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기사로 이름이 드높은 히알루 후작가는 이 나라의 마법계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마법탑주인 모르간 후작가와 정략혼이 성사되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가문의 결합이었다. 그리고 그 속은 더 상상할 수 없는 부부 관계가 얽혀 있었다.
후계자를 낳으면 그 후부터는 절대 피임을 하며 각자 생활을 영위하자는 기본적인 규칙이 정해졌다. 그리하여 엘런을 낳은 후 둘은 피임을 철저히 했다. 아니 정확히는 관계 자체를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사랑을 전제로 한 결혼이 아니었다. 마법탑주인 선대 모르간 후작이 티그리스 공작가의 딸 세라피나가 기사 가문인 판테르 공작과 결혼한 걸 부러워한 결과물이었다.
그 결과 모르간 후작은 빚투성이인 히알루 후작가에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어 정략혼을 성사시킨 것이다. 제 딸인 마를린 모르간이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 결과물로 마를린과 사이가 틀어졌다.
덕분에 엘런도 외가와 교류를 잘 하지 않았지만 선대 모르간 후작이 죽은 후 외삼촌이 가끔 아카데미에 찾아와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저랑 나이 차이가 있는 외사촌 동생 파이퍼 모르간이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비밀리에 실종된 파이퍼를 찾고 있는 듯했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파이퍼의 형인 월터도 친모가 만들어 준 커프스 버튼을 분실한 것을 모를 정도로 찾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아는 이들을 통해 아이를 본 것 같다는 제보를 받고 가면 그곳엔 엉뚱한 아이가 있었다. 아니면 돈을 노린 이의 잔인한 거짓말만 존재했다.
파이퍼와 두어 번 만나 본 게 전부인 엘런은 사촌이 실종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딱히 뭔가 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어머니인 마를린이 모르간 가문과 엮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비록 마법사로서 길은 걷고 있다지만 친정과는 담을 쌓은 지 오래였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을 무렵 동생과 데이트하러 간 유진에게 연락이 왔다.
“이거 일부러 약 올리려고 연락한 건가.”
마법사의 핏줄답게 약간의 마나를 가지고 있는 엘런은 반짝이는 간이 통신구에 손을 올렸다. 마나를 주입하자 통신구에 유진의 모습이 선명하게 담겼다.
[엘런, 네 외사촌 동생 실종되었다고 했잖아.]
갑자기 뜬금없이 묻는 유진의 물음에 엘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살의 남자아이이고, 검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이라고 했던가.]
“그런 외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상당히 많아. 그런 외모의 아이를 보고 혹시 동생이랑 데이트 중에 연락한 거야? 그런 거라면 정말 고마워. 신경 써 주고 있었구나.”
본인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작년부터 동생 외의 것엔 신경 쓰지 않은 유진이 하는 말에 가슴이 조금 뜨끔해졌다.
[혹시 말이야. 오른쪽 어깨에 빨간색 점 세 개…….]
“유진! 거기 어디야?”
너무 놀란 나머지 엘런은 큰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유진이 말한 인상착의가 제 외사촌 동생과 같았다. 외모는 비슷한 아이가 많다고 하더라도 어깨에 있는 점까지 같은 아이는 없었다.
[아카데미랑 그리 멀지 않은 곳이야. 이름은 달빛 여관.]
“당장 갈게. 그 아이 잠시만 붙잡고 기다려 줘.”
이제껏 두어 번 본 외사촌 동생에게 정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였다. 어떤 연유로 실종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알게 되었는데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급히 기숙사에서 나온 엘런은 곧장 개구멍을 통해 밖으로 탈출했다. 나중에 아카데미 관계자에게 들키는 한이 있어도 우선 확인해 봐야 했다.
미친 듯이 뛰어서 달빛 여관으로 가자 앞엔 유진이 나와 있었다.
“유진! 그 아이…….”
“잠깐 진정해! 진정하고 내 말 들어.”
격한 숨을 몰아쉰 엘런의 어깨를 붙잡은 유진이 아까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네 동생인 줄 몰라서 그냥 내버려 두려고 했는데 우리 라피가 부득불 데리고 왔으면 해서 우선 여관으로 데려온 거야.”
“으, 응.”
“우선은 씻고 밥 먹는 중이야. 옆에 라피랑 씨엘이 있으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하멜 경이 옷 들고 갔으니 제대로 된 옷으로 갈아입었을 거야.”
“고, 고마워.”
“만약 네 동생이 맞다면 고맙다는 말은 내가 아니라 우리 라피가 들어야 옳아. 그러니까 진정하고 들어가서 확인해.”
조곤조곤 말하는 유진을 본 엘런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엘런은 유진을 따라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평범해 보이는 여관을 쓱 본 엘런은 유진이 2층에서 멈추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진정하자고 생각할 때 유진이 방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 엘런의 두 눈이 급격히 커졌다. 제 외사촌 동생이 맞았다. 비록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자라고 예전보단 좀 큰 상태였지만, 모르간 가문의 직계 핏줄의 특징을 제가 모를 리가 없었다.
순간 저도 모르게 안으로 박차고 들어간 엘런이 아이를 보고 소리쳤다.
“파이퍼 모르간! 너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이름을 부르자 아이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라피의 등 뒤로 숨어서 바들바들 떤 채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엘런 오빠, 이 아이 알아요? 애 이름을 모르겟다고 햇써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대요.”
라피의 말에 엘런은 왜 파이퍼가 자신을 보고 반기지 않고 숨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저와 덩치가 비슷한 라피의 뒤에 선 채 어깨를 움츠린 파이퍼의 모습에 엘런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하라고 했잖아. 여기에 있는 사람은 어른이 아니고 아이라고. 네가 그렇게 큰소리치면 우리 라피도 놀라잖아.”
“어? 아! 미, 미안해. 정말 미안, 라피…… 그리고 파이퍼.”
놀란 나머지 감정을 내비친 엘런은 심호흡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곤 라피와 파이퍼를 보며 말했다.
“사실은 뒤에 있는 아이가 내 외사촌 동생이란다.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나.”
앞뒤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몇십 분간 장황하게 설명하는 엘런을 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 한 줄로 요약했다.
“그니까 얘가 실종 되엇다는 엘런 오빠의 외가인 모르간 가문의 아이라는 거네요?”
“어? 응, 그래.”
엘런의 끄덕임을 본 나는 뒤에 선 파이퍼의 손을 꼭 잡았다.
“너 어떻게 집에서 나오게 되엇는지 기억 안 난다고 햇지?”
“으, 응…….”
충격을 받아서 기억을 잃은 게 분명했다. 그 정도로 엄청난 일을 겪었을 것이다. 모르간 가문이라면 가끔 할아버지가 지긋지긋한 놈들이라고 말하곤 할 정도로 유명한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의 직계가 실종이라니, 이건 분명 집안일과 연관이 되어 있을 것 같다.
“혹시 파이퍼한테 형제가 잇써요?”
“있지. 나보다 나이 많은 형님이야. 올해 스무 살일걸.”
“흐음.”
막내이자 늦둥이라 모르간 후작이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길렀다는 말을 들은 나는 답이 나왔다. 파이퍼의 형이 일을 벌인 확률이 매우 높았다. 보통 집안에서는 다음 대의 후계자 자리 때문에 알력 싸움이 일어나곤 했다.
그중 이렇게 현 가주의 예쁨받는 아이가 태어나면 당연히 제가 가문을 이어받을 거라고 여긴 형제는 불안에 떨 것이다. 그래서 제 지위를 흔드는 형제를 가만두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간혹 독살한다거나 아니면 아예 몰래 죽여 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어쩌면 파이퍼도 그런 일에 휘말려 버려져서 거지처럼 살았을 것 같았다. 아직은 어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때에 제 세력이라고 여긴 이들이 아이에게 붙지 않도록.
“설마하니 형님이 파이퍼한테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럴 리가 없어. 형님은 마법 수련 외엔 신경 안 쓰는 사람이야.”
“그건 모르는 일이다. 너도 귀족가에서 태어났으니 알 건 다 알잖아. 제 지위를 흔들 만한 형제자매를 죽이거나 도태시켜서 아예 사회에서 지워 버리는 일이 있다는 걸 말이야.”
오빠의 말이 맞다. 귀족가의 형제자매는 사이가 좋더라도 경쟁자가 되고는 했다.
“하아, 그럼 어떻게 해야지? 만약 형님이 진짜 파이퍼를 버렸다고 하면…….”
“뭘 어떻게 해? 네가 히알루 가문에 데려가 평생 숨긴 채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모르간 후작가로 가서 말해야지.”
“뭘 어떻게?”
“우리가 우연히 발견했노라고. 이 기회에 모르간 후작님에게 빚을 지우고 이 아이의 생을 좀 더 늘려야지.”
판테르 공작가의 자식이자 티그리스 공작가의 핏줄이 찾아 준 아이다. 처음에 아이를 갖다 버렸다고 해도 두 번은 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파이퍼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아이를 찾아 준 판테르와 티그리스를 모욕하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으니 말이다.
“후우,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어. 어쨌든…… 라피, 정말 고마워. 이런 녀석을 설득해서 우리 파이퍼를 데리고 와 준 점 말이야.”
“니에.”
“근데 우리 파이퍼를 어떻게 해서 데려온 거야? 길거리의 부랑아라면 수도 없이 많을 건데.”
그중에서 내게 선택받은 게 파이퍼란 점에서 엘런이 궁금할 만도 했다.
“그게 그러니까 이상한 느낌이 들엇써요. 말로 표현할 수 업는 느낌?”
“어? 어 그래. 그렇다고 치자. 뭔지 몰라도 둘이 당기는 그런 느낌이 있었나 보네. 천생연분인가.”
끼야오옹!
엘런의 말에 갑자기 얌전히 있던 씨엘이 끼어들었다. 그러곤 내 앞으로 와서 엘런을 노려보며 털을 세웠다.
“씨엘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 우리한테는 저렇게 노골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데 너는 만만해서 저렇게 털을 세우나 봐.”
씨엘의 행동거지를 그동안 많이 본 오빠의 말이 옳았다. 우리 가족이 씨엘을 놀리거나 업신여겨도 녀석은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똑같은 행동을 하면 그땐 가만히 있지 않았다.
“씨엘, 오빠 친구한테 예의 갖춰.”
미야옹.
내 한마디에 씨엘은 금세 온순하게 변했다. 돌아선 녀석은 내 다리에 비비적대며 안아 달라는 듯 두 눈을 초롱초롱 떴다.
“저 고양이는 온도 차가 참 극심하구나.”
“내가 보기엔 저 녀석이 우리 라피에게 홀딱 빠진 것 같아. 아, 그것보다 우선 네 동생 옮겨야지. 계속 여기에 둘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 마차 불러올게.”
공용 마차를 부르려고 하는 엘런의 소매를 내가 잡아당겨 멈추게 했다.
“우리 마차가 가까이 잇써요. 그거 타고 가요.”
“하지만 눈에 띌 건데.”
“갠차나요. 오빠 만난 후에 가문장 다 뗏써요.”
“아, 그래? 그럼 오늘 신세 진 거 계속 좀 질게. 고마워, 정말 고마워.”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한 엘런이 제 동생 파이퍼가 아닌 나를 끌어당겨 안으며 등을 다독였다. 그러자 뒤에서 쭈뼛쭈뼛하게 선 파이퍼가 내 소매를 당겼다.
“네 이름이 파이퍼래. 그리고 이 오빠가 네 사촌 형님이래. 인사해야지.”
“…….”
“아직 기억이 안 나서 그래? 그런 거라면 갠찬아. 안정되면 언젠가 기억날 거야.”
기억을 하게 된다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될까. 삐뚤어질까, 아니면 증오심에 불타오를까.
아직은 어린아이의 심리를 모르기에 나는 파이퍼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러곤 괜찮다는 듯이 아이의 손을 잡고 여관을 나왔다.
“이제 집으로 갈 거야.”
“집?”
“응, 파이퍼가 살던 곳이야. 그곳에 가면 굶지 않아도 되고 매일 따뜻한 곳에서 잘 수 잇써. 아빠랑 엄마도 만날 수 있고 말이야.”
“아빠랑 엄마?”
“응, 파이퍼는 좋겟다. 아빠랑 엄마가 계셔서. 나는 아빠밖에 업는데.”
별 뜻 없이 그냥 한 말에 오빠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