 투정을 부린 것뿐이었다. 어린 나이에 할머니 되기 싫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걸 지키기 위해 두 사람이 노력했다가 모든 악조건을 이겨낸 태아가 배 속에 자리한 듯했다.
매우 송구스럽다는 듯이 고개 숙인 사비나를 본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 눈치를 살핀 헬레나의 한 마디에 사비나와 에이든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스몄다.
“아가씨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는 바보가 어디 있느냐.”
요기요. 요기! 요기 있어요. 게다가 내 앞에서 아기 만들러 간다고 연극까지 했어요.
“지금은 그걸 물을 때가 아니다. 당장 주치의를 들라 하라.”
식사 중에 가주의 명으로 주치의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도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주치의는 할아버지 근처로 다가오더니 넙죽 엎드리다시피 무릎 꿇었다.
“죄송합니다. 사비나 님께서 극구 비밀로 하시길 원해서 가주님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환자에 관련된 것은 제아무리 가족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토설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사비나는 임신 중이었기에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입을 다문 듯했다.
“하면 지금 얼마나 되었더냐.”
“대략 3개월이 되었습니다.”
주치의의 말에 다들 사비나에게 매우 잘했다고 칭찬했다. 심지어 할머니는 눈물까지 흘릴 정도였다. 매우 장한 일을 했음에도 사비나와 에이든은 여전히 내 눈치를 봤다.
“나 이제 할머니 되는 거야? 히유, 어쩔 수 없지. 두 사람을 닮은 귀여운 장난꾸러기 아이가 태어날 것 같네. 축하해, 그러니까 고개 들어. 임신하고 죄인처럼 굴지 말라고.”
“하지만 고모가 원하지 않아서…….”
“좋게 말해 봐. 내 핑계 대고 신혼을 즐긴 거 아니야?”
“어? 으음.”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한 것으로 봐서는 내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앞으로 크게 될 아이일 것 같으니 잘 키워. 그리고 비나,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몸에 무리가 갈 테니까 편하게 지내. 할아버지 할머니도 이해해 주실 거야.”
“감사합니다. 고모님.”
“지금이라도 쉬고 싶으면 올라가도 돼. 밥은 먹고 싶은 것을 따로 말하고. 아기를 가졌는데 굶으면 쓰나. 졸리면 자고. 근데 검술 수련은 무리가 갈 것 같으니 아기를 낳은 후로 미루는 게…… 크흠. 왜 그렇게 보는 건데요?”
어른들 눈치 보지 않고 편히 지내라고 말하고 있는 것뿐인데 가족들이 또 나를 뚫어지게 봤다.
“누가 보면 우리 아가씨가 아이 서넛은 있는 줄 알겠어요.”
“그러게, 우리 라피의 나이가 이제 열 살이라는 것을 잠깐 잊고 있었어.”
헬레나와 다니엘의 말에 나는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냥 주워들은 것뿐이에요.”
이전의 삶에서 내게 결혼과 출산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워듣고, 충고랍시고 해 준 것이다.
한동안 기쁨을 주최하지 못한 가족들이 다시 한번 사비나와 에이든에게 축하 말을 했다. 식사하면서도 꾸벅 조는 사비나를 에이든이 데리고 나가자 그때야 분위기가 약간 가라앉았다.
“근데 너는 대체 언제 결혼할 거니?”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는 제이든을 보며 헬레나가 식은 스테이크를 써는 중에 한 마디를 뱉었다. 그러자 제이든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우리 말랑 콩떡 고모 같은 여자가 없더군요. 그런 여자가 있으면 당장 무릎 꿇어서라도 프러포즈할 건데.”
그 한 마디에 식사 중인 가족의 시선이 제이든에게 향하자 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대체 누가 가르쳤기에 밑도 끝도 없이 눈만 높아진 거니?”
“우와, 방금 고모가 한 말뜻이 뭐야? 결론은 본인이 제일 예쁘고 잘났다는 거야?”
“그럼 아니야?”
“어? 응, 맞아. 우리 고모가 최고지. 그러니까 나도 형수님 같은 여자 소개해 줘.”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아서 소개해 주지 않겠니. 워낙에 내 눈에 들어찬 인물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지.
“우리 라피의 눈에 들려면 웬만한 여자는 안 될 거다. 그러니 일찌감치 포기하거라. 안 그랬다가는 평생 혼자 살 팔자가 될 테니까 말이다.”
할머니의 말에 제이든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난 그냥 우리 말랑 콩떡 고모를 키우면서 살래요.”
이게 무슨 희대의 멍멍이 소리란 말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나는 픽, 웃었다.
“난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언제나 그렇듯 화기애애한 식사 시간이 끝나자마자 나는 곧장 판테르 공작저로 가서 아빠에게 새 소식을 전했다.
“아빠, 조카 며느님이 임신 3개월째래요.”
“음? 그렇구나. 우리 라피의 조카님은 참 좋겠네.”
“네. 근데 내가 임신하면 아빠도 좋아해 줄 거예요?”
“…….”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본 말에 아빠는 고장이라도 난 듯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두 눈만 깜빡였다.
“아이가 아이를 낳다니, 그건 절대 결사반대다. 우리 라피는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된단다.”
“나 같은 찹쌀떡이 태어날 수도 있잖아요.”
“내게 구운 찹쌀떡은 우리 라피가 유일무이하단다. 그러니까 그런 소리는 하지 말렴. 손주가 태어나도 내겐 손주일 뿐이지 찹쌀떡이 될 수 없으니까.”
대체 찹쌀떡의 기준이 뭐란 말인가. 보들보들한 볼때기를 가진 아이들에게 찹쌀떡 볼이라고 하는 거 아니었나. 애매한 기준에 나는 갸우뚱하며 곧장 아퀼라 공작저에도 사비나와 에이든의 소식을 퍼다 날랐다.
그 결과 다음 날, 두 집안에서 티그리스 공작저로 온갖 축하 선물을 보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게 다 가족이라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참 흐뭇한 모습을 보며 씨엘을 끌어안았다.
“나도 임신하면 선물을 많이 받을 수 있을까.”
냥냥.
내 품에 안겨 비비적대는 씨엘을 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순간적으로 씨엘이 웃는 것처럼 보였다.
봄만 되면 여지없이 황궁에서 연회 초대장을 보냈다. 문제라면 꼭 그 초대장에 내 이름이 끼워져 있다는 것이다.
“에휴, 인기인은 이래서 피곤하구나.”
“어쩔 수 없지요. 우리 아가씨께서 멋지고 사랑스러우니까 눈에 띄는 거 아닐까요.”
어느새 삼십대를 향해 가는 제니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요즘 이레나에게 차기 시녀장으로서 엄청 힘들게 교육을 받고 있음에도 제니는 내 앞에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엄청 귀찮아요. 거기 가서 연회에 참석할 시간에 마법 공부를 하고 말지.”
“어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매일 공부만 했다가는 찹쌀떡에 곰팡이가 필지도 몰라요. 한 번씩 나가서 바깥바람을 쐬어 환기를 해 주는 것도 좋은 방법 같아요.”
가끔 티그리스 공작저로 가는 나를 따라간 제니는 사비나에게 머리 묶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인지 처음보다는 고난도의 헤어스타일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제 다 되었어요. 우리 아가씨를 그냥 머리를 풀어 내려뜨려도 예쁘지만, 지금은 더 예뻐요.”
작년에 아빠가 생일 선물로 준 머리핀을 꽂은 머리는 썩 마음에 들었다. 한동안 거울을 보고 있을 때 제니가 아니 다른 이의 모습이 비쳤다.
“오빠?”
“우리 호박떡에 줄을 그었더니 수박떡이…….”
“재미없거든.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
스무 살의 훤칠한 남자로 자란 오빠는 여전히 조그만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예전보다 월등히 힘이 세진 오빠는 나를 안더니 볼에 입맞춤을 했다.
“무슨 일로 오긴, 우리 동생 보려고 왔지.”
“황도에 가서 봐도 되잖아.”
“그건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려고 왔어. 그리고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내가 우리 호박떡의 에스코트를 해야지.”
현재 아빠는 개인적인 볼일 때문에 먼저 황도에 가 있었다. 그렇기에 나 혼자 그곳에 갈 예정이었지만 오빠가 등장했다. 올해 아카데미 졸업을 한 오빠는 멋진 기사님이 되었다.
어딜 가서도 자랑거리로 삼을 수 있는 오빠를 소개해 달라고 내게 추파를 던지는 아가씨들이 더러 있을 정도였다.
씨엘의 목에 나비넥타이를 매 준 나는 오빠의 손을 잡고 워프 게이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근데 오빠는 언제 결혼할 거야?”
순간 오빠가 한 차례 휘청였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라도 빠진 건가 싶을 때 오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라피는 오빠가 결혼했으면 좋겠어? 언제는 결혼을 못 하게 막을 거라더니.”
뭔가 서운한 표정을 짓는 오빠의 말에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이 딱 결혼 적령기였기에 혹시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 건가 싶어 물었건만 오빠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하는 여자 없어?”
“없어.”
“아빠가 결혼하라는 말씀 안 하셨어?”
“저번에 지나가는 말로 한 적은 있지만, 굳이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말이야. 나중에 마음에 드는 여자 있으면 결혼하지 뭐.”
마치 본인 마음에 드는 여자가 무조건 자신을 따라와 줄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뭐 오빠 정도의 얼굴과 체격 그리고 집안이면 모두 도시락 싸 들고 쫓아다니고도 남겠지만.
“내 마음에 든다고 해도 우리 호박떡을 찌그러뜨리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오빠는 빵빵하게 부푼 호박떡이 좋거든.”
기승전 호박떡인 오빠는 나를 안아 올렸다. 그러곤 고용인들이 쌓아 놓은 짐이 놓인 워프 게이트로 올라갔다.
“씨엘도 데려가는 거니?”
“응, 라피 가는 곳엔 씨엘이 가니까. 우리 씨엘이 얼마나 똑똑한데.”
먕!
내 말에 씨엘이 뽐내기라도 하듯 턱을 한껏 치켜세웠다. 그 모습을 본 오빠는 콧방귀를 꼈지만, 씨엘을 떼어놓지는 않았다.
“안녕히 다녀오시지요.”
“그럼 이곳을 부탁하겠네.”
오스카와 고용인의 인사를 받으며 우린 곧장 황도 사하라에 있는 판테르 공작저에 도착했다. 이미 우리가 올 거라는 것을 언질 받은 이들이 나와서 맞이해 줬다.
“어서 오시지요.”
마침 아빠의 최측근 벤스가 마중 나왔다.
“음? 왜 벤이 나와 있어요? 원래는 맥이 출장 오는 거 아니었나요?”
“바꿨습니다. 하하하, 워렌 후작님께서 집안에 급한 일이 있으셨는지 매우 흔쾌히 허락해 주셨답니다.”
벤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나는 그를 빤히 봤다. 비혼이라고 말해서 에드워드의 속을 홀라당 태워 놓은 인간이 바로 벤스였다.
오죽했으면 에드워드가 역사 수업을 할 때 중간중간 벤스를 욕하겠는가. 결혼 안 해서 대를 끊어 놓는다고 말이다. 그랬던 벤스가 4년 전에 결혼을 했다. 상대는 참한 귀족가의 아가씨였는데 일 년에 한 명씩 아이를 출산했다.
그것도 아들로만 줄줄이 네 명을 낳았다. 보기와는 다르게 정력왕 벤스였다.
“육아하기 싫어서 여기로 도망 왔죠?”
“설마 제가 그러겠습니다.”
“벤스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을 것 같아요.”
에드워드가 말하기로는 크리스토퍼 가문의 규칙 중 하나가 바로 육아를 고용인들에게만 맡기지 말라, 였다. 부모도 어느 정도 육아에 참여해야 아이들과 유대관계가 돈독해져서 엇나가 가문을 말아먹지 않는다고 말이다.
참으로 올바른 크리스토퍼 후작가의 규칙 앞에 벤스는 무릎을 꿇었다. 아들 하나일 땐 곧잘 아이 보러 간다고 아빠에게 말한 후 일찍 퇴근을 하곤 했다. 하지만 아들이 늘어날 때마다 벤스의 엉덩이는 서서히 무거워졌다.
심지어는 야근도 자처할 정도였다. 그로 인해 에드워드가 손자 네 명 때문에 말라 죽겠다며 나를 가르친다는 명목하에 판테르 공작저로 이주했다.
에드워드 때문에 꼼짝없이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 벤스는 아침에 출근할 땐 눈그늘이 진해져 있었다.
“아가씨 같은 딸을 낳으려다가 줄줄이 실패했습니다. 그러니까 아가씨, 골라 보십시오. 연하 남편감이 넷이나 있으니 하나만 골라 제발 키워 주세요.”
고대국가에서는 어린 남편감을 데려와서 결혼 후 키운다는 말이 있던데, 설마 나보고 그런 짓을 하라는 건가. 어이없어서 할 말이 없어진 나를 대신해 오빠가 한소리 했다.
“우리 호박떡 같은 애가 저절로 굴러떨어지는 줄 압니까. 온갖 치성을 드려도 모자랄 판에 밤에 잠만 잔다고 바로 생길 리가 없지요.”
저, 저기요? 오빠, 나 아직 미성년자인데 그런 말 함부로 해도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