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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97)화 (97/164)

97화. 

누군지도 모를 여자의 말에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저는 라삐라고 해요. 근데 예쁜 언니는 누구?”

“음? 아, 예쁜 언니 이름은 미네르바라고 한단다.”

아들이 있다는데 묘하게 아빠처럼 동안인 것 같았다. 그런 여자에게 예쁜 언니라고 칭하면 싫어할 사람은 별로 없었다. 미네르바라고 이름을 밝힌 이는 제 얼굴을 어루만지며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예쁜 언니한테 아들 잇써요? 못 믿겟써요.”

“호호호, 나도 그리 생각한단다. 한데 안타깝게도 아들이 있단다.”

아들을 낳은 것을 천추의 한이라도 느낀 듯한 미네르바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예쁜 언니는 아들 잇는 거 시러요?”

“싫긴, 좋단다. 단지 그보다 더 좋은 딸이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지. 남편의 씨가 제대로 일을 안 한 탓이랄까.”

“쿨럭.”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괜찮을 것 같아. 딸 대신에 예쁘고 포실포실한 며느리를 보면 되니 말이다. 그나저나 그리운 분이 생각날 정도로 닮았구나. 안 그런가, 그레이스 경?”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내게 헛바람을 먹여 기침하게 만든 미네르바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런 것 같긴 합니다만…… 얼른 가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다들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아이는 제가 맡을 테니 얼른 가시지요.”

“되었네, 이 아이는 내가 데리고 갈 테니 자네는 신경 쓰지 말게나. 내 미래의 며느님을 데리고 가는데 어느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미네르바의 뒤에 선 여자는 매우 늠름해 보였다. 보통 황궁엔 검을 들고 올 수 없었다. 단! 공작급 귀족의 호위기사 중 극히 일부만 검을 착용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봐서는 저 언니는 엄청난 실력을 지닌 기사일 것이고 나를 안은 미네르바는 최소 공작이라는 뜻이 된다.

공작급 이상의 여성은 이 황궁 내에서 황후 한 명이었다. 한데 대충 생김새를 듣기로는 금발과 청안이라고 하였다. 고로 미네르바는 황후가 아닌 공작이었다.

동부는 아빠, 북부는 할아버지, 남부는 형부 그리고 중부는 작년에 날 잡으러 온 예의 없는 아저씨다. 결론은 서부였다. 서부에서는 직접 사람이 오진 않았지만, 자꾸 귀한 선물을 보내 줬다.

본디 4년 전에 있었던 전쟁은 서부 공작 차례였다. 한데 출산과 내부 분란으로 인해 참전하지 못했다. 그 결과 임신한 줄도 모른 엄마가 대신 참전해 죽은 것에 죄책감을 느낀 탓이다.

반려의 출산이 아니라 공작 본인의 출산이었으니 움직이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본인을 대신할 병력을 보내긴 했지만.

미네르바의 품에 안긴 채 두 눈이 서서히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뭔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다.

“우웅, 엄마…….”

나도 모르게 엄마를 찾았고 화들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뜬 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엄마가 보고 싶니? 엄마는 어디 계시지?”

“아빠가 하늘나라에 계신다고 햇써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말하자 미네르바는 내 등을 다독였다.

“엄마가 하늘나라로 먼저 가셨나 보네. 이런 백설기를 두고 어찌 먼저 가셨을까.”

“후아암, 그래도 갠차나요. 라삐에겐 하부지랑 아빠, 언니랑 오빠 그리고…….”

손가락으로 가족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말한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우리 가족 만낫쓸 때 엄마 찾은 거 비밀이에요.”

“왜 그렇지?”

“슬퍼할 거에요. 아마도.”

나름 속 깊은 딸 역할에 심취한 나는 씨엘을 보듬은 채 털을 고르듯 매만졌다.

“그래, 우리 백설기가 엄마 찾았다는 것은 예쁜 언니가 비밀로 해 줄게. 근데 이 고양이는 어디서 만났니?”

“하부지네랑 같이 나들이 가서 만낫써요. 데굴데굴 굴렀는데 밑에 깔렷써요.”

“오, 그랬구나. 참 인연이 깊은가 보구나. 얼마나 예쁘게 길렀으면 털이 반들반들 윤이 날까. 게다가 무게감도 있고 말이야.”

내 말을 매우 흥미롭게 들은 미네르바의 시선이 씨엘에게 꽂혔다. 까만 털은 햇볕에 닿아 검은 비단처럼 고운 자태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름은 뭐라고 지어 줬니?”

“씨엘로에요. 애칭은 씨엘! 이쁘죠?”

“어? 응, 참 예쁘구나. 우리 미래의 며느님은 마음도 착하셔라. 이런 주인도 없는 고양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텐데 이름까지 지어 주고 말이야.”

영지에 있는 판테르 공작저에서 벤스가 하도 미래의 며느리라고 불러서 미네르바가 부르는 호칭에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품에 편히 안길 뿐이었다.

“근데 우리 어디로 가요?”

“으음, 고리타분한 사람들이 잔뜩 있는 곳이랄까? 우리 백설기가 가면 상당히 지루해서 하품할지도 모르는 곳이란다.”

설마하니 그곳에 가서 재롱을 부리라는 건 아니겠지? 순간 흠칫한 나는 씨엘을 꽉 보듬었다.

“무서운 사람들이 잔뜩 잇써요?”

“으음, 우리 백설기가 보기엔 무서울지도 모르겠구나. 그래도 괜찮아. 내가 다 막아 줄 수 있으니까 말이야.”

“이야, 예쁜 언니 힘 쎄군요. 멋쪄!”

“크흠흠, 내가 원래 좀 하는 편이란다. 그러니까 앞으로 무슨 일이 있거들랑 예쁜 언니한테 말하렴, 다 들어 줄 테니까.”

호언장담하는 미네르바를 본 나는 방긋 웃었다.

“우리 백설기는 누굴 닮았지?”

“엄마요! 다들 제가 엄마랑 하부지 닮앗다고 해요.”

“그래? 엄마를 닮았다니 아빠가 정말 좋아하시겠구나.”

“니에, 아빠도 그러쿠 다들 좋아해요. 그리고 울 아빠 가슴 빵빵해요. 그래서 더 좋아요.”

중간에 아빠 자랑을 늘어뜨린 나는 헤죽 웃었다.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탄탄하고 빵빵한 가슴의 소유자인 아빠가 저 멀리 보였다.

“저기 무서운 사람들이 잔뜩 있지만 괜찮…….”

“아빠닷!”

“음?”

“하부지랑 형부도 잇써요. 헤헤헤.”

내 말에 미네르바와 뒤에서 따라오는 이의 두 눈이 큼지막해졌다. 그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한쪽 손을 들어 흔들며 외쳤다.

“아빠, 하부지, 형부!”

내 부름에 동시에 세 남자가 돌아봤다. 잔뜩 굳어 있던 세 사람의 표정은 봄 햇볕에 눈 녹듯이 풀려 봄바람을 닮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 찹쌀떡!”

“말랑 콩떡!”

“인절미 처제! 여긴 어떻게 온…… 루피노 공작님?”

각자 취향대로 부르던 세 명은 미네르바를 보고는 잠시 표정을 굳혔다가 풀었다.

“우리 미래의 며느님인 백설기의 아빠가 판테르 공작님이셨을 줄이야.”

순간 세 명은 정색했다.

“우리 딸은 나랑 결혼하기로 했소이다.”

애써 표정을 부드럽게 한 아빠가 걸음을 옮겨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어떻게 온 거지? 아빠가 분명히 보호소에 맡겨 두고 왔는데.”

“우웅, 그러니까 이캐저캐해서 요러케 되엇써요.”

“세라피나 판테르,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 그럼 아빠가 용서해 줄 테니까.”

예전엔 통했는데 이젠 통하지 않았다. 아빠가 내 이름을 풀네임으로 부르면 왠지 무섭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고 미네르바가 나를 좀 더 꼭 끌어안았다.

“사실은…… 거기서 나 무시한 애가 있었는데 다니엘 오빠가 와서 해결해줫써요. 근데 오빠가 친구랑 이야기하는 동안 지루해서 몰래 나왔다가 경사진 곳에서 굴럿써요.”

“뭐? 굴러?”

순간 놀란 아빠가 나를 미네르바의 품에서 번쩍 안아 올리더니 사방으로 돌려봤다.

“예쁜 언니가 받아줘서 안 다쳣써요.”

그때야 내가 미네르바와 함께 온 이유를 알게 된 아빠는 곧장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우리 찹쌀떡을 주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넝쿨째 굴러떨어진 백설기를 안 주울 수는 없지요.”

약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할아버지와 형부가 와서 두 번, 세 번 나를 샅샅이 살폈다.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아이가 자네 아이라는 건가?”

“아, 그렇습니다만. 어딜 봐도 부인을 닮았지요. 게다가 마법사로서의 재능도 있어서 완벽한 외탁임이 판명났습니다만.”

낯선 목소리가 들려 그곳을 보자 금발에 녹안을 지닌 중년의 남자가 드라코 공작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살이 피둥피둥 찐 남자가 나를 인자한 눈으로 봤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매우 날카롭게 빛이 났다.

“은발에 금안은 어디에서나 흔하게…….”

“있을 리가 있나. 우리 집안 직계의 특징인데.”

은발에 금안을 지닌 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티그리스 공작가의 핏줄이 아닌 존재에겐 매우 드물게 나타나긴 했다.

나를 부정하려는 뚱뚱한 남자의 말을 끊은 할아버지는 한쪽 입술을 쓱 올렸다.

“아빠! 저기 잇는 사람 누구예요?”

“아, 황제 폐하와 대신관이란다.”

매우 간략한 설명에 나는 아빠의 품에서 내려와 쫄랑쫄랑 걸어 황제 앞에 섰다. 그러곤 치맛자락을 붙잡고 인사했다.

“제국에 영광이 있기를…… 세라피나 판테르입니다. 폐하!”

“그, 그래. 네가 판테르 공작이 입양한 그 아이인가 보구나.”

“니에, 더불어 옆에 잇는 예의업는 아조씨가 데려가려다가 실패한 아이랍니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

순간 두 눈이 꿈틀한 드라코 공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음? 아이가 인사를 하는데 받아주지도 않다니 드라코 공작가의 예의는 딱 그 수준인가 보군. 아이들이 보고 배우다가 예의 없다고 뒤지게 얻어맞겠어요.”

뒤에 서 있는 미네르바가 픽, 웃으며 드라코 공작가 전체를 말로 두들겨 팼다. 그러자 드라코 공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보면 어쩔 텐가. 왜? 싸우게?”

“그건 아니오.”

“당연히 아니어야지. 자네는 사병도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야 움직일 수 있는 존재니까 말일세.”

한마디로 황제의 허수아비임을 대놓고 저격한 미네르바는 유연한 미소를 지으며 황제에게 뒤늦게 인사했다.

“미네르바 루피노입니다. 폐하,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그대는 여전히 나를 보는 게 늦군 그래.”

“네, 죄송합니다.”

매우 담백하게 사과한 미네르바의 시선이 대신관에게 닿았다.

“대신관도 항상 나를 보는 게 늦군 그래. 인사를 먼저 안 하는 것으로 봐서 말일세.”

“아! 죄송합니다. 루피노 공작님.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안녕하지 못했지. 4년 전에 누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난 항상 죄인이 되어야 했거든. 한데 자네는 너무 마음 편히 지냈나 보군? 나날이 옆으로 커지는 것으로 봐서.”

4년 전 전쟁으로 세 가문은 너무나 사랑한 이를 잃었다. 그를 콕 찍어 말하자 대신관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아빠 곁으로 가서 손을 꼭 붙잡았다.

“아빠, 나는 신 안 믿을래요.”

“그러려무나.”

이유 따윈 묻지 않고 허락한 아빠는 대신관을 보고 썩은 미소를 지었다.

“판테르 영애께서 어찌하여 신을 믿지 않으려는지요? 신을 믿으면 마음이 풍요롭고 여유로워집니다. 그리고 기댈 존재가 필요한 이에겐 희망을 주기도 하지요.”

신을 찬양하며 말하는 이의 두툼한 턱살을 본 나는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진 소리가 터졌다.

“신을 믿으면 떡이 생겨요? 밥이 생겨요?”

“신을 믿음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받지요.”

“아, 그 위안을 넘 많이 받아서 대신관님 살이 흘러넘쳣꾸나. 근데 왜 국민들은 신을 믿는데 굴머 죽어가는 거죠.”

“…….”

“믿음이 부족햇다고 말하는 거 아니겟죠? 신을 믿고 굶어 죽는 것보다 안 믿고 기부할 돈으로 밥 먹는 게 나을 것 가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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