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라피가 다니엘 티그리스를 부른 호칭에 다들 헛숨을 들이마셨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이 세상에서 다니엘 티그리스를 오빠라고 부를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매우 가볍게 안아 올려 입맞춤을 하는 것으로 봐서는 진짜 가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모습이었다.
“이곳에 네가 있다는 말에 얼른 뛰어왔단다. 한데 무슨 일이 있기에 우리 말랑 콩떡이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는 거지?”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다니엘의 말에 라피는 손가락을 들어 올리버와 베릴 가의 고용인을 가리켰다.
“오빠, 저 사람들이 나를 깔보고 무시햇써요! 예절 교육도 안 받앗대요.”
라피의 볼에 제 볼을 비비적대며 힐링을 하던 다니엘은 순간 멈칫했다. 항상 사람 좋은 표정만 짓던 다니엘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뭐라고? 내 동생한테 그딴 말을 했어? 우리 동생이 왜 예절 교육을 받아야 하지? 내가 보기엔 그쪽이 철저하게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음산하게 굳은 표정은 라피를 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풀렸다. 절대 무서워하지 말라는 듯 라피의 등을 다독이며 그들을 쏘아봤다.
“저, 저흰 그러니까…….”
“감히 판테르 공작의 여식이자, 티그리스 공작의 손녀이며, 아퀼라 공작의 처제인 우리 라피에게 예절을 운운하다니 참 기가 찬단 말이야.”
순간 주변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눈동자 굴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파멸의 아이임을 알게 되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 말을 꺼냈다가는 세 가문이 들고 일어서 영혼까지 탈탈 털어 버릴 거란 것을 알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귀한 분을 몰라 뵙고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베릴 가의 고용인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러면서 올리버에게 말했다.
“도, 도련님! 얼른 사과드리세요. 제발…… 공작가의 영애이십니다. 얼른요.”
다급하고 간절하게 말했지만, 올리버가 꿈쩍도 하지 않자 고용인은 저도 모르게 제 도련님의 몸에 손을 댔다. 급히 강제로 올리버의 머리를 숙이게 손으로 눌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도련님, 제발요…… 혼은 나중에 실컷 들을 테니까 제발…….”
베릴 가의 고용인이 올리버에게 눈짓하며 빌고 빌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올리버는 고개 숙인 채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도련님께서 아직 어리셔서…….”
“어리다고는 하나 우리 라피보다는 나이가 많을 것 같은데 아직 천지분간을 못 하나 보군. 베릴 가는 참 예절 교육을 자아알 하는군 그래.”
다니엘이 대놓고 비꼬았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조아리며 용서를 빌 뿐이었다. 그런 이들을 본 다니엘은 코웃음을 쳤다.
“이후로 이상한 소문이 도는 즉시 이곳에 있는 가문은 우리가 가만 안 둘 거니 그리 알게. 아이라고 해도 우리 라피에게 상처를 주면 절대로 봐주지 않을걸세.”
주변을 쓱 보며 한차례 경고를 한 다니엘은 라피를 꼭 보듬은 채 말했다.
“지금 공작님들끼리 만나고 계신 것 같더구나. 우리 거기 갈까?”
“니에, 아빠 보고 싶어요. 하부지랑 형부도.”
“나는 안 보고 싶었고?”
“오빠도 보고 싶엇써요. 근데 저번에 못 봣써요.”
“오구오구, 오빠가 보고 싶었어요? 미안해. 그때 너무 바빠서 우리 라피가 집에 왔는데 못 나가 봤어. 할아버지가 라피만 보면 일도 안 하고 그냥 나가시니.”
자연스레 라피를 안은 채 그곳에서 멀어졌다. 다니엘 티그리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굳어 있던 이들은 숨을 내쉬며 방금 자신들이 뭘 봤는지 떠올려야만 했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달았다. 절대 라피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다니엘의 품에 안겨서 수준이 맞지 않은 곳에서 탈출한 나는 나직하게 하품을 했다.
“라피, 졸리니?”
“아뇨. 그냥 하품 나왓써요.”
“자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렴. 오빠가 가슴 빌려줄게.”
“오빠 가슴은…….”
흐린 눈으로 다니엘의 가슴을 보며 손으로 꾹 눌렀다. 아빠와 형부와는 달리 말랑함이 느껴졌다.
“그, 그래도 헬레나는 내 가슴을 좋아한단다.”
“그거야 오빠 외의 딴 남자 가슴은 안 만져 밧쓰니까 그러겟죠.”
“읔!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겠어? 고모부의 가슴은 정상인 수준이 아니란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하렴.”
나를 안은 채 룰루랄라 콧노래까지 부르는 다니엘의 주변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바람 계열 마법을 배우는 중이라 그런지 감이 예민해져 일부러 죽인 인기척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아빠가 내게 몰래 붙여 준 기사가 분명했다.
“내려 주세요.”
“왜? 오빠 가슴이 만족스럽지 못해서 그런 거야?”
“그게 아니라, 자꾸 안겨서 가니까 다리에 힘이 업써요.”
제니가 옆에 있을 땐 걸어 다니는데 요즘 아빠와 오빠가 들러붙으면 바닥에 발을 대고 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러다가 있지도 않은 다리 근육이 다 빠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 그럼 오빠랑 손잡고 같이 가자꾸나.”
“니에.”
다니엘의 부드러운 손을 잡은 나는 촐랑촐랑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씨엘도 내 옆에 찰싹 붙어서 걸었다.
“이렇게 라피 손잡고 걸으니까 정말 기분 좋구나.”
“담에 에이랑 제이 손잡고 가면 기쁨 두 배!”
“아무리 내가 손잡을 사람이 없기로서니 두 아들놈 손을 잡고 걷겠니? 그럴 바엔 차라리 산책을 안 하고 말지.”
다니엘과 간단한 이야기를 하며 걸어갈 때 앞에 누군가가 오고 있었다.
“음? 아니 이게 누구야.”
“자네도 여기 왔나? 안 올 줄 알았는데 왔군 그래.”
다니엘의 말에 상대방이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 언제 늦둥이를 낳은 건가. 세상에나, 아주 티그리스 공작가의 핏줄임을 모르면 바보라고 할 정도로 찰떡같이 찍어냈군 그래.”
“허허허, 내 딸로 보이나?”
“음? 왜? 자네 딸이 아닌가? 그럼 누구야? 아무리 봐도 자네랑 닮았는데.”
나와 다니엘을 유심히 본 상대가 눈동자를 깜빡였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오빠 손을 슬쩍 놓고 치맛자락을 펼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세라피나 판테르라고 해요.”
내 인사를 들은 상대가 갑자기 환하게 웃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오! 세상에나, 세라피나 판테르라니…… 혹시 그분의 딸인가? 세상에나, 어쩜 이리도 똑 닮게 낳으셨을까. 하하하, 안녕, 내 이름은 앤드류란다. 앤드류 로저스.”
처음 들어 본 이름에 나는 다니엘을 바라봤다. 그러자 다니엘은 약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친구이자, 오래전에 고모에게 프러포즈하려고 했다가 나한테 죽도록 혼난 녀석이지.”
결론은 엄마를 짝사랑한 상대란 건가.
“오빠 친구?”
“응, 오빠 친구야.”
“오, 오빠아아? 다 늙어서 오빠라고 불리는 거야? 허허허, 세상에나…… 부럽군.”
나와 다니엘의 대화를 들은 앤드류는 갑자기 두 눈을 반짝이더니 상당히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갑자기 자신한테도 오빠라고 불러 달라고 주문했다. 오빠의 친구니까 당연히 오빠라고 부르는 게 옳다는 말에 왠지 설득력이 느껴졌다.
“헤헤, 라삐, 오빠가 돼요?”
“응, 애칭이 라피인가 보구나. 세상에나, 예쁘고 귀엽기도 하지. 자! 오빠라고 해 보렴.”
“오빠?”
“오, 한 번만 더!”
내일모레 사십대일 게 분명한 앤드류는 오빠라는 호칭을 무려 열 번이 넘게 듣고서야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미쳤나! 왜 우리 라피 힘들게 자꾸 부르래. 라피 오빠 외의 나이 많은 남자는 다 아저씨야. 그러니까 라피, 아저씨라고 부르렴.”
“아니 뭐래. 본인은 사촌동생이 오빠라고 부르니까 칠렐레팔렐레 웃으면서.”
“그럼 좋은 걸 어쩌라고. 이 세상에서 내 나이에 라피에게 오빠라고 불리는 남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별것도 아닌 것으로 다니엘이 앤드류에게 따지듯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앤드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봐 온 평소 다니엘의 이미지와 상당히 먼 모습이었지만 어쩌면 이게 본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할아버지에게 기죽은 채 마법을 배우고 집안일 하느라 매일 바빴다.
외삼촌과 외숙모가 돌아가셔서 강제로 어른이 된 다니엘은 친구 앞에서만큼은 그 짐을 덜어낸 듯했다.
내가 옆에 있음에도 그걸 깜빡한 채 친구와 편하게 말하는 것을 보며 픽, 웃음을 터트렸다.
“씨엘, 우리 딴데 가자.”
미야옹.
내 다리에 얼굴을 비비적댄 씨엘이 조심히 움직이자 따라갔다. 내가 씨엘과 함께 다른 곳으로 가고 있음에도 다니엘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하느라 모르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절대로 아는 사람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겠지만 나를 몰래 호위하는 이들이 있기에 걱정은 한숨 접어 넣었다. 뭐 나중에 내가 사라진 것을 깨닫고 황궁을 뒤지는 일은 다니엘의 몫이리라.
“씨엘은 여기 첨이지? 근데 당당히 가는 거야?”
냐옹, 냥!
분명 씨엘은 황궁에 처음 왔다. 한데 거침없이 움직였다. 아니 뭔가 다급함마저 느껴졌다.
“씨엘, 어디 가는 거야?”
냥, 냐오옹.
내 앞에서 걷던 씨엘은 어느 정도 간격이 벌어지면 그 자리에서 멈춰서 울었다. 그러다가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다시 저만치 멀어졌다. 마치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씨엘…… 설마 여기에 새끼 낳은 거 아니지?”
이건 마치 제 새끼를 도와 달라고 집사가 될 사람을 간택해 불러들이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냐오옹!
절대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은 씨엘을 본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언제나 그렇듯 씨엘은 사람 말을 잘 알아듣는 것 같았다. 마치 일반 고양이가 아닌 존재가 아닌가 싶었다. 드래곤은 이미 멸족해서 없다고 했으니 전설의 수인인가.
온갖 생각을 하다가 씨엘이 갑자기 뛰어가자 나도 급히 뛰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씨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속도를 올렸다가 갑자기 몸이 밑으로 꺼지는 느낌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꾸에엑! 찹쌀떡 살려!”
평지를 뛰다가 갑자기 경사진 곳이 나오자 나는 그대로 데굴데굴 구르고 말았다. 크게 다칠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 외로 아프지는 않았다.
“괜찮니?”
약간 가느다란 목소리에 남자가 아닌 여자임을 깨달은 나는 슬쩍 실눈을 떴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를 지닌 여자는 까만 머리카락을 질끈 묶었다.
여자라 체격이 조금 작아 보였지만 묘하게 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여자의 어깨엔 씨엘이 떡하니 올라가 있었다.
아빠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여자는 상당히 화려한 옷을 입은 채 나를 안고 있었다. 굴러떨어지는 나를 안아서 다치지 않게 해 준 게 분명했다. 조금 놀라서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나는 씨엘이 품에 안기자 얼른 꼭 끌어안았다.
“왜 갑자기 뛴 거야. 얼마나 놀란지 알아?”
“꾸웅.”
갑자기 한없이 가녀린 표정을 지으며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대는 씨엘의 모습에 나를 안은 여자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디서 이런 포실포실 쫀득한 백설기가 뚝 굴러떨어졌을까. 우리 아들 색시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