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다. 본디 인간 아이 모습으로 태어나야 옳았지만, 몸이 약해 저 모습으로 태어났다. 측근 몇을 빼고 아이의 모습을 본 이는 없었다. 모든 게 극비였다.
루피노 공작은 온갖 명약을 구해 3년간 아이를 죽지 않게 어떻게든 명을 붙들어 놓았다. 건강해졌음에도 아이는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았다. 건강한 아이는 제 의지로 인간과 수인의 모습으로 변형이 가능한데 말이다.
그런데도 루피노 공작은 제 아들을 과감하게 버리다시피 워프 게이트를 열어 좌표도 찍지 않고 보냈다. 본디 루피노 공작가는 수인의 피를 짙게 타고 난 아이를 일정한 나이가 될 때까지 수행을 보내곤 했다. 혼자 살아남으라는 의미로.
한데 허약한 제 아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권력자를 물어 버린 듯했다. 운이 좋게 말이다.
“저 아이는 제 아비를 안 닮았으면 좋겠네. 약해 빠져서 사랑하는 이를 지키고 혼자 죽는 그런 꼴…… 나는 이제 더는 못 보겠어.”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짓던 루피노 공작은 깊은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보같이 죽어 버릴 게 뭐야. 그렇게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죽으면 제가 가슴이 아프잖아요. 여보…….”
* * *
사비나와 라파엘의 사이에 껴서 진짜 쉴 틈도 없이 먹고 마시고 놀았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건만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
“아빠는?”
“티그리스 공작저에 계십니다.”
“으음, 그럼 나도 거기 갈래요.”
“공작님께서 아가씨가 오시면 얼른 재우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가씨, 얼른 씻고 주무시는 게 어떨까요?”
스칼렛의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아빠가 저리 말을 했다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내게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술을 마시나 봐요. 아빠는 술 잘 못 마시는데.”
저번에 북부의 티그리스 공작저에서 만취한 이후로 술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술에 취한 모습을 딸에게 보이기 싫어서 그러하리라.
“숙취 해소약을 만들어 놓으라고 하세요. 아빠가 오시면 드리세요.”
“네, 당장 그리하라고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씨엘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자 제니가 와서 내 옷을 벗긴 후 머리카락을 만지작댔다.
“어머, 누가 이리도 예쁘게 머리를 만져 주셨나요? 풀기 아까워서 어떻게 해요.”
“이거? 삐나 언니가 해줘써요.”
“비나 언니? 아! 사비나 실베스터 공주님이요? 세상에나, 그분은 공주님 아니어도 멋진 분이 되셨을 것 같아요. 호호호, 아가씨, 저녁 식사는 어찌하시겠나요?”
“후아암, 졸려요. 오늘은 밥 안 먹고 그냥 잘래요. 아까 넘 많이 먹엇써요.”
“네, 그럼 씻고 얼른 주무실까요?”
통통하게 부른 배를 본 제니가 방긋 웃더니 욕조에 나를 앉혔다.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건만 제니는 본인이 직접 나를 씻겼다. 따뜻한 물에 뽀득뽀득하게 씻겨진 나는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좀 시간이 지나자 고용인의 손에 씻겨져 보송보송한 털을 내 살결에 문지르며 안겨든 씨엘을 쓰다듬었다.
“잘 자, 씨엘.”
뀨우.
아빠가 없어서 침대에 올라온 씨엘을 품고 잠든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인기척이 느껴졌다. 술 냄새가 훅 풍기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딸, 깨지 말고 자렴.”
조금은 느릿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방 안에 내려앉았다.
“우웅.”
“술 냄새 싫으니? 씻고 올게.”
눈조차 뜨지 못하고 잠에 취해 있던 나는 다시 잠이 들었고 깨어났을 땐 아빠의 가슴 위에 둥지를 튼 후였다. 요즘 아빠랑 같이 잘 때면 항상 가슴 위에서 눈을 뜨곤 했다. 잠시 말똥말똥 뜬 눈으로 보다가 아빠의 눈가가 움찔하자 얼른 잠든 척하며 엎드렸다.
“끄응, 내가 아버님이랑 술을 마시면 성을 갈아 버리겠어. 후우, 라피가 준비해 놓으라는 숙취 해소제를 안 마셨으면 일어나지도 못했겠군.”
숙취로 힘들어한 아빠의 목소리에 나는 속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후우, 그나저나 여길 어떻게 왔더라.”
술에 잔뜩 취해 기억이 끊길 정도인 듯한 아빠는 조금 괴로운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연방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혼잣말을 한 아빠가 내 등을 쓰다듬었다.
“라피, 깨어난 거 다 아니까 이만 눈 뜨렴.”
“웅? 어떻게 알앗써요?”
“우리 찹쌀떡 심장 울림이 다르달까? 아빠의 가슴에 닿는 박동이 다르니까 금방 알 수 있지.”
좀 전의 괴로워하던 목소리와 달리 아빠의 표정은 매우 부드러웠다. 가슴에 안겨 비비적대는 나를 토닥여 준 아빠는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만 했다.
“아빠는 검술 수련 좀 하고 올 테니까 우리 라피는 쉬렴.”
내 두 볼에 연방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맞춤을 한 아빠가 방 밖으로 나갔다. 오늘 공작가의 기사 중 몇은 곡소리를 낼 것 같았다. 아빠가 나간 후 한동안 꿈지럭댄 나는 제니의 손에 의해 세수를 한 후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도 황궁 연회에 참석해야 하는 날이랍니다.”
본래는 어제부터인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아빠는 연회를 즐기지 않고 할아버지네 집에 가서 술을 진탕 마셨다.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아 입을 꼭 다문 나는 치장을 한 후 밥을 먹었다.
보통 아가씨들은 연회나 무도회에 가기 위해 옷에 제 몸을 맞추느라 굶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난 아직 아이인지라 굳이 옷에 몸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맘껏 먹고 마신 후 푹 쉬다가 씨엘의 목에 큼직한 빨간 리본을 묶어 줬다.
“씨엘도 리본 묶고 같이 가자. 알겟지?”
냐오옹.
목에 묶인 리본이 불편한지 연방 앞발 뒷발을 이용해 떼어내려다가 내 눈과 마주치자 얌전해졌다.
리본을 떼어내면 같이 안 잘 거라고 으름장을 놓자 그때야 씨엘은 미련 없이 내 품에 폭 안겼다. 잠시 후, 멋진 제복을 입은 아빠의 품에 안긴 나는 연회에 참석했다.
“오! 판테르 공작님,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라피 안녕, 어젠 갑자기 사라져서 이 오빠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단다.”
아빠 손을 잡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가 앤드류를 만났다.
“자네가 우리 처조카님의 친구라고?”
“네, 매우 친한 사이입니다. 라피랑도 어제 인사를 나눴지요. 그렇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앤드류를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니에, 안녕하세요. 앤드 오빠!”
“크읍! 역시 오빠라는 소리가 찰떡같이 붙는구나.”
애칭까지 곁들여 불러 주자 앤드류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빠가 없었다면 나를 안아 올려 제 볼에 비비적댔을 가망성이 매우 높아 보였다.
“로저스 후작은 이만 반려를 찾아가는 게 어떤가.”
“약혼녀는 오늘 아파서 같이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저런, 약혼녀의 쾌유를 빌겠네. 그럼 우린 바빠서 이만.”
앤드류가 곁에 있고 싶어 했지만, 아빠가 적당히 떼어놓았다. 멋쩍은 미소를 지은 앤드류는 나를 보면서 작게 손을 흔들었다.
“앤드 오빠, 담에 봐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아빠가 조용히 내 손을 잡아 내렸다.
“이곳에서는 손 흔들면서 인사하지 않아도 된단다. 자! 그럼 우린 저기에서 쉴까?”
오자마자 연회장 옆에 딸린 휴게실로 들어가려는 아빠를 누군가가 막았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시비조의 말이었지만 그 속은 놀라움과 기쁨이 스며들어 있었다.
“누구긴 누구야. 판테르 공작이지.”
“허허, 나 참! 그동안 내 초대장과 자네의 집에 방문을 요청하는 편지를 무시하더니 이곳에서 보게 되는군 그래.”
약간의 섭섭함이 묻은 목소리로 말한 이가 나를 봤다. 아빠 또래 아저씨의 붉은 눈동자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숨어 있었다.
“이 꼬마 아가씨는 누구지? 부인을 닮은 아이를 어디서 입양이라도 한 건가.”
“내 딸이다. 그러니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내 딸과 세라피나를 모욕하는 것은 가만두지 않을 거네.”
나를 유심히 본 이는 대뜸 손을 뻗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안녕, 처음 보는구나. 나는 아빠 친구인 리건 안젤로 후작이란다. 꼬마 아가씨의 이름은 뭐지?”
아빠 친구라고 말한 이의 커다란 손을 본 나도 손을 내밀어 그 손을 잡고 위아래로 살짝 흔들었다.
“처음 뵙겟씁니다. 세라피나 판테르에요. 라피라고 불러 주세요.”
내 이름을 들은 리건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가 다시 온순한 표정을 지었다.
“꼬마 아가씨는 제발 아빠가 아니라 엄마를 닮길 바랄게.”
“아빠랑 하부지가 전부 엄마 닮았다고 햇써요.”
“오! 천만다행이로구나. 저 녀석을 닮은 사람은 아퀼라 공작부인과 유진이면 족하단다. 하하하. 어쩜 이리도 귀여울꼬. 너무 예쁘구나.”
약간 장난기가 섞인 리건은 아빠를 보며 씩 웃었다.
“조슈아 판테르 공작! 막내 농사는 성공했군 그래. 축하한다.”
“고맙다.”
“이럴 땐 좀 겸손이라도 떨어 보는 게 어떤가.”
“내가 왜? 사실을 인정할 뿐인데.”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본 나는 속으로 킥킥대며 웃었다. 아빠는 혼자 마이 웨이를 외치며 지내는 줄 알았다. 한데 이런 장난기가 그득한 친구가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제껏 아빠의 교우 관계에 관해 하나도 모르고 있었던 나는 잠시 지켜보다가 할아버지가 등장하자 쪼르르 달려갔다.
“하부지!”
“오! 우리 말랑 콩떡, 이리 온. 내 새끼!”
할아버지의 품에 안기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처제! 나랑 에리카는 안 보여?”
짐짓 토라지듯 말한 형부를 본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니, 보고 싶엇써요.”
“말로만 보고 싶었니? 그나저나 네가 가져간 언니 책은…….”
“으음, 울 집 고용인들이 잘 일고 잇써요. 고마워요. 언니.”
“끄응. 내가 못 산다. 못 살아! 언니 물건을 멋대로 가져가다니.”
“그치만 언니가 자꾸 콜린 재울 때 로맨스 일거주니까요.”
“라피, 그거 사실은 한정판이란다. 정말 귀한 책이야. 그러니까…….”
“다 돌려보고 콜린 재울 때 안 일거준다는 조건으로 돌려줄께요.”
조건을 달자 언니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마지못해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매들은 투닥이는 것이 참 귀엽군 그래. 우리 에이든과 제이든은 한 번 싸우면 코피는 기본으로 터졌는데.”
나와 언니가 티격태격하는 것을 본 다니엘이 상당히 부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 큰 제가 아들보다 어린 동생 머리채를 붙잡고 싸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또 그러네, 하하하. 그래도 참 이리 말하는 거 보니 다복해서 너무 보기 좋아. 그렇죠? 할아버지!”
“우리 그러지 말고 연회 끝난 후에 집에 가서 작은 파티를 여는 게 어떠하니. 가족끼리 가든파티를 열고 싶구나.”
“저흰 언제나 좋습니다. 하지만 어제처럼 제롬에게 술을 많이 먹이시면 안 됩니다. 어젠 할아버님께서 말씀하셔서 봐줬지만,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황족들이 오든 말든 우린 우리만의 세계에서 이야기했다. 주변에서 다가오고 싶어 했으나 세 가문이 돌돌 감싼 채 이야기하니 접근할 수 없었다.
“아버님,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얼른 인사만 하고 나가시지요.”
눈치가 보이는지라 아빠가 먼저 운을 떼며 말하자 그때야 상석 쪽으로 움직였다.
어제 본 황제와 비슷한 연배의 아줌마가 화려한 차림으로 앉아 있는 것으로 봐서는 황후인 듯했다. 그리고 그 곁엔 어린 남자애 둘이 있었다. 둘 중 하나는 황태자이고, 나머지는 생명의 아이라 입양한 황자일 것이다.
“어젠 일찍 돌아가서 서운했는데 오늘은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다행이구려.”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황제를 본 할아버지가 대표로 말했다.
“안 그래도 이만 물러나려고 했습니다.”
“음? 그게 무슨 말이오? 혹시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섭섭한 게 있었다면 이만 풀게나. 해서 오늘은 대신관도 부르지 않았다네.”
항상 대소사를 논할 때 대신관을 불러들였던 황제의 파격적인 행보에 할아버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게 아니오라 세 가족이 융합하려면 좀 먼 것 같아서 오늘 단합대회를 열려고 합니다. 그럼 저흰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가자! 애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