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금은보화가 저절로 생긴 것은 아니었다. 에이든과 사비나를 엮어 준 대가로 티그리스 공작가와 실베스터 왕국에서 내게 중매비를 준 것이다.
순간 눈이 돌아간 나는 제이든까지 도전해 보려다가 마음에 차는 여자가 없어서 포기했다. 하지만 제이든은 은근히 인기가 높았다.
그래서인지 날이 가면 갈수록 제이든의 곁에 여자들이 몰려들었다. 티그리스 가문의 차남을 그냥 놔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십대 중반이 되었는데도 제이든은 한 여자랑 길게 연애를 하지 않았다. 아니 연애가 아니라 몇 번 만나 보고 그대로 헤어졌다.
보다 못한 내가 티그리스 공작저에서 열리는 파티에 죄다 쫓아다니면서 영애들을 두루두루 섭렵했다. 하지만 역시나 우리 제이든과 엮어 줄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내 눈이 높아진 것을 의미하겠지만.
“고모, 뭘 그리 생각하는 거야. 지금은 마법 시전하는 것만 생각해. 딴생각하다가 큰일 날 수도 있어.”
자유연애를 실컷 즐기는 제이든을 떠올린 나는 옆에서 잔소리를 하는 에이든을 보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에이는 제이가 걱정되지도 않아? 이 세상에서 유일한 동생이잖아.”
“아니 세상에 걱정할 게 없어서 제이든을 걱정하겠어. 차라리 그럴 바엔 나를 걱정해 줘. 고모랑 짝을 이뤄서 마법 연습하는 내 심정을 좀 알아줬으면 하는데.”
항상 자신은 몸값이 비싼 마법사라고 뻐기듯 말했다. 그런 에이든을 볼 때마다 제이든의 표정이 썩어들어 가곤 했다. 언제 어디에서나 흔히 있는 현실 형제는 아주 간혹 자신들이 불리할 때만 빼 놓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나이를 똥꼬로 다 먹은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내 앞에서 팔짱 낀 채 내려다보고 있는 거겠지.
“가끔 생각하는데 에이는 진짜 재수 없는 말을 서슴없이 해. 내가 고모가 아니었으면 에이 정강이 깠을 거야.”
안 그래도 빈약한 다리몽둥이 분질러 버릴까 싶다가 사비나를 봐서 꾹 참았다.
“너무해. 내가 얼마나 말랑 콩떡 고모를 좋아하는데.”
“다리 분질러서 말랑 콩떡으로 붙여 줄까 보다.”
두 팔을 교차해서 어깨를 붙잡으며 하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됐고 얼른 시작해.”
계속 에이든과 말씨름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기에 에이든을 채근했다. 그러자 방금까지 얼굴에 스민 장난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파이어 애로우!”
“윈드!”
새신랑에서 이젠 꺾인 신랑이 된 에이든과 함께 마법 연습을 시작했다. 에이든이 불화살을 만들어 날리자 나도 동시에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과 닿은 불화살은 순간 쏘아지는 속도가 빨라졌고 크기도 상당히 커졌다.
쿠오아앙-
보기에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불화살은 마법 연습하는 곳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엄청난 실드 마법이 겹겹이 쳐졌지만 불화살이 닿은 곳에서 굉음이 들리며 거세게 흔들렸다.
“역시 불 마법은 바람 마법과 궁합이 최고로 잘 맞아.”
“어, 그래. 그런 것 같네.”
어느새 열 살이 된 나는 그만큼 마나량이 엄청 늘었다. 그래서인지 마법 파괴력 역시 늘었다. 할아버지는 성취력만으로 티그리스 가문을 통틀어 열 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고 뻥을 치며 좋아하셨다.
실제로 10세에 이미 다수의 마법을 두루 시전할 수 있는 티그리스 가문의 선조들이 많이 존재했다고 역사서에 적혀 있었다.
그걸 봤지만, 딱히 할아버지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매우 좋아하시는데 거기에 찬물을 끼얹고 싶진 않았다.
“그럼 다시 해 보자. 이번엔 파이어 스톰!”
“윈드 스톰!”
불에 바람이 닿자 상승 작용이 일어났다. 어마어마한 파괴력에 마법 연습장을 겹겹이 싼 실드가 깨지기 직전에 되어서야 마나를 거둬들였다.
그렇게 몇 번이나 했을까. 슬슬 피곤해질 때 에이든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고모, 근데 나 이제 아기 가져도 돼?”
“…….”
언제부터 내 말을 이리도 잘 들었을까.
내 나이 열 살이 넘을 때까지 아기를 낳지 말라고 했더니 진짜로 안 낳을 줄이야.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런데도 할머니와 새언니는 조카 며느님에게 절대 아기를 낳지 못한다고 탓하지 않았다.
“어, 그래. 비나랑 에이 닮은 아가 낳아줘. 아가가 태어나면 돌봐 주는 건 무리지만 눈으로 봐주는 건 가능해.”
“말랑 콩떡 닮은 아기 낳아서 고모한테 안겨 줄게.”
“그건 절대 사양할래. 난 아기 싫어해.”
여자라고 해서 모성애가 존재하리란 법은 없었다. 이전 두 번의 삶을 더해 봐도 내게 엄마란 존재는 썩 훌륭하지는 않았다. 아이가 필요치 않았지만, 두 명의 엄마를 떠올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치를 떨며 고개를 격하게 흔든 나는 마법 연습을 마무리하고 곧장 의자 쪽을 봤다. 폭신폭신한 방석 위엔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식빵을 굽고 있었다.
“씨엘, 이제 가자.”
미야옹.
늘어지게 하품한 씨엘이 내게 달려와서 팔짝 뛰어와 안겨들었다. 나와 만난 지 7년째가 되었지만, 씨엘은 뭐 하나 변한 게 없었다. 덩치만 커졌을 뿐이다.
다른 고양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얼굴에 늙은 게 티가 나던데. 이 녀석은 동안 고양이라서 그러나. 그게 아니면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라서 평균 수명이 긴 건가.
씨엘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녀석도 나를 말똥말똥 보더니 어깨를 딛고 몸을 일으켜서 내 볼을 할짝할짝 핥았다. 까칠한 혀의 감촉이 느껴졌다.
“어? 고양이가 그루밍 해 주는 것은 자기보다 서열이 낮은 애들이라고 들었는데.”
에이든의 말에 씨엘은 내 볼을 핥다가 멈칫하더니 눈치를 살폈다. 그러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방금 핥은 곳을 제 머리로 비비적댔다.
“어? 얼굴에 비비적대는 것은 소유권 주장이라고 했는데.”
그 말에 씨엘은 멈칫하더니 안긴 채 얌전하게 있었다.
“고양이가 핥아 주는 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어. 설마하니 우리 씨엘이 나보고 제 부하라고 생각하겠니? 그랬다가는 확 마!”
많은 것을 내포한 단어에 씨엘은 순간 움찔하며 안긴 채 배 발라당을 시전했다. 보통 고양이라면 배를 보였을 때 쓰다듬어 주면 과민 반응을 보인다는데 씨엘은 고롱고롱대며 더 좋아했다.
“우리 씨엘은 착해서 그냥 유대를 쌓기 위해 혹은 관심 끌려고 그러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알겠어. 근데 역시 사람 말을 알아듣는 걸까?”
“생선 가게 고양이 3년이면 생선을 굽고, 우리 집 고양이 3년이면 책장을 넘기지.”
“굳이 3년 안 채우고도 녀석은 책만 잘 넘기던데.”
몇 년 전에 씨엘은 책장을 넘기며 읽는 모습을 제이든과 에이든에게도 들키고 말았다.
“하긴, 이 녀석은 우리 집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책을 넘기긴 하더라. 빤히 보는 것으로 봐서는 글씨도 이해하는 건 아닌가 싶어. 아니면 말고.”
실컷 마법 연습을 해서인지 피곤이 겹겹이 쌓인 나는 하품을 하며 마법 연습장을 빠져나왔다. 그러곤 곧장 티그리스 공작저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고모님!”
들어가자마자 사비나가 나를 반기며 방긋 웃었다.
“비나도 고생 많았어.”
어느새 나는 사비나에게 말을 내렸다. 촌수로 따져서 사비나보다 항렬이 높았기에 어른들이 그리하는 게 옳다고 해서 그러한 것이다.
뒤에 에이든이 오고 있었지만 사비나는 내게 수건을 먼저 내밀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나는 그걸 에이든에게 건네줬다.
“이젠 판테르 공작저로 가시는 건가요?”
“아니, 오늘은 저녁 먹고 갈 거야. 아빠가 오늘은 회의 있다고 했거든. 근데 엄청 길게 할 예정이라고 맥스가 말해 줬어.”
판테르 공작저엔 같이 밥 먹을 수 있는 존재가 현재는 유일하게 아빠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아빠가 회의로 식사를 빠지면 나 혼자 먹어야만 했다. 처음엔 혼자 먹는 게 괜찮았다. 한데 어느새 가족들과 같이 먹는 게 버릇이 되어 혼자 먹으면 맛이 없고 속도도 현저하게 느려졌다.
그렇기에 오늘 같은 날엔 일부러 티그리스 공작저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돌아가곤 했다.
“그럼 오늘은 제가 머리 만져 줄게요. 아직 저녁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요.”
“아, 아니 저기 사비나! 오늘은 말이에요. 아기 만들…… 으윽!”
“어, 어머 어머! 에이든 님도 차아암!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곁으로 다가와 나를 떼어내려 한 에이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비나가 제 남편의 등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사비나의 얼굴보다 더 붉게 물들었을 에이든의 등짝에 명복을 빌어 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고모님, 우린 얼른 올라가요. 깨끗하게 씻고 머리 만져 드릴게요.”
“엉, 고마워.”
에이든의 등을 두들긴 손이 얼얼한지 몇 차례 허공에 털어낸 사비나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열감이 느껴진 손을 잡은 나는 내 방으로 올라갔다.
미리 받아진 물에 몸을 대충 씻고 나오자 마른 수건을 들고 대기한 사비나가 내 머리카락을 털어 말려 줬다. 의자에 앉은 채 사비나의 손길에 노출된 나는 순간 머리가 앞으로 꾸벅여졌다.
“음? 고모님, 졸리세요?”
“응, 비나의 손길이 너무 따뜻하고 좋아서…… 후아암.”
늘어지게 하품한 나는 두 손을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요즘엔 아빠랑 함께 자지 않았다. 무려 2년 전부터 나는 혼자 자기 시작했다. 가끔 언니가 동성임을 내세워 아빠와 오빠 보란 듯이 같이 자곤 했지만.
그래서 밤에 시간이 남는 바람에 나는 마법 공부를 원 없이 했다. 덕분에 낮엔 약 먹은 병아리처럼 조는 일이 잦았다.
두 번째로 하품을 하자 사비나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러곤 침대에 조심히 눕혔다.
“밤에도 공부하는 거 맞죠? 그러다가 몸 상하면 여러 사람이 걱정할 거니 적당히 하세요. 고모님이 적당히 공부한다고 해도 닦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어린 나를 재울 때 아빠가 해 준 것처럼 사비나가 내 배를 다독였다. 그러자 길게 하품을 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바로 떴다.
“어래? 저녁이네.”
분명 눈 감기 전에는 해가 떠서 밝았는데 눈을 떠 보니 상당히 어두워졌다. 눈을 깜빡이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기지개를 켜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냐아앙.
옆에서 자던 씨엘도 깨어났는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요즘 너무 무리했나 봐. 그나저나 비나는 왜 여기에서 자는 거지.”
돌아갔을 것으로 여겼던 사비나가 옆에서 자고 있자 머리를 긁적였다. 사비나 역시 요즘 이곳에서 검술 수련을 하느라 피곤이 쌓인 모양이었다.
“저기, 비나! 일어나 봐. 일어날 시간이야.”
계속 자도 무방하지만 잘 땐 자더라도 밥은 먹고 자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곤히 잠든 사비나를 흔든 나는 느른한 눈동자로 그녀를 봤다. 너무 깊게 잠이 들었는지 사비나는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으음, 고모님?”
“이제 일어나. 밥 먹으러 가자. 식사 거르면 안 돼.”
요즘 입맛이 없다며 식사를 자주 거르는 사비나를 데리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이미 티그리스 성을 지닌 가족들이 전부 앉아 있었다.
“어서 오렴. 늦었구나.”
“졸려서 조카 며느님이랑 잤어요.”
“그래, 하긴 마법 연습을 오래 했으니 졸릴 만도 하지. 사비나는 요즘 졸음이 심하더냐? 체력이 떨어진 건 아닌가 모르겠구나. 주치의에게 영양제를 지어 놓으라고 해야겠구나.”
인자한 미소를 지은 할아버지가 먼저 숟가락을 떠서 식사하자 순서대로 숟가락을 들었다. 유독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는 듯한 사비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마치 역한 것을 먹는 듯한 표정에 이어 냅킨에 곧장 한 모금 넣은 수프를 뱉어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뭔가가 떠올랐다.
“비나, 아가 가진 거 맞지?”
내 물음에 사비나가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순간 집안이 들썩였다.
“이 좋은 일을 왜 숨긴 거니?”
흥분을 애써 갈무리한 할머니의 물음에 사비나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게…… 고모님께서 열 살 넘을 때까지 아기 낳지 말라고 했는데 가져서요. 고모님의 말씀을 어겨 버렸어요.”
딴 건 몰라도 왜 이런 건 칼같이 지키려고 한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