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화목하고 밝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파이퍼는 월터를 정면으로 보려 하지 않았다. 여전히 내 등 뒤로 몸을 쑤셔 넣었다. 파이퍼의 떨림이 내 옷을 뚫고 스며들 정도로 녀석은 진심으로 월터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파, 파이퍼 그게 무슨 말이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은 월터가 파이퍼에게 물었지만 아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옷을 꽉 쥔 채 얼굴을 묻을 뿐이었다.
“파이퍼의 기억이 정상이 아니라서 실언을 한 것 같군. 그러니 너무 섭섭해하지 말거라.”
“아,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파이퍼, 형이야. 형, 모르겠어?”
파이퍼를 안심시키려는 듯 월터가 손을 내밀며 조심히 말했다. 하지만 파이퍼는 그럴수록 온몸으로 거부했다.
분명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왜 형을 이토록 경계하고 무서워하는 것인지 그림이 그려졌다. 겉으로는 우애 있게 행동해도 돌아서면 무시하는 건가 싶었다.
“파란 눈동자를 한 사람이 날 버렸어요.”
“그게 정말이더냐?”
파이퍼의 말에 모르간 후작의 표정이 굳었다. 그렇다고 파이퍼를 버린 존재를 쉽게 유추할 수는 없었다. 파란 눈동자를 지닌 사람이 이 방 안에도 여럿 있으니 말이다.
“파이퍼, 이 세상엔 파란 눈동자를 지닌 사람은 많단다.”
후작부인이 조심히 말했지만 파이퍼는 여전히 내 뒤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으음, 그치만 이상해요. 파이가 딴 사람 볼 땐 절대 이런 말 안 햇써요.”
실제로 파이퍼는 파란 눈동자를 지닌 사람을 보고 자신을 버린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방 안에 있는 파란 눈동자를 지닌 사람을 볼 때도 입을 다물었다.
그렇기에 난 합리적인 의심을 털어놓았다. 파이퍼가 비록 제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들 자신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준 이까지 전부 잊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넌 누구기에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지?”
순간 싸늘하게 얼어붙은 목소리로 묻는 월터를 본 오빠의 표정이 굳었다. 아니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로 노려봤다. 만약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면 월터의 손은 이미 깔끔하게 잘렸을 것 같았다.
“네 동생의 라이벌이다. 그러니 그런 말투로 묻는 건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네? 라, 라이벌이요? 그렇다면 이 꼬마도 마법사란 말입니까. 하지만 마법탑엔 이런 꼬마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습니다.”
의심 가득한 눈동자로 나를 보는 월터의 표정은 이내 모르간 후작의 말을 듣고 일그러졌다.
“그 아이는 세라피나 판테르 양이다. 외가인 티그리스 공작가의 핏줄을 타고나서 그런 것 같구나.”
“우리 가문과 적대 가문의 핏줄 아닙니까. 당장 죽여서 후환을…….”
챙-
매우 짧은 순간에 오빠의 검이 뽑히고, 나와 월터 사이를 갈랐다. 비록 아카데미 보급용 검일지라도 오빠의 손에 들리니 명검보다 더 빛나고 아름다워 보였다. 살기로 감싼 검 주변 공기가 바르르 떨리는 듯했다.
“죽고 싶어 환장했나 보군. 이 기회에 영지전 한 판 할 생각인가? 모르간 후작가가 얼마나 잘난 줄 모르겠지만 세 공작가의 공격을 무사히 피하기엔 무리일 것 같은데.”
으르르릉.
오빠가 서슬이 퍼런 목소리로 말하자 씨엘도 털을 곤두세우며 낮게 경고음을 날렸다. 내게 손대려는 그 찰나에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상상이 가능했다.
“너, 넌…….”
“형님, 너무 가셨네요. 제 아카데미 동기인 유진 판테르입니다. 그리고 파이퍼를 구한 이가 바로 라피입니다. 은인을 죽이자니 동서고금을 통틀어 어이없는 말이군요. 그것도 제 오라비의 면전에서 네 살짜리 어린 동생을 죽이자니. 쯧쯧.”
엘런이 혀를 차며 말하자 그때야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월터는 입을 다물었다.
“미안하네, 월터가 너무 감정적으로 말해서. 후우, 넌 이만 물러가거라.”
모르간 후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하자 월터는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바르게 폈다. 이를 꽉 깨문 티를 낸 것을 본 나는 우리가 떠난 후에 파이퍼를 어떻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파이, 아까 왜 이 아저씨 보고 그런 말을 한 거야?”
이왕 밝히려는 거 여기서 다 밝히고 월터와 격리된 곳에서 완벽한 보호를 받아 마땅했다. 그렇기에 나는 잠시 소강상태인 분위기에 다시 불을 싸질렀다. 재만 남을 정도로 완전히 활활 타오르게 말이다.
“나보고 싫다고 했어. 재수 없다고…… 내가 앞길에 걸림돌이 될 거라고…….”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 것치고 너무나 자세히 설명했다. 그 말에 주변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파이, 너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그걸 어떻게 알아낸 거야?”
“나, 나…… 사실은 형 보자마자 기억이 났어.”
모르간 영지에서 떨어진 곳으로 야유회를 핑계로 데려가 온갖 저주를 내뱉으며 버렸다. 버리지 말라고 사정사정하며 매달렸지만, 월터는 파이퍼를 버렸다. 의지할 곳 없는 파이퍼는 끔찍한 나날을 맞이했다.
저를 위해 주고 보듬어 주는 이들 없는 곳에서 파이퍼는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따뜻함과 안락함을 알고 있던 아이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살아남기는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굶주림에 허덕이며 구걸을 했고 남의 짐 마차에 몰래 올라타기도 했다. 나중에 걸려서 혼나긴 했지만 무조건 수도로 가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고 한다.
짐마차 주인의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해 주는 대가로 수도까지 왔으나 기억이 없는 파이퍼는 뒷골목을 전전하며 한 달을 버텨냈다. 그러던 중 나에게 발견되어 이곳까지 왔다.
죽지 못해 간신히 살아난 어린아이의 말에 주변은 경악 그 자체가 되었다. 실종된 동안 있었던 일을 단 몇 분 만에 짧게 말한 파이퍼는 아직도 불안에 떤 눈동자를 한 채 나를 붙잡았다.
제집이지만 아무도 믿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그게 참말이니? 그게 진정…… 어, 어떻게 파이퍼에게 이럴 수가 있니! 네가 파이퍼와 사이좋게 지내서 난 정말 행복했는데.”
분노가 치밀어 오른 후작부인의 말에 월터는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파이퍼를 버렸다는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여기 있어.”
조그만 목소리로 간신히 말한 파이퍼가 내민 것은 아까 내가 준 주머니였다. 두 손으로 뭔가를 꽉 쥐고 있던 것을 내게 내밀었다. 그걸 받아 주머니를 톡톡 털어내자 손바닥 위에 초록색 보석으로 만든 커프스 버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건…… 네 친모가 만들어 준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커프스 버튼이 아니더냐.”
이런 호재가 있나. 빼도 박도 하지 못한 증거물 앞에서 월터의 입술이 꽉 깨물렸다.
“제가 버리지 말라고 형 소매를 붙잡고 무릎 꿇고 빌었어요. 그때 떨어진 거예요.”
배고픔과 추위에 떨면서 이걸 팔지 않은 파이퍼의 손을 꼭 잡아 줬다. 만일 이걸 어린아이가 팔려고 시도하는 즉시 파이퍼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탐욕에 찬 어른의 손에 죽어도 모를 어린 거지에 불과했을 테니 말이다.
“월터 모르간! 이게 무슨 짓이더냐! 네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고작 한다는 게 네 동생을 버려? 겉으로는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한다 했으면서!”
대로한 모르간 후작의 말에 월터가 혀를 찰 때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모르간 후작에게 귓속말을 하자 그의 고개가 위아래로 잠시 끄덕였다.
“아버지! 그러게 왜 재혼하신 겁니까. 왜 아들을 낳으신 겁니까! 분명 아버지 뒤는 제가 잇는 게 맞는데 왜 제 자리를 흔들었습니까.”
결론은 자신이 원하지 않은 재혼을 한 것도 모자라 둘째 아들을 낳은 게 못마땅한 것이다. 가주에게 총애받는 동생이 있으니 당연히 이어받을 거라고 여긴 자리가 흔들려서 파이퍼를 버린 게 분명했다.
“우와, 똥몽춍이가 여기에 또 한 명 잇네.”
모르간 후작가 가족이 불같이 타올랐고 그 위에 살포시 찬물을 끼얹어 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넌 끼어들지 마.”
“그럼 안 끼어들게 했어야지. 이 똥몽춍아. 나이를 똥꼬로만 먹엇니?”
“뭐, 뭐?”
“파이랑 아조씨랑 열여섯 살 차이야. 아무리 총애한다고 해도 파이퍼가 어른이 되엇을 땐 아조씨가 이 집안을 물려받을 교육 다 받고 후계자로 지명되엇을 거자나.”
“…….”
“파이가 성인이 되려면 아직 멀엇고 그동안 아조씨는 다음 대 후작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자나. 마법탑도 이미 아조씨의 말대로 따를 거고.”
마법사란 족속은 귀찮아서라도 마법탑의 후계자가 자주 바뀌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아무리 천재가 태어났다고 한들 그들에겐 그저 어린 마법사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파이퍼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마법탑 출신 마법사는 월터를 따를 게 분명했다.
게다가 파이퍼가 커서 후대 마법탑과 모르간 후작가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땐 이미 늦었으리라. 그 전에 월터가 내실을 다져놨는데 둘째가 뒤늦게 뛰어들어 봤자 불 속에 뛰어드는 부나방에 불과했다.
“타인이 보기에도 그럴 게 분명한데, 굳이 어린 동생을 질투해서 버려? 이 세상에서 젤 몽춍한 거 같아.”
완벽한 자리를 위해 어린 동생을 버리는 패륜을 저질렀다. 이로써 그는 모르간 후작 부부가 용서해 주지 않는 한 다음 대의 후작이 될 확률은 매우 낮았다. 아니 이미 모르간 후작을 따르는 귀족들의 마음에서 그를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완벽한 가주감이라 할지라도 뒤에 어린 후계자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패륜은 무조건 감싸 준다고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 정당한 후계자 싸움도 아닌 이제 네 살인 어린 동생을 버린 것을 묻고 지나갈 정도로 인정이 넘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한 가문에 아들이 둘이 있으면 당연히 후계자 싸움에 휘말리게 되어 있어!”
월터가 상당히 억울하고 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짖었지만, 손을 뻗지는 못했다. 파이퍼의 말을 들으며 검을 거둬들인 오빠가 내 뒤에 서서 거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닌데, 우리 에이랑 제이는 그런 거 업는데.”
둘이 가끔 티격태격해도 제이든은 감히 에이든의 자리를 넘보려 하지 않았다. 왜 자신이 그런 불합리하게 바쁘고, 여러 사람의 인생을 어깨에 짊어지는 짓을 해야 하냐며 고개를 내저었다.
제이든의 성격 때문인지 에이든 역시 그냥 고대어도 못하는 바보라고만 부를 뿐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제이든이 혹시 티그리스 가주가 되고 싶은 마음을 숨긴 건 아닌가 싶었지만 절대 아니었다.
후계자 수업을 둘 다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줬지만 제이든은 그런 거 할 바엔 나랑 놀 거라고 빠졌다. 남들이 보면 기회를 줘도 안 잡는 멍청이라고 하겠지만 제이든은 가주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제가 검술도 배워서 에이든의 뒤를 가끔만 지켜 줄 거라고, 내게 말할 정도로 착해빠진 나이 많은 조카였다.
“그런 사람은 어딜 봐도 없어!”
“업긴 왜 업써! 저기 잇잔아.”
내가 손을 들어 가리킨 곳엔 에이든과 제이든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