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유진의 외침에 라피는 얼마 가지 못해 하멜 경에게 바로 붙잡혔다. 분명 돌아간 줄 알았는데 근처에서 맴돌았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한 라피는 하멜 경의 품에 안긴 채 유진에게 인계되었다.
“라피, 누가 오빠 옆에서 떨어져도 좋다고 했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오빠랑 같이 움직여야지.”
“쪼오오기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움직엿써.”
라피가 가리킨 곳은 후미진 곳이었다. 그런 곳을 어린 라피가 봐 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안 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런 곳은 가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오늘은 오빠 손 꼭 잡고 다니자.”
“우웅, 그렇지만 진짜 저기에서…….”
“라피, 오빠 말 안 들을래?”
“알겟써.”
유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라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진의 손을 잡고 가는 중에도 연신 뒤돌아 그곳을 봤다. 사람들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음에도 그곳에 익숙한 느낌이 났다. 꼭 한 번 가 보고 싶었지만, 유진의 손은 절대 풀리지 않았다.
“아유, 귀여워라. 오늘은 우리 꼬마 아가씨가 누구랑 같이 왔을까?”
어느새 이 가게의 단골이 된 라피를 본 아저씨가 폭신폭신한 솜사탕을 만들어 주며 물었다. 처음엔 부모님인 줄 알았는데 나이 많은 조카님 커플이었다. 그다음엔 이번에야말로 부모님인 줄 알았는데 언니네 부부였다.
다들 아이를 사랑하는 눈동자로 보면서 눈에 넣지 못해 안달인 듯했다. 서로 본인들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정말 화목해 보였다.
그러다가 세 번째에 비로소 아빠랑 단둘이 나온 것을 보고 흐뭇한 마음에 솜사탕을 더 크게 부풀려 줬다.
“우리 오빠예요.”
“오빠? 하하하, 오빠랑 눈동자가 닮았구나. 그나저나 아카데미 학생이었네. 늠름하기도 해라.”
나이 차이가 있어 보이는 오빠 손을 잡고 말하는 라피를 본 아저씨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솜사탕을 만들어 줬다.
“우와아아아, 아저씨 고맙뜹니다. 오빠, 잘 먹을게.”
“그래. 먹고 치카치카 해야 돼. 알겠지?”
“핏, 아빠랑 똑같이 말해.”
아직도 물의 정령 조각을 입에 물고 있는 게 생경한 라피는 입술을 쭉 내밀어 투덜댔다. 그 모습이 귀여운 나머지 유진이 라피를 안아 올리더니 볼이며 이마에 입맞춤했다.
매우 우애가 좋은 남매를 본 솜사탕 아저씨의 표정도 보기 좋게 풀어졌다. 분명 귀한 아이가 분명했다. 전까지는 평범한 복장이었지만 오늘은 그때보다 화려하고 예쁜 복장을 한 채였다.
오빠가 아카데미 학생인 것으로 봐서는 귀족가의 아이였다. 한데 바른 인사성을 보아하니 요즘 귀족이 아닌 듯했다.
심지어는 아이의 오빠마저도 인성 교육을 제대로 받은 듯했다. 솜사탕값을 받지 않으려는 자신에게 공짜로 주면 뭐 먹고 살 거냐며 기어코 돈을 주며 동생을 기쁘게 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저런 귀족들만 있으면 참 세상 살기 편할 건데. 어쩜 저리도 오누이가 예쁜 짓만 골라 할까. 부모는 안 먹어도 배부르겠군. 아니, 가슴이 부를 것 같군.”
어제 아이 아빠의 풍채에 놀랐던 솜사탕 주인은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커다란 덩치의 아이 아빠는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딸과 눈이 마주칠 때면 눈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나도 아들이 아니라 저런 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음엔 더 큰 솜사탕을 만들어 줘야겠어.”
라피 덕분에 솜사탕 크기를 키우는 스킬이 나날이 늘어 가는 솜사탕 가게 주인이었다.
* * *
솜사탕을 먹으며 거리를 오빠의 다리로 거닐었다. 어느 정도 걸어다녔더니 뾱뾱- 소리 나는 게 조금 거슬렸다. 게다가 타인의 눈에 너무 띄어서 오빠가 중간에 새 신발을 사 주고 뾱뾱이 신발은 하멜 경의 손에 쥐여줬다.
“오빠가 주말에 갈 테니까 그때까지 울지 말고 기다려. 알겠지?”
“우웅.”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몇 번이나 같은 곳을 다녔더니 조금 지겨운 감이 없지 않았다.
“후아아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오빠 가슴에 찰싹 붙었다. 연달아서 밖으로 돌아다녔더니 몸이 피곤해졌다. 어린아이의 에너자이저 수준의 체력 따윈 없기에 최대한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내 발로 걷지 않았다.
“그나저나 씨엘이 제대로 호위하고 있구나. 있는 듯 없는 듯.”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씨엘을 본 오빠가 픽, 웃었다.
“우리 씨엘은 못하는 게 업써!”
“그래. 못하는 게 없지. 주인 앞에서만 앙큼하고 발랄하니까.”
내 앞에서 발라당 배를 까뒤집으며 애교 부리지만 다른 이들이 오면 얼른 식빵을 굽는 씨엘이었다. 그 모습을 본 오빠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니아옹.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오빠의 시선을 외면한 씨엘은 꼬랑지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솜사탕을 먹고 난 후 진득진득한 손을 근처 분수대에 앉아 씻겨 준 오빠가 손수건으로 닦아 줬다.
“이제 뭐 할까?”
오빠의 물음에 나는 아까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오빠, 나 거기 가 보고 싶어.”
“어디?”
“아까 내가 가려고 했던 곳.”
“안 돼!”
평소라면 당장 가 보자고 했을 건데 이번엔 오빠가 그곳이 어디인지 안다는 듯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럼 나 혼자 갈랭.”
“오빠가 안 된다고 했을 텐데?”
“그렇지만 거기에서 진짜진짜 이상한 느낌이 낫써. 그래서 가 보고 싶어. 진짜 가 보고 싶은데…… 오빠가 옆에 잇쓰니까.”
비록 오빠의 나이는 열네 살이지만 이곳에서 나의 보호자였다. 그래서 오빠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아직도 물기가 남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하자 오빠는 옆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겠어. 그럼 잠깐만 갔다가 바로 나오기로 하자. 알겠지?”
“웅, 역시 오빠가 젤 좋아.”
“이럴 때만?”
약간 새침한 표정을 지은 오빠의 뺨에 입 맞추자 이내 얼굴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 집안 남자들의 사용법을 터득한 나는 방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오빠는 나를 안아 올려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걷자 아까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어둑한 골목이 보였다. 내려 달라고 했지만, 호박떡에 지지가 묻는다며 계속 놓아주지 않았다.
곰팡이가 낀 냄새가 난 듯 눅눅한 공기를 마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밝은 세상 속에서만 살다가 이곳에 왔다고 놀라거나 하진 않았다.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깨끗함이 있으면 더러움이 있기 마련이다.
“라피, 이제 돌아가는 게 어떠…….”
골목을 다 지나가지도 않았는데 오빠가 돌아가길 권유하다가 말을 멈췄다. 오빠의 시선이 닿는 곳엔 거적때기를 둘러쓴 무언가가 있었다.
“씨엘!”
내 부름에 씨엘이 그곳으로 가더니 발로 톡톡 건드리다가 거적때기를 들추려 했다. 그러자 이내 미약한 반응이 나타났다. 땟물이 줄줄 흐르는 조그만 손이 나오더니 빈 공간이 생긴 거적때기를 잡고 내렸다.
“라피, 이제 가자꾸나. 아무래도 거지인 것 같아.”
“그치만…… 오빠, 저기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어.”
돌아가려던 오빠는 내가 붙잡고 말하자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에 나를 등에 업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검병에 손을 얹은 오빠는 거적때기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곳엔 매우 더럽고 냄새나는 어린아이가 잔뜩 웅크린 채 겁에 질려 있었다. 두 손으로 뭔가를 소중하다는 듯 꽉 쥔 아이를 보니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확인했으니까 가자.”
“오빠…….”
“안 돼!”
“그치만…… 아직 어리자나.”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저런 아이를 우리가 다 구할 수는 없어.”
이럴 땐 또 단호한 오빠가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너무 안타깝고 짠한 아이의 까만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오빠, 나도 하늘에서 떨어졋쓸 때 아빠 안 만낫쓰면 저 아이처럼 되었을지도 몰라.”
“…….”
“오빠아아아, 응? 오빠아아아!”
오빠의 등에 업힌 채 어깨를 꾹꾹 누르며 연신 불러댔다. 그러자 오빠가 깊은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건 또 어머니를 닮아서는…… 그래. 알겠어. 알겠는데 난 얘 끝까지 책임 못 져. 알겠어?”
“웅, 오빠 멋쪙!”
“이럴 때만?”
“아니, 매일매일 멋쪙!”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해 주니까 혀 짧은 소리 내는 것 좀 봐.”
바들바들 떠는 아이에게 오빠가 손을 내밀자 몸을 뒤로 뺐다. 겁에 질린 까만 눈동자가 유독 탁해 보였다.
“너 안 잡아먹으니까 가자. 우리 호박떡이 말하지 않았으면 이대로 두고 갔을 거야.”
“우리랑 같이 가서 밥 먹자. 좀 씻구.”
별다를 게 없는 아이였다. 한데 유독 신경이 쓰였다. 이런 게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이 아이를 여기에 두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겁에 질린 아이를 설득했다.
“나…… 버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떨기만 한 아이의 첫 말에 나와 오빠는 할 말을 잃었다. 아무래도 가족에게 버려진 아이가 분명했다.
“너 이름이 뭐야?”
“모, 모르겠어.”
버림받은 것에 충격을 받은 듯 제 이름조차 모르는 아이가 짠하고 불쌍해 보였다.
“집에 데려가면 안 돼?”
“그건 안 돼.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존재를 아버지께서 받아주지 않으실 거야.”
집에는 데려가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름 모를 아이를 데리고 근처 여관으로 데려갔다. 아카데미 제복을 입은 오빠 덕분에 아직 성인이 되지 못했지만, 따로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아이 씻겨야 하는데…….”
“내가 할게.”
한 손을 번쩍 들고 말하자 씨엘이 팔짝 뛰면서 내 팔을 붙잡았고 오빠는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하지 않아도 할 사람 많으니까 그 손 내려. 그리고 하멜 경은 이 아이가 입을 옷 좀 사 오게.”
오빠가 하멜 경에게 돈을 주고 보낸 후 곧장 아이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여관 직원에게 돈을 주고 씻기게 했다. 물을 몇 번이나 갈 정도로 더러운 아이는 조금 긴 시간이 흐르자 커다란 수건으로 돌돌 만 채 밖으로 나왔다.
제멋대로 자란 흑발이 물에 젖어 청초하게 내려앉았다. 불안한 듯 주변을 둘러본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디 다친 데는 업써요?”
“크게 다친 곳은 없었습니다. 자잘한 상처가 손발에 있긴 했지만.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아이를 씻긴 후 뒷정리하고 나온 직원이 간단히 말했고, 잠시 후 먹을 걸 가지고 들어왔다. 평범한 수프와 빵이었는데 그걸 본 아이의 두 눈이 순간 커졌다.
“우선 이거 먹…….”
내가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아이는 테이블로 달려들었다. 순간 몸을 감싸고 있는 수건이 풀리면서 나는 보면 안 될 것을 보고 말았다.
“오빠랑 같은 거 잇써!”
“아냐! 나랑 저 땅콩만 한 애랑 비교하지 마.”
이미 알고 있는 신체 구조였지만 나는 모르는 척 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오빠가 고개를 격하게 가로저었다.
왠지 아이와 같은 취급을 당한 게 억울한 듯 보였다.
결단코 같지 않다고 연거푸 말한 오빠는 급히 떨어진 수건으로 허겁지겁 빵을 먹는 아이를 감싸려다가 멈칫했다.
아이의 조그만 어깨에 빨간 점 세 개가 콕 찍혀 있었다. 그걸 본 오빠가 아이를 수건으로 묶어 버린 후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라피, 오빠가 친구랑 이야기 좀 해야 할 것 같아. 그러니까 잠깐 이 아이 좀 봐 줄래?”
“웅, 다녀와.”
작은 간이 통신구를 만지작거린 오빠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멜 경이 들어왔고 엉망으로 먹는 아이의 몸을 묶은 수건 대신에 옷을 입혔다.
“그거 다 니 꺼니까 천천히 먹어. 난 아까 많이 먹어서 배불러. 그리구 먹을 때 눈치 보지 마.”
내가 배를 두들기며 말하자 아이의 먹는 속도가 느려졌다. 수프를 세 그릇이나 먹고 난 후에야 아이는 겨우 숟가락을 놓았다. 하지만 여전히 한 손은 뭔갈 쥐듯 주먹을 쥐고 있었다.
“나는 라삐야.”
“라피?”
“응. 네 이름은 뭐야? 아직 기억 안 나?”
“어…….”
“근데 손에 쥐고 있는 거 뭐야? 뭔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넣어. 이 주머니 선물로 줄께.”
마침 내 가방 안에 있는 작은 주머니 하나를 아이에게 줬다. 그러자 아이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그 안에 뭔가를 넣었다. 언뜻 보기엔 초록색 보석처럼 보였다.
아이가 주머니를 품에 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오빠 친구 엘런이 들어왔다. 그러곤 아이를 보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파이퍼 모르간! 너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