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이런 상황에 오게 되어 죄송합니다. 저는 에이든 티그리스입니다.”
“저는 동생인 제이든 티그리스입니다. 모르간 후작님, 그리고 후작부인.”
평소엔 본 적 없는 정중한 목소리로 말한 에이든과 제이든이 모르간 후작 부부에게 인사를 했다.
“이런 일을 보여서 나도 민망하고 안타깝군. 티그리스 군, 판테르 양을 데리러 온 것인가.”
“네, 할아버지께서 고모가 이곳에 온 것을 알아채시고 노발대발…… 크흠, 어쨌든 당장 데려오라고 명을 내려서 저희가 왔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할아버지께서 직접 오시려고 했지만, 아버지께서 말리시며 저희를 보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여기를 날리고도 남으실 분이시라.”
적의 소굴에 다음 대의 후계자 둘을 동시에 보낸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에이든과 제이든은 그런 것엔 신경 쓰지 않고 온 모양이다. 아니 정확히는 할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며 이곳을 뿌셔뿌셔 할 것 같으니 다니엘이 아들 둘을 보낸 듯했다.
“우리 나이 많은 조카님들한텐 나는 안 보이나 봐?”
“안녕하셨는지요. 고모의 후광 때문에 잠시 눈이 멀어 보지 못해 인사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나와 달리 에이든과 제이든은 오빠를 대함에 상당히 어색해했다.
“왜 너희가 온 거야?”
오더라도 아빠가 직접 행차할 줄 알았다. 한데 내 생각과는 다른 이가 오자 물었다.
“응? 아, 가위바위보해서 할아버지가 이기셨거든.”
“맞아. 고모할아버지랑 고모부는 지금 분루를 삼키는 중이셔. 그러니까 얼른 갈 준비하자.”
에이든과 제이든을 본 나는 뒤돌아봤다. 새끼 고양이처럼 놀란 두 눈동자로 나를 보며 바들바들 떠는 파이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 이제 하부지네 집에 가야 해.”
“안 가면 안 돼?”
“응, 안 돼. 나는 가더라도 걱정하지 마. 파이한테는 아빠랑 엄마가 잇쓰니까.”
자그만 고갯짓을 하는 새끼 고양이처럼 안쓰러웠지만, 언제까지 내가 곁에 두고 보호해 줄 순 없었다. 나도 이 세계에서는 어린아이니까 말이다.
“고모, 이제 나가자. 여긴 삼촌이 알아서 뒷수습 해 줄 거야.”
“맞아. 얼른 나가자. 모르간 후작님, 그리고 후작부인! 우리 고모는 저희가 데려가겠습니다.”
오자마자 볼일만 보고 날름 몸을 빼려는 에이든과 제이든은 갑자기 서로 보는 시선에서 불꽃이 튀겼다.
“말랑 콩떡이 1센티 찌그러진 것 같아.”
“어, 그러네. 얼른 가서 확대하자. 고모, 집에 할머니랑 어머니도 오셨어. 얼른 가자.”
“음? 잠깐만! 그럼 영지에 누가 잇써?”
내 물음에 에이든과 제이든은 어깨를 으쓱였다.
“고용인들이 있지. 괜찮아. 무슨 일 터지면 바로 워프 게이트 타고 가면 되니까. 그러니…… 제이든, 너 고모 안 내려놔! 오늘은 내가 안고 가는 날이야.”
“헹, 말랑 콩떡은 먼저 안은 사람이 임자야.”
아, 이거 왠지 작년과 비슷한 것 같다. 여기 남의 집안인데 애들이 체면도 없는지 이게 뭐 하는 짓이더냐.
“이 조카님들아! 콩가루 털려서 더 찌그러질 것 같아! 천천히 뛰어!”
뀨우우우!
조카들이 뛰자 씨엘도 덩달아 맹렬한 기세로 뛰어왔다.
라피가 조카들에게 안겨서 사라지자 응접실 안은 다시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자! 봤죠? 우리 조카님들은 고작 두 살 차이가 나는데 후계자 싸움 따윈 하지 않습니다. 나이 차이 많은 동생에게 제 자리를 위협당할 것 같아 버리는 건 쓰레기나 하는 짓입니다.”
동생이 있다는 걸 감사히 여기지는 못할망정 어린아이를 제 경쟁자로 여기고 없애려고 한 월터를 비아냥댄 유진이었다. 그 말을 들은 월터는 각 집안마다 사정이 다르다고 말했다가 후작부인의 째림에 픽, 웃었다.
“월터 모르간, 네 죄를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더냐.”
“저한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잘못했죠. 제게 완벽한 후계자 자리를 물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애를 낳은 거 아닙니까.”
아직도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월터를 본 엘런이 고개를 젓더니 소파에서 일어났다.
“형님, 아직도 계속 남의 탓만 하실 생각이라면 전 다시는 당신을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이 집에 자주 오는 것은 아니지만.”
눈살을 찌푸린 엘런은 파이퍼를 봤다. 기억이 빨리 돌아와 이 사건을 질질 끌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기억이 조금이라도 늦게 돌아왔다면 월터에게 어떤 짓을 당했을지 모른다. 아니 이번엔 버려지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죽었을 게 분명했다.
“파이퍼, 여기 있기 싫으면 우리 집으로 가자. 네겐 고모의 집이니까. 비록 반겨 주는 이는 없더라도 최소한 너를 위협하는 존재는 없어. 오지도 못할 거고.”
엘런의 말에 파이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 어미와 아비를 볼 뿐이었다.
“월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남 탓만 하는 너를 보니 내가 잘못 키운 것 같구나. 후우, 당분간 별채에 가서 처분을 기다리거라. 뭐 하느냐. 월터를 별채로 데려가지 않고.”
월터가 반발하며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모르간 후작가의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그의 입을 막고 바둥대는 몸을 간단히 제압해 끌고 갔다.
“이제껏 파이퍼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월터의 수족도 움직였을걸세. 전부 잘라내서 내게 데려오게. 그리고 월터를 지지하는 가신들도 마찬가지일세.”
모르간 후작의 명을 들은 이가 소리 없이 흩어졌다. 일개 시종과 시녀인 줄 알았는데 그들의 움직임을 보니 전부 기사급의 실력자였다.
“후우, 정말이지 부끄러운 모습만 보여서 민망하군 그래. 판테르 군, 우리 아들을 구해 데려와 준 판테르 양에게 은혜를 갚고 싶네. 뭘 좋아하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그래도 실종된 제 아들을 데려온 라피에게 입 쓱 닦을 생각은 아닌 모르간 후작이 먼저 제의를 했다. 그러자 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우리 라피는 반짝반짝한 돌멩이와 금속을 매우 좋아합니다. 작년엔 스노우 젬을 준다는 유혹에 넘어가 실베스터 왕국에 갔다 왔을 정도였지요.”
“아, 그렇군. 나도 실베스터 왕국 사정은 건너들은 적이 있었네. 판테르 양이 실베스터 왕자비의 출산을 도와주고 더불어 마법으로 구했다지?”
“네, 우리 라피는 못 하는 게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실베스터 왕자가 고모님이라고 부르면서 따르겠습니까. 후훗.”
어쩌다 보니 라피를 자랑하게 된 유진의 어깨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잘난 동생을 둔 오빠는 단 한 번도 그걸 질투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그 모습을 본 모르간 후작은 월터를 생각하니 속이 더 아렸다.
“조만간 판테르 저택으로 선물을 보내겠네. 오늘 일은 정말 고마운데 집안 사정이 어지러워 제대로 된 대접을 하지 못한 점 정말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한동안 라피 자랑을 한 유진이 나가자 엘런 역시 나갈 준비를 했다.
“엘런, 오늘 일은 정말 고맙구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형님의 행동은 너무했습니다. 만일 이번 일을 용서해 준다면 파이퍼에게 실망감을 안겨 줄 겁니다. 그리고 타인의 비난을 받을 게 분명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어쨌든 고맙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거든 내게 도움을 청하거라. 있는 힘껏 해결해 주마.”
“저보다는 파이퍼의 일을 먼저 해결하시는 게 옳습니다. 파이퍼, 아직 결정하지 못했니?”
엘런의 부드러운 음색에 파이퍼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제 어미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은 엘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후의 일은 모르간 후작가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더는 제가 뭐라고 왈가왈부할 처지가 못 되었다.
“어? 기다리고 있었어?”
“어. 그냥 가려다가 생각해 보니 너, 우리 마차 타고 왔잖아.”
엘런은 마차 안으로 자연스레 들어갔다. 마차 문을 닫자 다시 기사 몇이 호위를 위해 둘러쌌다. 아까완 달리 그 수가 절반쯤 줄어든 것으로 봐서는 라피를 따라간 게 분명했다.
“고맙다. 오늘 일은 정말 잊지 못할 거야.”
“당연하지, 잊지 마라. 우리가 잊더라도 너희는 잊으면 안 돼.”
유진이 등 뒤의 유리창을 톡톡 두들기자 마차가 부드럽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근데 말이야. 라피, 진짜 똑똑하더라.”
“어, 우리 라피가 똑똑하긴 하지.”
알게 모르게 광대가 서서히 승천하는 유진을 본 엘런이 조심스레 말했다.
“혹시 내 형님이 되어 볼 생각은 없어? 라피는 내가 모시고 살게.”
순간 유진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다. 한없이 온화한 표정을 지은 유진이 거만한 포즈를 취했다.
“이럴 때 작년에 라피가 한 말이 우리 집안에서 회자되어 퍼졌더군. 그때 한 말 내가 해 줄까?”
“응? 뭔데?”
대체 세 살짜리 어린애가 뭐라고 말했기에 판테르 가에서 회자되었는지 궁금해진 엘런의 물음에 유진이 진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년 이맘때쯤에 공짜 맘마 먹고 싶어?”
“미안, 그냥 우리 집안 돈 내고 아카데미 밥을 먹을게.”
“잘 생각했어. 그 말을 우리 집안 어르신들 앞에서 했으면 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번 죽었을 거야.”
티그리스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깨끗하게 씻겨진 후 새 옷으로 갈아입혀졌다.
“모르간 후작저에 다녀왔으니 때 묻은 것은 전부 없애는 게 맞아.”
강경한 표정의 할아버지는 나를 들어 올려 사방을 확인한 후에야 안심했는지 폭 안았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이 할아비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아느냐. 우리 말랑 콩떡만큼 심장이 쪼그라들었어.”
“할아버지의 말씀이 맞아. 네가 유진과 잘 놀다가 웬 아이를 데려가서 여관으로 간 것도 모자라 모르간 후작저로 가다니, 우리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단다.”
판테르 기사뿐만 아니라 티그리스 가문에서도 나를 비밀리에 호위하는 겸 감시 역으로 사람을 보낸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정확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린 다니엘을 본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아까 있었던 일에 관해 설명하기도 전에 말이 막혔다.
“또 이캐저캐 해서 요러캐 되었어요, 라고 하면 오빠한테 혼날 줄 알거라.”
우리 가족들은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매우 간략하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자세히 풀어서 말했다.
“그러니까 라피가 유진과 함께 모르간 후작놈의 둘째 아들을 구했단 말이더냐.”
“니에.”
“그래. 아이를 구한 건 참 잘한 일이구나. 칭찬받아 마땅해. 그나저나 그 집안도 한바탕 물갈이를 하겠군. 모르간 후작의 성격에 첫째를 가만 놔둘 위인이 아니니 말이야.”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더니 그만큼 상대를 잘 아는 듯했다.
“그 집안도 참 볼만하군요. 우리 집의 둘째는 후계자 따윈 생각하지도 않는데.”
소파에 앉아서 강 건너 불구경 중인 제이든을 본 다니엘이 한 마디 했지만, 절대 자존심 상해하거나 하지 않았다.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제이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가 왜 가주 노릇하면서 하고 싶은 것도 꾹 참아야 합니까. 전 고모가 소개해 줄 여자 만나서 결혼해서 가정에 충실할 겁니다. 그러니 개고생은 형 혼자 하는 것으로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