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다니엘이었다. 얼굴이 상기된 채 외치며 뛰어온 다니엘은 우선 황제에게 인사를 한 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일이기에 평소에 운동 좀 하라고 닦달을 해도 움직이지 않던 네가 이리 급히 뛰어온 것이더냐.”
티그리스 공작의 평온한 물음에 다니엘은 가슴을 팡팡 치더니 곧장 도움을 요청했다.
“크, 큰일 났습니다. 말랑 콩떡이 중간에 사라졌습니다. 앤드류와 이야기 중이었는데 정신 차려 보니까…… 할아버지, 우리 라피를 얼른 찾아야 합니다. 고모부님, 정말 죄송합니다.”
순식간에 사라진 라피를 찾아 앤드류도 황궁을 뒤지는 중이었다. 곧 울 것 같은 다니엘을 본 황제는 순간 라피를 얻으면 세 공작가도 제 손으로 굴러떨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심지어 실베스터 왕국에서도 라피에게 무한 신뢰를 보여 주며 귀히 여기는 것을 보니 솔직히 욕심이 났다.
“걱정하지 말거라. 라피를 루피노 공작이 데려왔는데 다시 실베스터 왕자가 데리고 사비나 공주에게 갔으니.”
“네? 그, 그런…… 아! 루피노 공작님, 우리 말랑 콩떡이…… 아니 우리 라피를 주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비 오듯이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쓱쓱 닦은 다니엘이 진짜 친오빠처럼 고마워하자 루피노 공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말로 아이를 안아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하하하, 정말 포슬포슬하고 쫀득하다고 해야 하나, 계속 안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렇죠? 우리 말랑 콩떡이는 입에 넣고 굴리면서 와라라랄 하고 싶을 정도죠.”
분명 듣기로는 세 가문은 서로 등을 진 채 지내는 중이었다. 한데 중간에 포슬포슬한 백설기가 따뜻하게 이어 줘서 서로 위하는 사이가 된 것 같았다. 보고 듣고만 있는데 너무 부러운 루피노 공작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 전에 황제가 선수를 치며 말했다.
“자네 딸이 네 살이면 우리 황태자와 나이가 똑같군 그래.”
황제의 말에 세 공작, 아니, 네 공작의 눈초리가 순간 날카로워졌다.
“자고로 황가와 공작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혼인이라는 방법을 이용하곤 했지. 해서 말인데 자네를 황태자 아니 미래의 황제 장인으로 만들어 주겠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뻔뻔한 말에 판테르 공작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사랑하는 부인이 어떤 심정으로 죽었는지 모르지 않은 판테르 공작은 이를 사리물었다.
그게 전부 황제와 대신관이 일으킨 성전에 참전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곳과 같은 신을 믿지 않은 타국을 점령하며 세를 불렸다. 그 와중에 당시 황태자비의 출산이 멀지 않았다는 이유로 본디 황실이 출전해야 함에 그것을 공작가에 미뤘다.
한데 이제 와서 저런 말을 하다니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온 판테르 공작은 조용히 주먹을 꽉 쥐었다.
“저는 폐하와 사돈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영애를 알아보심이 옳을 것 같습니다.”
“황태자비는 미래의 황후가 될 수 있는 자리일세. 여자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서게 되는데 그걸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네만.”
그깟 황태자비 네가 다 해 처먹으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두 주먹이 당장이라도 황제를 향해 꽂힐 것 같자 급히 티그리스 공작과 아퀼라 공작이 한 손씩 잡았다.
어찌 보면 영광스러운 자리를 권한 건데 판테르 공작이 황제를 때리면 안 되었다.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지금은 참아야만 했다.
“왜 내 부인이 죽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안타깝게 생각하네만…….”
“하아, 안타깝습니까? 진정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리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도록 폐하께서 당시 황태자 시절에 참전해야 옳았음을 모르고 하신 말씀입니까.”
“그땐 비가 황손을 임신 중이라서 어쩔 수 없었네.”
“폐하! 황손을 임신하고 낳으신 건 황태자비 마마셨지, 당시 황태자 전하이시진 않으셨습니다.”
4년 전 성격이 나오며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을 두 공작이 붙잡았지만 그들의 손 역시 바들바들 떨렸다.
아퀼라 공작은 그 전쟁으로 선대 공작이자 아버지를 잃었고, 티그리스 공작은 딸을 잃었다. 모두 소중한 이들을 잃은 세 사람은 동시에 황제를 쏘아봤다.
“이 세상에서 만인의 자리에 오른들 우리 딸이 행복하란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 방금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잘게 떨린 판테르 공작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애처로웠다. 분노와 슬픔으로 점철된 모습에 루피노 공작마저 가슴이 떨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큰 사달이 일어날 것 같을 때 티그리스 공작이 판테르 공작 앞에 서서 말했다.
“저흰 물러가 보겠습니다. 내일부터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니 기다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네, 나를 따라오게나. 같이 술이나 한잔하지. 오늘따라 세라피나가 너무 보고 싶군.”
비록 세라피나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라피가 있다고 한들 딸을 잃은 기억마저 희석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티그리스 공작이 판테르 공작과 아퀼라 공작을 이끌고 돌아섰다.
“아버님!”
“자네! 오늘은 내 말대로 해 주게나. 부탁하겠네, 손녀사위님도 따라오게나. 우리 오늘 코 삐뚤어지게 같이 마셔 보세.”
“네, 할아버님이 원하신다면…… 대신에 술 많이 마셨다고 에리카가 뭐라고 하면 방어해 주셔야 합니다.”
“알겠네. 그건 걱정하지 말게나. 내가 완전히 강한 실드를 쳐 주겠네. 그러니 우리 집으로 같이 가세나.”
움직이지 않으려는 판테르 공작의 손목을 강제로 잡고 돌린 티그리스 공작 옆을 아퀼라 공작이 지키듯 섰다. 그런 그들 뒤를 다니엘이 서서 걸었다. 판테르 공작이 돌아서서 혹시라도 황제를 볼까 봐 제 왜소한 체격으로 최대한 막고자 했다.
그 모습을 본 루피노 공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 이번엔 너무 앞서가신 것 같군요. 판테르 공작부인이 임신 중인 걸 몰랐다고 한들 성전이라 이름 붙은 전쟁에 폐하께서 참여하지 않아 만인의 놀림감이 되었음을 모르십니까.”
루피노 공작이 정중하게 황제를 센 불에 볶았다. 그러곤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은 드라코 공작을 향해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폐하를 지키는 것만으로 드라코 공작의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네. 옆에 있으면서 간언조차 하지 않은 측근은 쓰레기나 마찬가지이지.”
“루피노 공작! 지금 뭐라고 하는 건가. 지금 나보고 쓰레기라고…….”
“한 번 쓰레기는 영원한 쓰레기이지. 쓰레기에 보석을 걸친다고 한들 그게 명품이 되는 건 아니니까.”
“자네 지금 말이면 다인 줄 아나!”
“그럼 실력 행세를 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입 다물고 있지? 드라코라는 성이 울겠군.”
검병을 잡은 드라코 공작의 안면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모습을 본 루피노 공작은 코웃음을 쳤다. 제아무리 드라코 공작이 날고뛴다고 한들 루피노 공작은 그걸 가볍게 밟고 지나갈 능력이 되었다.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능력에 노력이 더해 맺어진 결실에 루피노 공작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드라코 공작, 대련을 원하는 거라면 언제든지 사양하지 않을 테니 들어오게나. 그럼 폐하,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황제에게 가벼운 예를 표하며 돌아서려던 루피노 공작은 대신관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대신관, 우리 백설기, 아니 판테르 영애를 계속 파멸의 아이라고 지칭한다면 큰 변고를 당할걸세.”
“루피노 공작님! 지금 저를 겁박하시는 겁니까?”
“아니, 사실인데. 솔직히 말해 지금 동부에서도 쫓겨나지 않았나. 조만간 북부와 남부에서도 신전이 축출당하겠군.”
“루피노 공작님!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신을 믿는 자들에게…….”
“판테르 영애가 말하지 않았나. 자네는 뱃살이 흘러넘치고 제국민은 굶어 죽어 간다고. 일회성 구휼 같은 거 할 시간에 자네 뱃살이나 집어넣게. 뭔 말을 해도 설득력을 잃고 있다는 거 잊지 말고.”
루피노 공작은 저를 보고 두 눈을 파르르 떠는 대신관을 보며 비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루피노 공작 역시 대신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계속 지켜만 보는 중이었다. 선량한 가면을 쓴 채 민초의 고혈을 빨아들이는 신전이 예쁘게 보일 리 없었다.
신을 믿으며 매달리는 사람들을 달콤한 말로 현혹해 탐관오리보다 더한 수탈을 하는 이들을 손볼 생각이다.
“조만간 서부의 신전에 세금 조사가 시작될걸세. 아무리 신을 믿는다고 한들 그 믿는 이들이 인간이란 존재이니 세금은 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무슨…… 종교엔 세금을 물리지 않는다는 법이…….”
“없네. 내 아무리 법전을 뒤져 봤건만 그런 문구는 없더군. 없는 법을 갑자기 만들어내기엔 반발도 만만치 않을 테니 폐하께서도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진 못할 것 같고. 후훗.”
서부에 자리한 신전에 지난 세금까지 매길 거라는 루피노 공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남의 땅에 신전을 지어서 건물세, 토지세도 안 내고 말일세. 이것이야말로 폐하를 능가하는 권력이고 횡포이지 않은가.”
“…….”
“싫으면 서부에서 짐 싸서 나가든가. 절대 말리지는 않겠네. 그럼 이만.”
상큼한 미소를 지어 준 루피노 공작은 그대로 돌아섰다. 마차가 있는 곳으로 걷는 중에 미소를 지운 미네르바는 씨엘을 연방 쓰다듬었다.
“정말 그 조그만 아가씨가 세라피나 님의 여식이 확실한 겁니까.”
“그레이스 경은 그나마 그분이 살아 계실 때 마지막까지 보지 않았나.”
“네, 그랬습니다. 가족들에게 보낼 편지를 다급히 적으시는 것을 봤습니다. 그러던 중에 적이 쳐들어왔고, 편지를 누군가에게 맡긴 후 저희를 퇴각시키고…… 크읍!”
“그 편지가 가족에게 제대로 전해졌다면…… 정말 가슴 아픈 유언이 되었을 것 같군.”
당시 세라피나는 적의 함정에 빠지자 다른 지역에서 지원한 이들을 전원 퇴각시켰다. 그리고 본인은 판테르 가의 소수 정예와 함께 산화했다. 아군을 단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본인을 희생했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봤던 그레이스 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성이 아닌 기사로서 존경한 이의 딸임을 알게 된 그레이스 경은 가슴이 아팠다. 분명 세라피나와 함께 죽은 줄 알았는데 어떻게 태어나 제 아비 품에 안겼는지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세 공작가에서 이미 친자 확인을 했다는데 제삼자는 반문하지 않았다.
“만일 정말 그분이 루피노 가의 며느님이 되신다면 저는…… 그분을 지킬 것입니다. 이번엔 저희가 세라피나 님 대신 아가씨를 지켜드릴 것입니다.”
“그건 당연한걸세. 문제는 우리 며느님이 되실지 모르겠어. 세상에나, 기가 세기로 유명한 세 공작가의 사랑을 받을 줄이야. 아마 결혼한다고 하면 상대를 피떡으로 만들고 볼걸세.”
판테르 공작도 버거울 건데 티그리스 공작과 아퀼라 공작이 뒤에 버텼다. 아마 뭘 하든 세 공작의 허락이 떨어져야 가능할 것이다.
“자! 씨엘,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느냐. 황제조차도 라피를 노리지 않니. 얼른 가서 곁을 지키면서 공부하고 강해져야지. 그런 것도 못하면 후계자든 뭐든 확 엎을 거야.”
빙그레 웃은 루피노 공작의 말에 씨엘은 곧장 어깨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곤 한 번 뒤돌아보더니 그대로 내달렸다.
“공작님, 이대로 도련님을 보내셔도 됩니까? 오랜만에 만나셨는데.”
주변을 쓱 살핀 후 인기척이 없자 그레이스 경이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