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108)화 (108/164)

108화. 

보들보들하고 매끄러운 감촉과 반짝반짝 눈을 현혹하는 존재에 기꺼이 넘어가 줬다.

“라피, 지금은 이런 걸 볼 시간이 없단다. 얼른 연회에 참석할 준비를 해야지.”

나는 딱히 준비하고 꾸밀 것도 없었지만 아빠의 말에 아쉬운 마음을 접고 돌아서야만 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햇쓰니까, 얼른 내일이 왓쓰면 좋겠다.”

연회에 참석하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체력을 필요로 했다. 저질 체력의 선두 주자인 어린 마법사는 매일 연회에 참석하는 게 매우 힘들었다. 그걸 알기에 아빠는 연회에 참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안고 당당하게 돌아오셨다.

“후아암.”

“오늘만 참으면 실컷 쉴 수 있으니 조금만 견뎌 주렴.”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아빠도 평소처럼 내 핑계를 대고 일찍 빠져나올 수 없음을 미리 알려 줬다. 연신 하품하는 내가 안쓰러운지 아빠는 나를 안은 채 등을 다독였다. 사실은 밤에 아빠랑 자지 않는 날에는 항상 마법 공부를 하느라 피곤이 중첩된 상태였다.

아빠에게 기댄 채 잠시 겉잠을 잤지만, 그마저도 마차가 멈추자 강제로 깨야만 했다.

“씨엘! 가자.”

평소엔 이미 내빼고도 남았을 녀석인데 황궁에 올 때면 기를 쓰고 따라왔다. 씨엘이 당당하게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듯 발을 옮기자 우리도 뒤따랐다.

가는 중에 몇몇이 우리 쪽으로 접근을 시도했지만, 아빠가 눈빛으로 칼같이 차단하며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눈에 너무 힘주지 말게나. 그러다가 눈이 먼저 튀어나올 것 같으니.”

아빠의 친구인 리건이 어디선가 홀연히 등장했다. 천사처럼 잔잔한 미소를 지은 리건을 본 나는 곧장 치맛자락을 붙잡고 예의를 차렸다.

“안녕하…….”

“우리 사이에 그런 예의는 필요 없단다.”

“우리 사이라니! 우리 사이가 대체 어떤데, 나한테 인사조차 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말투는 불퉁했지만,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우리 사이? 넘어지면 등을 밟고 지나가고, 손에 가시가 박히면 더 힘줘서 손잡고, 절벽 위에서 가볍게 밀어 주는 사이랄까.”

어? 지금 이건 아빠가 친구에게 장난질하는 건가.

평소 아빠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말을 하자 리건은 조금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덩치에 맞지도 않은 표정은 지우지?”

“하여튼 냉정하다니까. 냉정한 놈치고 농담이 수준 이상이었어. 합격이야.”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동시에 이런 친구를 둔 아빠가 부러웠다. 

마법사가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에만 매달리다 보니 내 또래의 아이들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심지어 생일마저 내 의사를 고려하지 않고 정해져 연회에 아이들이 오지 않았다.

여하튼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친구를 사귀었으면 했지만, 아빠가 칼같이 차단했다. 심지어는 티그리스 공작저와 아퀼라 공작저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된 게 주변에 콜린을 제외하고 내 또래의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일전에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했지만, 아빠는 역시나 거절했다. 심지어는 놀이 친구로 보좌관들 아이를 보내 달라고 직접 요청을 했지만, 역시나 잘라 버렸다.

친구는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생긴다나 어쩐다나. 그런 친구가 더 좋은 친구가 될 확률이 높으니 굳이 내 신분을 밝히며 억지로 사귈 필요는 없다고 하셨다.

아빠 말에도 일리가 있긴 했지만, 우선은 누구라도 좋으니 만나 봐야 친구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저번에 아이 보호소에서 만난 애들을 떠올리니 절로 고개를 흔들게 되었지만.

한동안 두 사람이 보기 좋게 말싸움하는 것을 보던 나는 아빠에게 거리를 뒀다. 그러자 씨엘이 바로 옆에 찰싹 붙었다. 아빠 대신 호위라도 해 줄 셈인가 보다.

북적이는 연회장에서 두리번거릴 때 누군가의 발에 걸려 중심을 잃었다. 허우적대며 앞으로 넘어지려는 찰나에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은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봤다.

“판테르 양, 왜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거지?”

모르간 후작이었다. 약간 수심에 찬 얼굴의 모르간 후작은 나를 안은 팔을 자연스레 풀며 물었다.

“아빠가 친구랑 만나서 이야기하고 계시는데 심심해서요.”

“판테르 양의 심정은 모르는 바가 아니나 이런 곳에서는 어른과 함께 있는 게 안전하단다.”

“니에, 알려 주셔서 감사함다. 근데 파이는 갠차나요?”

“판테르 양 덕분에 지금은 괜찮아졌단다. 월터는 조만간 가문에서 제적할 생각이란다.”

후계자 수업을 받을 정도로 머리 좋은 성인 아들을 패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제적하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한 몇 년간 유배 아닌 유배를 보내 정신 차릴 때쯤 다시 데려와 후계자로 만드는데 말이다.

그만큼 모르간 후작 부부가 받은 상처와 충격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월터를 제적하면 혹시 네게 해코지를 하러 올지도 모르니 주변에 꼭 호위를 두렴.”

“니에, 알겟씁니다.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나야 주변에 항상 사람이 넘쳐흘렀다. 아니 아예 바깥으로 나가는 게 힘들었다. 가끔 나들이 나갈 때만 빼고, 항상 공작저 안에서만 생활했기에 그 점은 안심이었다.

“파이가 편지를 적었단다. 이걸 어떻게 전해 줄까 했는데 마침 잘되었구나.”

가슴에서 편지를 꺼낸 모르간 후작은 짊어지고 있는 내 가방에 쓱 넣어줬다.

“가방이 상당히 묵직하구나.”

죄송해요. 우리 아빠랑 할아버지가 아직도 안심이 안 되는지 혹시 몰라 이것저것 넣어 주신 물품이랍니다.

“파이, 건강하게 잘 키워 주세요.”

“풉, 그럴 예정이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고맙구나.”

“니에.”

“비록 판테르 군이 말한 것처럼 반짝반짝한 것들로 선물을 보냈다만 그런 것으로 우리 아들의 목숨값을 대신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단다.”

이 세상 전부를 줘도 아깝지 않은 아들이란 건가. 하긴 그러니까 저번에 일리나스 자작에게 아빠가 모르간 후작가의 재산 절반쯤 떼어 줄 거냔 물음에 바로 대답할 정도니 말이다.

“그럼 다음에 연이 있다면 만나자꾸나. 그 전에 판테르 공작님께 데려가주…….”

“아니 이게 누구니, 포슬포슬한 백설기가 여기 있었구나.”

모르간 후작이 나를 데려다준다고 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까만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제복 차림의 미네르바였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치맛자락을 붙잡고 인사하기가 무섭게 미네르바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러자 씨엘이 곧장 점프해서 내 품에 안겨들었다.

“어쩜 우리 백설기는 포슬포슬해서 딱 보기 좋구나. 한데 판테르 공작님은 어디로 가고 모르간 후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니?”

“넘어지려고 할 때 후작님이 도와줫써요.”

“오, 그랬구나. 모르간 후작님, 우리 미래의 며느님을 도와줘서 정말 고맙군요.”

“네, 네? 미래의 며느님이라니…… 판테르 공작님과 이미 이야기가 끝난 겁니까?”

“아니, 내 마음속의 며느님입니다. 어쨌든 판테르 공작님께 데려갈 터이니 모르간 후작은 연회를 즐기도록 하시지요.”

그간 보지 못했던 미네르바는 나를 안은 채 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답을 하듯 나도 방긋 웃음을 지었다.

“모르간 후작은 티그리스 공작과 대립각을 세우는 마법탑의 수장이란다.”

“알고 잇써요.”

“한데 이야기를 나누다니, 개인적인 인연이 닿은 거니?”

“니에, 후작님의 아들인 파이를 알고 잇써요.”

“저런, 그렇구나. 누군지 모르겠지만 미래의 약혼자는 늘어나는 경쟁자를 경계하면서 꼬랑지 빠지게 고생 좀 하겠는걸.”

보통 귀족가의 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정략혼이 약속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이 나이에 벌써 약혼 내정자가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내게 어느 가문의 누군가와 약혼하라는 말조차 한 적이 없었다.

잠시 미네르바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뒤에 사람을 줄줄이 단 채 이쪽으로 왔다. 그냥 지나가려나 했지만 나를 안은 미네르바 앞에 선 존재는 까마득하게 밑을 내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가 작았다.

황금색 망토를 두른 상당히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아이는 나를 빤히 봤다.

“네가 세라피나 판테르인가.”

목소리 톤은 상당히 어렸는데 말투가 설익은 어른의 것을 따라 하는 티가 드러났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루피노 공작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나를 안은 미네르바의 인사에 그때야 이 아이가 황태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사를 한 후에 나를 내려 줘서 비로소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첨으로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세라피나 판테르라고 합니다.”

간단한 예를 표하며 최대한 발음이 새지 않게 또박또박 인사를 했다. 한데 황태자는 뚱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판테르 양에게 물어볼 게 있네. 베릴 백작가의 후계자와 트러블이 일어났다고?”

“네.”

“그곳에서 다니엘 티그리스 님이 나타나서 판테르 양을 데려갔다고 하던데.”

“맞아요.”

왠지 추궁당한 느낌이었지만 나보다 더 유창한 발음으로 말하는 황태자를 빤히 봤다. 여기에서 먼저 물러나는 것은 기 싸움에서 진 게 되기에 꿋꿋하게 버텼다.

“베릴 백작님이 내 외삼촌이야.”

“니에?”

순간 놀라 나도 모르게 평소 말투로 황태자에게 물었다. 이거 지금 나 때문에 제 외사촌이 창피를 당했다고 싸우자고 온 건가.

긴장한 채,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할 때 황태자가 픽, 웃으며 말했다. 

“놀란 표정 짓지 마. 올리버 베릴과 있었던 일로 판테르 양을 탓하려는 거 아니야. 오히려 고맙다고 말해 주려고 여기 왔어.”

“음?”

“유일한 남자애라서 그런지 올리버 형을 오냐오냐 길러서 너무 버릇이 없었거든. 그날 있었던 일로 기가 좀 죽은 것 같아.”

난 또 황태자가 제 외사촌과 트러블이 생긴 것 때문에 원한을 품고 싸우려고 온 줄 알았다. 한데 생각 외로 어린애 사고가 너무나 정상적이었다. 이건 황제를 안 닮은 게 분명했다.

“그날 올리버 형이 저지른 실수는 내가 사과할게. 그러니 나를 아바마마와 같은 시선으로 보지 마.”

뭐지? 이제 네 살짜리인데 말하는 게 성인 같았다. 이건 책 빙의를 했거나 갑자기 성인이었을 때의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존재만이 할 수 있는 포스가 느껴졌다.

내 입을 다물게 한 황태자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바마마가 정략혼을 제의했다던데 그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난 상관없어. 하지만 세 가문을 하나로 묶는 판테르 양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훗날 황제가 되었을 때 드라코 공작가와 더불어 다른 공작가의 힘이 필요함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 가문을 엮는 구심점이 되는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뜻을 직설적으로 내비쳤다.

“뭐 그런 거라면…….”

지금은 황제가 지은 죄가 있기도 했고 아빠의 권세가 찌를 듯이 높았다. 그렇기에 현재는 편히 지내고 있지만, 미래는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일이다. 무조건 황가와 반목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했다.

비록 황제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그게 지금의 황태자의 잘못은 아니었다.

“좋아요. 그럼 우리 친구 해요.”

“좋아. 그럼 세라피나라고 부를게. 미래의 멋진 마법사님.”

황태자의 조그만 손이 내 손을 잡더니 슬쩍 올려 제 입술에 포갰다. 짧은 입맞춤에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 이름은 클레어런스 사반나, 클렌이라고 불러도 좋아.”

“저는 라삐라고 부르면 돼요. 끌렌 님, 그럼 다음 만남을 기대하겟씁니다.”

“풋! 아직 발음이 안 되나 보네. 다음에 볼 땐 내 이름을 부드럽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 그럼 이만.”

뒤돌아선 황태자를 본 나는 혀를 내둘렀다. 짧은 만남으로 제 존재를 대놓고 드러낸 탓에 내가 묻혀 버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제 이름은 가넷 페이지입니다. 황태자 전하의 호위 단장입니다. 전하께서 바쁜 일이 있어서 이리 가신 거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상당히 밝은 인상의 호위 단장이 나를 매우 아련한 시선으로 봤다. 그러곤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하고는 얼른 클레어런스를 따라갔다.

그를 본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나는 황태자, 아니, 클레어런스에 관한 간단한 평가를 했다.

진짜 좋은 놈이거나, 아니면 영악한 놈,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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