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딸이 같이 자 달라고 칭얼거리듯 말했음에도 판테르 공작은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라피가 그 무엇보다도 소중했지만, 그의 어깨엔 수많은 영지민의 생명이 얹어졌다. 그가 서류에 사인할 때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그들의 삶이 망가질 수도 있고 윤택해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맥스가 간추려 놓은 중요한 서류를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시간이 촉박한 것은 어떻게든 오늘 내로 끝내야 했다. 그래야 내일 바로 시행되니 말이다.
가슴에 안긴 채 연방 하품만 하는 딸이 짠하기만 했다. 아비랑 같이 자고 싶어서 왔을 건데 그것 하나 들어주지 못해 이럴 때만큼은 조금 안타까웠다.
졸려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딸을 품은 판테르 공작은 자장가를 불러 줬다. 이건 라피만 들을 수 있는 특권이었다.
“라피, 잠들었니?”
부드럽게 사인하다가 제 딸을 봤다. 느른하게 눈동자를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가슴에 찰떡처럼 녹아내려 들러붙었다. 눈꺼풀이 움직이지 않자 판테르 공작은 제 조그만 딸을 소중하게 보듬으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께서 오셨군요.”
마침 안으로 서류를 가지러 온 맥스의 물음에 판테르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랑 같이 자고 싶다고 오신 것 같은데 괜히 제가 죄송해지는군요.”
“어쩔 수 없지. 이건 자네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니까.”
마지막 서류를 보고 또 본 판테르 공작은 꽃피는 봄날이건만 보릿고개를 겪으며 힘들어하는 영지민에게 구휼미를 내릴 것에 동의하는 사인을 했다.
“정말로 군량미 창고를 풀 생각이십니까?”
“음, 당분간은 전쟁이 터질 것 같지 않으니 군량미를 우선 구휼미로 쓰는 게 나을걸세. 식량이란 자고로 오래 두면 변질되니 말일세.”
세라피나를 이 세상에서 떠나보낸 후로 쌓이기 시작한 군량미는 이미 창고에 가득 쌓였다. 거둬들인 세수 중 일정 분량을 군량미로 돌려놨던지라 이젠 새로운 군량미 창고를 지어야 할 정도로 넘쳤다.
그런 군량미를 구휼미로 쓰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요즘 실베스터 왕국과의 교역에 동부도 서서히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고립되어 있다시피 한 동부는 현재 북부, 남부와도 교류를 하며 관련 산업이 부쩍 커졌다.
“이 모든 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구운 찹쌀떡 아가씨의 공이로군요.”
“그렇지, 우리 딸만 아니었으면 내가 지금처럼 바쁘지는 않았을 건데 말일세. 한데 이런 바쁨은 언제든지 환영이야.”
지금 동부가 누리고 있는 호황의 밑바탕은 라피가 깔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제 딸을 품은 판테르 공작은 마지막으로 사인한 서류를 맥스에게 넘겼다.
이젠 진짜로 딸과 함께 자야 할 시간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음, 자네는 좀 더 수고해 주게나. 나중에 섭섭지 않게 챙겨 주겠네.”
보좌관들이 일한 만큼 더 챙겨 주기에 급여 문제에 한해서는 이제껏 뒷말이 나온 적은 없었다.
라피를 품은 채 조심히 일어난 판테르 공작은 제 방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찰떡처럼 딱 달라붙어 곤히 잠든 딸은 언제 봐도 사랑스러웠다.
“라피, 이젠 어디 가지 말고 아빠랑 평생 같이 살자꾸나.”
지금도 눈을 뜨면 라피가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같이 잤다. 깨어나서 라피를 보고 아이가 제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았음에 가까스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아가씨는 제가 맡을 테니 이만 씻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 저택의 주인이 잠을 자지 않으니 스칼렛 역시 대기 중이었다. 라피를 안은 채 옷을 갈아입으려고 시도하는 판테르 공작을 본 스칼렛이 조심히 물었다.
“음, 그럼 잠시만 부탁하지.”
라피를 조심히 건네준 판테르 공작은 급히 욕실에 들어갔다. 그동안 라피를 안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스칼렛은 세상 모르게 잠든 아이를 보니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쩜 이리도 귀엽고 예쁠까.”
아이들은 원래 예쁘다지만 라피는 제가 모시는 고용주의 딸이라 그런지 사랑스러움이 배로 느껴졌다. 아이를 안은 채 궁둥이를 몇 번 토닥이지도 않았는데 판테르 공작이 쓱 모습을 드러냈다.
씨엘이 세수하듯이 물 칠만 하고 나온 티가 났다. 급히 옷을 갈아입은 판테르 공작은 스칼렛에게 라피를 건네받았다.
“그럼 이만 쉬시지요. 저흰 물러가겠습니다.”
라피를 품고 누운 판테르 공작을 향해 고용인들이 고개 숙인 후 밖으로 나갔다. 온전히 방 안에 단둘이 되자 판테르 공작은 제 딸을 꼭 안았다. 살아 있는 딸의 온기에 마음이 놓인 판테르 공작은 이불을 잡아당겨 덮어 줬다.
잠들 무렵 라피가 이불을 찰 걸 안 판테르 공작은 돌돌 말지는 않았다. 아이가 답답해서 밤에도 몇 번이나 깨는 걸 알기에 차라리 제가 잠을 제대로 못 자는 한이 있어도 그때그때 이불을 덮어 주는 게 나았다.
고롱고롱 숨소리를 내는, 제 품에 안긴 사랑스러운 온기를 머금은 딸의 볼에 입맞춤한 판테르 공작은 밤이 스민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라피, 우리 찹쌀떡, 잘 자렴. 내일 방긋 웃는 모습으로 아빠랑 보자꾸나.”
* * *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황도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비나와 에이든의 결혼이 발표되었다. 그렇다고 한들 사비나가 숟가락만 들고 티그리스 공작저로 들어오는 게 아니기에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무려 일 년이 지난 후에야 사비나와 에이든은 결혼할 수 있었다.
다섯 살의 봄날, 나는 또다시 화동이 되어야만 했다. 아니 무슨 결혼만 하면 나를 화동으로 못 써서 안달이란 말인가.
언니와 형부의 결혼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젠 나이 많은 조카님의 결혼까지 동원되니 약간 뚱한 표정을 지었다. 화동은 내가 아니어도 해 줄 귀족가의 아이들이 차고 넘치는데 말이다.
“어휴, 우리 아가씨! 뭐가 그리 불만일까요?”
“이런 거 하기 싫어요.”
헬레나의 물음에 나는 입술을 쭉 내밀며 말했다. 그러자 헬레나는 뭐가 그리 좋은지 환하게 웃으며 나를 안아 올렸다. 신랑의 어머니로 상당히 공을 들여 화장했을 텐데 내 볼에 비비적대며 얼굴을 문질렀다.
귀하고 아름다운 보석 장식이 된 드레스가 구겨지고 있음에도 헬레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천사가 되어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해 줄 나를 물고 빠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휴, 화동하기 싫었어요? 그래도 이번만 봐주세요.”
“잠깐만요. 그럼 내 결혼식 땐 말랑 콩떡 고모가 화동을 안 해 주는 건가요? 싫어요! 형도 해 주면서 나는 안 해 주다니, 그럴 수는 없다고요.”
한껏 차려입은 제이든이 헬레나의 말을 듣고 이번엔 제가 삐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아무도 제이든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네가 언제 결혼할지 알고!”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할래요.”
“상대는 있고?”
“당연히 없죠. 그래도 제가 결혼한다고 하면 여자들이 줄을 서지 않을까요?”
티그리스 가문의 차남이자 마법사 중에서 가슴이 조금 빵빵한 편인 제이든은 뻔뻔하게 말했다. 한데 그 말이 또 사실이기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무시하며 각자의 일에 몰두할 뿐이었다.
“그럼 나 고모랑 결혼할래.”
네가 콜린이니?
아직도 결혼해 달라고 조르는 여섯 살 콜린은 오늘 나와 함께 화동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콜린은 그저 나랑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에 좋아서 한쪽에서 헤실헤실 웃고만 있다가 제이든의 말에 눈빛이 바뀌었다. 누가 아퀼라 공작가 아닐까 봐 제이든을 쪼아 버릴 것처럼 노려봤다.
“이모는 나랑 결혼할 거야. 이 늙은 형님아!”
“뭐? 이 조그만 게 어디서 형님한테 그딴 말을 하는 거야. 우리 고모랑 결혼하면 우선 성인이 되고 오지? 근데 나는 이미 성인이라 고모랑 당장이라도 결혼할 수 있지.”
“안 돼! 이모는 내 거라고. 나랑 결혼할 거야. 내가 매일매일 사랑해 주고 키스해 줄 거야.”
언니의 로맨스 소설 읽어 주기 효과가 오늘도 발휘된 콜린의 말에 제이든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고모님, 대체 애를 어떻게 키웠기에…….”
제이든의 물음에 언니는 고개를 홱 돌려 답을 피했다. 차마 태교를 로맨스 소설로 했다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으휴, 잘한다. 잘해. 넌 나이 어린 동생이랑도 이리 싸우더냐. 나이가 울겠다. 나이가 울겠어.”
보다 못한 다니엘이 혀를 차며 한 소리했다.
“아버지, 나이는 어려도 남자는 남자라고요.”
제이든의 대꾸에 다니엘은 할 말을 잃은 듯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이 많은 조카님이 말은 제대로 했네요. 라피, 들었지? 이 세상에서 오빠랑 아버지 빼고 다 남자야. 그러니까 조심해야 한단다.”
열다섯 살이 된 오빠는 2년 전보다 부쩍 컸다. 웬만한 성인만큼 커 버린 오빠는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에 비해 나는 아직도 짜리몽땅이었다. 아빠가 기를 쓰며 먹이는데도 내 키는 눈곱만큼 밖에 크지 않았다. 콜린도 나보다 훨씬 많이 컸는데.
“오빠, 멋있어.”
“정말?”
“응, 새신랑 같아.”
제복을 입은 오빠는 웬만한 남자보다 훨씬 멋져 보였다. 다른 여자한테 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오빠, 언제 결혼할 거야?”
“왜? 오빠가 결혼하면 라피는 뭐 해 줄 건데?”
“으음, 라피는 오빠가 결혼하지 말라고 울 거야.”
“그 정도로 오빠가 좋은 거니? 나도 우리 라피가 결혼하면 그놈의 새끼…… 읍!”
오빠의 입을 언니가 틀어막으며 잠깐 날카롭게 노려봤다. 마치 어린애한테 허튼소리 하지 말라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 눈빛으로 보다가 나를 보며 날카로움을 뭉그러뜨렸다.
“우리 라피가 누구랑 결혼할지 모르겠지만 언니는 무조건 응원해 줄게.”
“정말요?”
“그럼, 우리 라피 덕분에 언니가 정식으로 결혼할 수 있었잖니. 그러니까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언니한테 말하렴.”
“말할 필요 없어요. 이모랑 제가 결혼할 거니까요.”
여전히 나와의 결혼을 꿈꾸는 콜린을 본 언니는 픽, 웃었다.
미야옹.
잠시 보이지 않았던 씨엘이 등장했다. 빨간 나비넥타이를 착용한 씨엘은 금실로 수놓은 빨간 망토를 두른 채 뛰어왔다.
“씨엘, 치장했네.”
냐옹, 냥!
씨엘이 내게 달려오려고 했지만, 그 전에 할아버지가 투명한 실드를 쳐서 오지 못하게 막았다.
“지금은 안 돼. 우리 말랑 콩떡 옷이 구겨지면 안 되니까.”
할아버지의 말에 씨엘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대놓고 접근하지 못하게 하지는 않았다. 씨엘은 누가 뭐래도 나를 지키기 위해 다친 용감한 고양이었다. 게다가 실베스터 왕국의 기사 작위를 가진 고양이었다.
오늘 같은 날 멋들어지게 치장한 씨엘은 화동인 나와 콜린 앞에 서서 걷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한동안 언니에게 안긴 채 가족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아빠가 느긋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붉은색 제복을 입은 아빠는 오늘도 너무나 멋져 보였다. 황홀한 눈동자로 아빠를 봤다.
“아버님, 조카님, 큰일 났습니다.”
“음? 뭐가 큰일인가?”
웬만한 일로는 큰일이라도 치부하지 않는 아빠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할아버지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방금 새신랑을 잠시 보고 왔는데 고장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