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아빠의 말에 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싸하게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세히 설명해 보게나.”
“에이든이 고장난 관절 인형처럼 돌아다닙니다. 넋을 빼고 있는 모양새를 보고 있노라니 정신을 놓은 게 분명합니다. 아무래도 결혼이 처음이라 긴장한 것 같기도 합니다.”
아빠의 말에 방 안에 있는 가족들의 입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터졌다.
“첫 결혼이니 에이든이 긴장한 것은 당연한 거라네.”
할머니가 웃으며 말하다가 나를 지그시 봤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바로 눈치였다.
“에이한테 갔다 올게요.”
“그럴래? 조카님이 첫 결혼이라 긴장한 모양이니 우리 인절미가 가서 좀 풀어 주렴.”
언니가 씩 웃으며 내려 주자 나는 의자에 걸려 있는 가방을 메고 씨엘과 함께 가족들이 머무는 방에서 나갔다.
“앗! 고모님, 오늘도 멋지십니다.”
“너무 사랑스러워요. 고모님!”
마침 저택 내에서 실베스터 왕족을 호위하러 온 기사와 마주쳤다.
“어, 오랜만이에요. 자! 요거는 선물!”
때마침 크로스백을 착용하고 있던 나는 자연스럽게 가방을 열고 사탕을 건네줬다.
“감사합니다. 고모님!”
“이게 그 유명한 고모님의 사탕이로군요. 가보로 간직할 겁니다. 한데 어디로 가시는 중이었는지요?”
남녀 짝을 이룬 기사를 본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에이, 만나러 가요. 근데 비나 언니는…… 아니, 크흠흠 우리 조카 며느님은 뭐 해요?”
“푸흐흡. 네, 사비나 공주님께서는 너무 기분 좋으셔서 방방 뛰시는 걸 왕자님과 왕자비 마마께서 붙잡고 계시답니다.”
결혼도 전부터 티그리스 저택에서 살다시피 한 사비나였다. 명목은 티그리스 가문의 미래 안주인으로서 공부하러 온 거라고 했지만 실상은 에이든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였다.
그 와중에 자주 판테르 공작저에도 찾아와서 놀다가 가곤 했다. 심지어는 마법 공부하러 가는 날엔 조금이라도 늦으면 사비나가 판테르 공작저로 찾아와서 데려갔다.
그래서인지 판테르 공작가, 아퀼라 공작가와도 어려움 없이 잘 어울리게 되었다.
“그렇구나. 그럼 나중에 봐요.”
“네, 나중에 뵙겠습니다.”
실베스터 기사와 만난 후 씨엘의 뒤를 따라갔다. 가는 내내 만난 고용인들마다 인사를 하는 통에 내 가방은 서서히 가벼워졌다.
“음? 처제! 어딜 가는 거야?”
마침 볼일이 있어 조금 늦은 형부가 가슴을 부풀리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에이가 긴장해서 풀어 주려고 가고 있어요.”
“그래? 하긴 결혼이 처음이니 그럴 만도 하지. 크큽, 조카님 방으로 제가 에스코트해 줘도 될까요? 레이디.”
에스코트해 주기엔 내 키가 너무나 작았다. 그렇기에 에스코트해 주겠다는 것은 나를 안아서 가겠다는 뜻이었다.
“네, 좋아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형부는 나를 안아 올려 에이든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휴, 우리 인절미 처제는 오늘도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워.”
내 볼에 조심히 손대며 형부는 방긋 웃었다. 처제만 봐도 사랑스러워 죽으려고 하는 형부를 보면서도 둘째는 생각하지도 말라는 언니도 대단해 보였다.
“난 아직도 우리 처제가 대답할 때마다 ‘니에’라고 하던 게 기억나. 그럴 때마다 얼마나 깨물어 주고 싶었는데.”
더 자라고, 발음이 교정이 되자 나는 혀 짧은 소리를 내지 않게 되었다. 처음엔 조금 섭섭한 표정을 짓던 가족들은 예전의 내 발음이 좋았다며 그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지금은요?”
“지금도 여전히 귀엽고 예쁘지. 우리 처제는 커서도 결혼은 절대 못 할 것 같아. 내가 반대할 예정이거든. 감히 누가 우리 처제한테 결혼한다고 청혼서를 보내면 당장…….”
“아퀼라 공작저가 아니라 우리 집으로 청혼서가 올 건데요.”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일 끝나자마자 바로 처가댁으로 달려가서 아버님과 같이 청혼서를 불 지를 테니까.”
형부의 말에 앞에 걷는 씨엘의 몸이 한 차례 바르르 떨렸다. 나비넥타이가 너무 꽉 조이나 보다.
“자! 조카님 방에 다 왔네. 그럼 처제, 잘 부탁해.”
“네.”
문 앞에 나를 내려 둔 형부는 곧장 언니에게 갔다. 그런 형부를 본 나는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암호를 말씀하십시오.”
장난기 어린 기사의 물음에 나는 가방을 뒤져 사탕을 꺼냈다.
“먹고 치카치카!”
“정답입니다. 이제 들어가 보십시오.”
사탕을 받은 기사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새신랑의 방문을 열어 줬다. 그 안엔 아빠 말대로 고장난 에이든이 서성거렸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소파에 앉았다가 난리를 치는 에이든은 내가 온지도 모르고 있었다.
아주 넋을 놓은 듯한 에이든은 온몸이 삐걱댔다. 매우 부자연스러운 모습에 픽, 웃으며 도도도- 달려가 에이든의 앞에 섰다.
“에이, 정신 차려!”
“어, 어? 고모!”
마른세수를 한 에이든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기, 긴장이 되어서…… 내가 결혼하면 가장으로서 잘 해낼 수 있을까 등등 온갖 생각이 밀려들어.”
이제야 결혼이란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을 느낀 에이든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뭐 결혼 전에 느끼는 우울감 즉 메리지 블루인가.
한쪽은 신나서 방방 날뛰는데 한쪽은 우울감으로 넋을 놓고 고장난 모습이라니.
“오빠랑 새언니랑 해온 거 그간 곁에서 지켜봤을 거 아니야. 모르는 거 있다면 어른들한테 조언을 구해.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응…….”
“우리 조카 며느님을 책임질 생각을 하니 어깨가 무거워져서 힘드니? 걱정하지 마. 우리 조카 며느님은 사교성이 좋아서 네게 짐이 되진 않을 거야.”
“그건 알아.”
“그리고 마지막!”
“어?”
마지막으로 할 말을 앞두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자 에이든이 황금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기는 나중에 만들어!”
“왜?”
“내가 전에 경고했었지? 나 할머니로 만들지 마! 이 나이에 할머니가 되는 거 좀 아니잖아.”
“푸핫! 그게 뭐야. 단순히 할머니 소리 듣기 싫어서 애를 나중에 낳으라니, 그런 고모가 어디 있어.”
“요기 있잖아. 요기! 내 나이 방년 다섯 살에 할머니는 좀 아니지 않니? 하다못해 열 살 넘어서…… 인간적으로 열 살에 할머니 소리 듣는 것도 싫어.”
진심으로 싫다는 듯 온몸을 바르르 떨며 말하자 에이든의 입술 사이에서 웃음 섞인 소리가 터졌다.
“크크큭, 어이쿠, 우리 말랑 콩떡 고모는 할머니 소리 듣기 싫어? 사비나는 우리 고모 같은 아이 낳고 싶다고 지금부터 열심히 노력하자고 하던데.”
“솔직히 말해서 지금부터 노력한 건 아니지 않니?”
“그래도 피임은 확실히…… 크흠, 방금 것은 못 들은 것으로 해.”
이미 다 들어 버렸단다. 조카님아.
나름 혼전 임신은 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 에이든을 샐쭉한 눈으로 보니 언제 우울했냐는 듯이 웃으며 나를 안아 올렸다. 그러자 씨엘이 소파로 폴짝 뛰어올라서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려고 비비적댔다.
“히유, 남녀 사이를 내가 뭐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에이, 비나 언니, 아니, 조카 며느님은 이곳의 모든 게 낯설 거야. 제 핏줄 없는 곳에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니?”
“…….”
“물론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해도 처음엔 힘들 거야. 연애하면서 여기를 오갈 때랑 달라. 그러니까 네가 옆에서 많이 도와주고 재롱도 부려.”
“응, 알겠어.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고모한테 배운 재롱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 가끔 밤에 해 주면 사비나가 웃으면서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를 정도야.”
재롱을 꼭 어린아이만 하라는 법은 없었다. 성인이 해도 재미있다는 듯 받아주는 이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나도 안 해 본 결혼이라 뭐라고 해 줄 말은 없었다. 그냥 결혼식 후에 행복하게 잘 지내라고 말해 줄 뿐이었다.
“고모가 자주 오면 사비나가 더 행복해할 거야.”
“이보다 더 자주 올 수는 없지 않니? 나 일주일에 절반은 여기에서 공부하는데.”
“일주일에 일주일을 지내면 안 되나?”
“안 돼! 안 그러면 에이의 나이 어린 삼촌이 득달같이 달려올 거니까.”
“아, 그건 좀 싫다. 전에 주말에 고모 데려갔다고 나를 어찌나 갈구는지 원, 때릴 수도 없고.”
“그랬다가는 네가 맞아. 우리 오빠가 힘이 세잖아.”
일전에 오빠가 주말에 오지 못한다고 해서 티그리스 공작저로 에이든을 따라간 적이 있었다. 한데 볼일이 일찍 끝났는지 토요일 저녁에 오빠가 도착했고 내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바로 티그리스 공작저로 득달같이 왔다.
그리고 나를 데려간 에이든을 쥐 잡듯이 잡았다. 오빠가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처음이라 혀를 내둘렀었다. 이러다가 에이든이 나이 어린 삼촌 앞에서 폭발할 것 같아서 내가 오빠를 데리고 얼른 돌아간 적이 있었다.
“어쨌든 이제 긴장이 좀 풀려?”
조잘조잘 이야기하다 보니 에이든의 창백한 안색에 혈색이 돌아왔다. 새신랑답게 오늘따라 멋지게 치장한 에이든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작은 손으로 쓱 올려 주고 옷깃을 바로 세웠다.
“고모랑 있으니까 긴장이 풀려서 이젠 졸린 것 같아.”
“뭐라는 거야. 자려거든 결혼하고 자!”
에이든의 이마에 내 이마를 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에이, 진짜진짜 행복해야 해. 이건 고모로서 하는 말이야.”
“응.”
“에이, 내가 사랑한다는 거 알지?”
“응, 알아. 나도 고모 사랑해.”
“에이, 이젠 늠름한 신랑이 되어서 기뻐서 방방 뛰는 신부를 맞이하러 가야지. 내가 기운을 좀 나눠 줄게.”
아직도 제대로 색이 돌아오지 않은 목걸이를 잡은 손으로 에이든의 손이 감싸게 했다.
“이게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이래. 아직 제대로 색이 돌아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 에이 소원도 들어줄 거야. 마음속으로 소원 빌어.”
“응. 고마워.”
눈을 감고 진지하게 기도하고서 에이든과 나는 동시에 눈을 떴다. 서로 눈을 마주 보며 방긋 웃었다.
“좀 이따 보자. 나이 많은 조카님아.”
“응, 좀 이따 봐. 우리 말랑 콩떡 고모.”
에이든의 긴장을 풀어 준 나는 곧장 본래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가니 씨엘을 붙잡은 고용인이 뭔가를 입혔다. 그러곤 결혼이 예정된 정원으로 가족과 함께 내려갔다.
그곳엔 이미 하객으로 가득했다. 결혼식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사비나의 손을 잡고 등장한 실베스터 국왕의 모습이 보였다.
울기는커녕 웃으면서 기뻐하는 사비나를 보는 실베스터 국왕의 눈동자엔 수심이 가득했다. 내가 결혼을 한다고 하면 우리 아빠도 저런 표정을 지으려나.
“이렇게 있으니까 나랑 이모가 결혼하는 거 같아.”
“응, 그건 아니야.”
기회를 놓치지 않은 나이 많은 조카님이 옆에서 꽃바구니를 든 채 나를 봤다. 사랑스러움이 가득 물든 눈동자엔 웃음이 가득했다.
“씨엘, 앞으로 가.”
실베스터 국왕의 손에서 사비나의 손을 이어받은 에이든을 본 나는 곧장 씨엘에게 말했다. 그러자 늠름한 모습으로 실베스터 왕국의 기사 제복을 갖춰 입은 씨엘이 앞장섰다.
화동 역할 2회차인 나와 콜린은 능숙하게 꽃잎을 뿌렸다. 우리가 뿌린 꽃잎을 사뿐히 지르밟은 두 사람의 얼굴엔 미소가 그득했다.
화동으로서 역할이 끝난 나는 곧장 아빠의 품에 안겼다. 그러곤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나직하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딸, 왜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거지?”
등을 다독다독하며 묻는 아빠의 말에 나는 아빠의 가슴에 이마를 콩- 맞댄 채 말했다.
“에이가 결혼하니까 괜히 마음이 심란해요.”
“왜?”
“내가 에이 결혼시키려고 콩가루 털리게 뛰어다니긴 했지만, 막상 결혼하니 섭섭해요. 마치 잘 키운 조카를 조카 며느님에게 덥석 안겨 주는 것 같아요.”
“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