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101)화 (101/164)

101화. 

어제는 할아버지 집에서 실컷 먹고 놀았다. 그러다가 졸려서 언니 품에 안겨 있었는데 깨어나 보니 낯선 곳이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그대로 굳어 있다가 씨엘이 비집고 들어오자 그때야 안심했다. 씨엘을 부둥켜안고 있을 때 방문이 조심히 열렸다.

“아, 아가씨! 일찍 깨어나셨군요.”

“여기 하부지네 집이에요?”

“네, 어제 까무룩 잠이 드셔서 공작님께서 이곳에 놓고 가시라고 부득불 외치신 바람에…….”

결론은 할아버지가 잠든 나를 안고 움직이면 깬다고 놓고 가라고 해서 아빠랑 언니가 눈물을 머금고 뒤돌아섰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할아버지와 다니엘, 그리고 에이든이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의 방에서 잤다나.

“그럼 여긴 누구 방이에요?”

“다니엘 님 방이랍니다. 어제 어찌나 좋아하셨는지 몰라요. 한데 아침 일찍 공작님께서 호출하셔서 나가셨답니다.”

전후 사정은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한데 묘하게 할아버지가 일부러 다니엘을 호출한 느낌이 들었다.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평소처럼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곳엔 이미 만찬이라고 할 수 있는 음식이 가득했다.

“얼른 오렴. 우리 라피, 오늘은 뭘 먹을까? 이걸 먹어 볼까? 아니면 저걸 먹어 볼까. 아니다, 다 먹어 보면 되지.”

내 앞접시에 이것저것 조금씩 덜어 준 할아버지의 성의를 봐서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어야만 했다. 이러다가 확대되는 것 정도가 아니라 돼지가 될 것 같았다.

할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배가 부르게 식사한 후 곧장 외출 준비를 했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나를 위해 에이든과 사비나는 자신들의 데이트에 끼워 줬다.

“미안, 내가 끼어들면 안 되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전 무조건 좋아요. 고모님!”

수수한 옷을 입은 사비나는 어제 티그리스 공작저로 옮겨 왔다. 황궁에서 연회를 즐기는 것보단 이곳에서 가든파티를 하는 게 더 재미있고 좋다고 말하더니 아예 안 돌아간 듯했다.

“제가 에이든 님과 결혼하면 판테르 공작저에도 드나들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요. 티그리스 공작가의 후계자의 부인이자 우리 고모의 조카며느리인데 어느 누가 못 가게 하겠습니까.”

저택에서 좀 거리가 있는 곳에서 내린 후 나는 에이든과 사비나의 손을 잡고 촐랑촐랑 걸었다. 이 세상으로 뚝 떨어진 이후로 거리를 거닐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잔뜩 긴장한 채 두 눈을 부릅뜨고 황도를 거닐었다.

“우리 저기에서 차 한 잔 마시는 게 어때요? 듣기로는 저기 차가 참 맛있다더군요.”

황도 사하라에서 괜찮은 가게를 이미 수소문해 뒀는지 에이든이 자신 있게 찻집으로 안내했다.

“아! 맞다. 고모 입에는 차가 맞지 않을 건데.”

“갠차나. 설마하니 나를 아이 취급하는 거 아니겟지? 나 이래 보여도 어른이야. 어른.”

“풉! 그래. 우리 고모는 우리한테만 어른이야.”

바람 빠진 소리를 낸 에이든을 보며 살짝 눈을 실룩인 나는 당당하게 찻집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어머나! 귀여운 꼬마 아가씨네. 꼬마 아가씨, 몇 쨜?”

“네 쨜!”

윽, 나도 모르게 가게 직원이 묻는 말에 그대로 대답하고 말았다. 순간 에이든과 사비나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움찔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은데 가까스로 참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꼬마 아가씨 나이가 네 쨜이었어요? 어쩜 이리고 귀여울까. 엄마랑 아빠 따라온 거니? 세상에, 완전히 아빠 판박이네.”

두 사람을 본 직원은 나를 온전히 에이든의 딸로 생각하는 듯했다.

“아닌데요! 나는 어른이에요. 어른! 얘는 내 조카!”

“음? 그게 무슨…….”

“얘는 나이 많은 조카예요. 그리고 옆엔 조카 애인!”

“흡! 세상에나…….”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동시에 출산한다는 말이 종종 있었다. 한데 비슷한 연배가 아니라 아예 아빠뻘 되는 남자가 조카라고 하니 믿지 않는 눈치였다.

“맞습니다. 우리 고모예요. 나이는 어리지만, 얼마나 똑똑한데요. 후훗.”

믿지 못하는 직원에게 간단하게 설명한 에이든은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사비나의 옆에 앉은 나는 차 대신에 온 우유를 받았다.

“고맙뜹니다.”

“천만에요. 고모님! 호호호, 맛나게 드세요. 다 드시면 또 드릴게요.”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아이의 특권은 우유를 리필할 수 있었다. 따끈한 우유를 호로록 마실 때 에이든과 사비나도 주문한 차를 마시며 향을 음미했다.

“이런 곳에서 두 분과 함께 차를 마시니 너무 기분이 좋으면서 포근해요.”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우리 결혼하면 종종 이곳에 와서 차를 마시는 건 어때요?”

“좋아요. 고모님이 방금 에이든 님이 하신 말씀 증인이 되어 주셔야 해요. 아셨죠?”

“니에.”

그날은 따끈따끈하고 포근포근한 말이 오간 평범한 하루였다. 데이트하는 커플 사이에 끼었지만, 다행히 위화감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녹아든 나는 이 커플의 자식으로 여겨져 상인들에게 덤을 많이 받았다.

매일 같이 데이트하자고 사비나가 말했지만, 알다시피 나는 매우 바쁜 몸이었다. 정해진 기간 내에 나는 다른 이들과도 데이트를 즐기며 저녁엔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오늘은 형부의 품에 안긴 채 언니와 함께 시내를 활보했다. 돌아다닐 때마다 뭔가 사 먹는 것도 아닌데 내 배는 부풀어 올랐다.

“우리 라피랑 같이 있으면 돈이 없어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 같아.”

사람들이 내게 준 간식거리가 많았다. 너도나도 한두 개씩 주다 보니 내가 먹지도 못할 정도로 말이다. 덕분에 언니와 형부도 그것을 먹느라 따로 가게에 들어가 사지 않아도 되었다.

“어제 에이랑 삐나 언니랑 같이 나갔는데 배 불럿써요.”

“오! 그랬어? 허허허, 우리 인절미 처제의 요 볼록한 볼살이 한몫한 거 아닐까?”

내 볼을 주물러댄 형부는 끝내 언니에게 손이 잡혀 떨어졌다. 

“우리 라피의 볼때기가 빨갛게 변했잖아요. 이러면 아버지가 다음부터는 라피를 우리랑 못 있게 하실 거라고요.”

“그건 그런데 이 말랑말랑 쫀득쫀득 인절미 볼을 보고만 있을 수 없잖아요. 입에 넣고 굴려보고 싶어요.”

“도가 지나쳐요. 그렇다고 딸 낳아 주는 건 아니니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이런 날에 콜린도 있었으면 참 좋으련만.”

콜린은 지금 영지 내에서 잘 보살펴지고 있었다. 나는 황제의 초대장이 와서 어린 나이지만 연회장에 출입이 가능한 거고 나머지 애들은 같이 와도 조용히 휴게실 등등에 맡겨졌다.

“라피, 내일은 누굴 만날 거니?”

“오빠한테 서프라이즈할 거예요.”

“유진? 아, 평일이지만 황궁 연회 기간에는 수업을 안 하니 면회 오는 가족과 함께 외출은 가능할 거야.”

주말이 아니라 오빠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직접 갈 생각이다. 너무 한쪽만 챙기면 저울이 기울어지니 최소한 수평은 맞출 요량이다.

“내일은 누구랑 같이 갈 거니?”

“혼자 갈 건데요? 아빠가 혼자 가라고 햇써요.”

아빠는 아들 면회 가면 어디에 덧나기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아카데미에 가는 걸 싫어했다.

“그래? 혼자 가는구나. 우리 처제라면 가능하지.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니.”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형부가 주변을 쓱 돌아보더니 간식거리를 내 입에 몰아 넣어줬다.

“자! 이제 우리도 움직여 봅시다. 계속 처제랑 있고 싶은데 지금쯤이면 아버님이 안달나서 쫓아오실 것 같…….”

“자네 요즘 간덩이가 부었다는 말 못 들어 봤나?”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 순간 형부의 입은 꽁꽁 꿰매듯이 다물렸다.

“아빠!”

“우리 라피가 안 와서 아빠가 여기까지 마중 나왔단다.”

저택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마중을 나오시다니요. 형부 말대로 안달나서 쫓아온 게 분명했지만 나는 그저 방긋 웃으며 빵빵한 가슴에 안겨들었다.

“아버지, 우리가 어련히 라피를 데리고 갈 텐데 뭐 하러 이런 곳까지 나오셨어요.”

“그건 알지만, 라피가 눈에 안 보이면 불안하거든.”

왠지 나만 생각한 듯한 말에 나는 언니의 눈치를 살폈다. 언니는 누가 뭐래도 판테르 가의 장녀이지 않은가. 비록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고는 하나 아빠가 저런 말을 하면 질투하거나 싫어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여간 아버지는 극성맞아서 탈이에요. 이러다가 우리 라피는 결혼도 못 하겠어요. 그렇지? 씨엘!”

형부가 털 있는 동물을 싫어해 멀찍이 따라오던 씨엘이 후다닥 달려와 내게 안겨들었다.

“아빠가 결혼 못 하게 하면 씨엘이랑 결혼해야지.”

“뭐? 아니 저기 딸? 아빠랑 결혼한다고 약속했잖니. 딸? 저기요?”

“씨엘이 사람만 되면 결혼할 거예요. 나를 지켜 주는 기사님이니까요. 아마 사람이 되면 엄청 예쁜 남자가 될 것 같아요.”

섭섭한 표정이 녹아든 눈동자로 봤지만 나는 절대 철회하지 않았다. 대신 내 볼을 강아지처럼 할짝이는 씨엘을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보다가 살짝 떨어뜨렸다. 인간적으로 씨엘의 혀가 너무 까칠했다.

판테르 공작가의 문장인 흑표범이 휘날리는 깃발이 꽂힌 마차를 탔다. 혼자였지만 내 옆엔 씨엘도 있어서 걱정하진 않았다.

“아가씨, 다 도착했습니다.”

목적지인 아카데미에 도착하자 마차 문이 열렸다. 앞엔 저스틴 하멜 경이 말에서 내려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요즘 지척에서 호위하게 된 하멜 경은 미안함과 그리움 그리고 반가움이 점철된 눈동자로 나를 봤다.

“하멜 경,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을요.”

뾱-

하멜 경의 손을 잡고 내리자마자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오늘은 오빠랑 데이트하기로 내가 정한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가 부득불 이 신발을 신고 가라고 주문해서 어쩔 수 없이 신었다.

움직일 때마다 뾱뾱- 소리가 나서 주변 사람이 죄다 쳐다봤지만 애써 무시했다.

“우리 오빠 어딧써요?”

정문을 지키는 경비병에게 말하자 다들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마른침을 삼킨 듯 목젖이 움직였다. 내 뒤에 있는 마차에 꽂힌 깃발을 봤으리라.

“기숙사에 계실 겁니다. 지금은 수업이 없어서요.”

“아! 그렇구나. 헤헤, 알려 주셔서 고맙뜹니다. 요거는 선물!”

방긋 웃으며 가방을 뒤진 나는 경비병에게 사탕을 건네줬다.

“감사합니다.”

“먹구 치카치카해야 아빠한테 안 혼나요.”

“네, 네? 푸하핫! 네, 알겠습니다.”

소리 내어 웃은 경비병 중 한 명이 기숙사가 있는 쪽으로 안내해 준다며 앞장섰다. 그를 촐랑촐랑 따라가던 중 오빠와 만날 수 있었다. 기숙사까지 가지 않았는데 말이다.

* * *

주말을 제외하고 누군가 면회 오지 않은 이상은 아카데미에서 썩어 가고 있던 유진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어이, 대체 무슨…… 야! 너 미쳤냐?”

룸메이트 엘런은 갑자기 창문을 활짝 연 유진이 그대로 뛰어내리자 버럭 소리쳤다. 요즘 가족들과 통신을 하며 동생과 함께 놀러 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더니 신변을 비관해서 자살 시도를 하나 싶었다.

하지만 뛰어내린 유진의 품에 안긴 동글동글한 아이를 보고는 픽, 웃었다.

“동생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소원 풀이를 했네.”

저도 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후환이 두려운 엘런은 남매끼리 좋은 시간 보낼 수 있도록 입도 뻥긋하지 않고 물러났다.

“우리 호박떡! 오빠랑 데이트할까?”

“웅! 오빠랑 데이트해.”

매우 좋아하는 유진의 손을 잡은 라피는 그대로 아카데미를 나섰다. 그러고는 이곳에 몇 번 나와 본 경력을 살려서 유진과 함께 거리를 구경했다.

“오빠, 저거 마싯써.”

“그래? 오빠가 사 줄게.”

뾱뾱-

먹을 걸 고르고 사는 동안 신발에서 나는 소리가 근처에서 안정적으로 들리자 안심한 눈치였다.

뾱뾱뾰뵥-

소리가 빨라지자 유진의 심장박동도 동시에 올라갔다.

뾰뵤뵤뵤뵤뵤뵤뵤뵤뵤뵤뵤뵥-

“안 돼! 당장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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