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95)화 (95/164)

95화. 

황실 연회는 며칠 남았다. 하지만 황도의 판테르 공작저는 매일 바빴다. 아니 정확히는 황도에 있는 세 공작가의 집이 북적였다.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 이렇게 돌아가면서 모였다. 그리고 오늘은 판테르 공작저에서 모임이 시작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모임이 아니라 잡담이랄까.

여자들만 말이 많은 줄 알았는데 남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아니라 요강이 깨질 것 같았다.

처음엔 분명 황제에게 나란 존재를 똭! 내보이며 세 가문의 가족임을 정식으로 말할 거라고 했다. 그런 주제에 이야기가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삼천포로 빠져들었다.

“아버님, 대체 어떻게 하면 딸을 낳을 수 있을까요?”

“크흠, 그건 아버님께 여쭤 보시게나. 우리 유진과 라피의 엄마를 낳아 주신 분이 아니신가.”

“딸 낳는 비법? 그런 게 뭐 필요 있겠는가. 그냥 사랑하면 아들이든 딸이든 하나가 나오는데.”

할아버지는 50%, 아빠는 66% 확률로 딸을 낳은 것으로 서로 어깨에 뽕을 집어넣고 있었다. 형부는 유일하게 딸이 없다는 이유로 패배한 표정을 지었다.

쪼옥, 쪽-

우유를 빨며 그 모습을 본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부는 언니를 설득도 못햇쓰면서 딸 낳을 생각만 하는 건가요?”

“음? 그건 그렇지만…… 우리 인절미 처제한테 귀여운 나이 어린 조카를 안겨 주고 싶어서 그러지.”

“이제 조카라면 지긋지긋해요.”

에비, 지지-

위로 올라가면 나이 많은 조카들이 들러붙었다. 밑으로 내려가면 역시나 한 살 나이 많은 조카가 결혼 타령을 해댔다. 여길 가도 조카, 저길 가도 조카, 아주 조카 복이 넝쿨째 굴러떨어지는 중인 나는 고개를 저었다.

“허허허, 에이든과 제이든이 그리고 엉겨 붙으면서 귀찮게 하였니?”

“니에, 얼마나 귀찬은데요.”

제이든은 자꾸 공부 가르쳐 달라고 제 선생님을 앞에 두고 나를 앞에 앉히질 않나, 에이든은 예비 신부인 사비나와 함께 뭐든 같이하길 원했다. 물론 중간중간에 마법 가르쳐 주는 것은 고맙지만, 아닌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보단 낫지 않느냐.”

“그건 그러치만…….”

“예쁘게 봐 주려무나. 녀석들 딴엔 우리 라피가 단비 같은 존재니까. 그동안 억압된 생활만 하다가 요 말랑 콩떡이 데구르르 굴러왔으니 오죽이나 좋았으면 귀찮게 들러붙겠느냐.”

할아버지의 말에 반박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에 무관심해서 내가 오든가 말든가 신경 쓰지 않고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보단 백만 배는 나았다.

“근데 여기에 하부지만 오신 거예요?”

“음? 아니, 다니엘도 왔단다. 지금 처리할 일이 있어서 우리 라피가 왔는데도 오질 못했단다. 왜? 오라비가 보고 싶은 게냐?”

갑자기 잔뜩 서운한 표정을 지은 할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매우 짧게 흔들었다. 내가 갔음에도 할아버지가 여유롭게 노는 바람에 다니엘은 얼굴조차 비치러 나와 보질 못한 듯했다.

“난 하부지만 잇쓰면 대요.”

“오구오구, 그렇지? 할아버지가 최고지? 하하하.”

역시 눈치는 기본으로 탑재를 하고 있어야 했다. 입가에 묻은 우유를 손수건으로 닦아 준 할아버지가 나를 번쩍 안아 올려 무릎에 올려 놓더니 꼭 안았다.

“우리 라피가 없었을 땐 뭐 하며 살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구나. 오구, 내 새끼! 왜 이리 늦게 왔누.”

정수리에 연거푸 입맞춤한 할아버지의 표정엔 잔잔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하부지 보고 싶어서 왓죠. 헤헤헤, 하부지는 나 안 보고 싶엇써요?”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

“크흠흠, 아버님!”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아빠가 헛기침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흐음, 아! 맞다. 라피 주려고 가져온 게 있는데 깜빡하고 있었구나.”

갑자기 뭔가 떠오른 할아버지는 종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세 가문의 사람들이 누굴 부르는지 몰라 두 눈을 부릅떴다.

“앤더슨, 그거 가져와 보게나.”

할아버지의 부름에 황도에 있는 티그리스 공작저에서 본 인물이 곱게 포장된 상자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라피, 선물이란다. 풀어 보렴.”

그리 크지 않은 상자를 본 나는 리본을 꼼지락꼼지락 만지작대며 할아버지를 봤다.

“가치 풀어요.”

“그럴까? 하하하, 그래. 같이 풀자꾸나.”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상자를 연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신발이었다. 그간 내 눈이 너무 높아졌는지 보석이 박힌 신발을 보고도 무감각한 표정을 지었다.

“얼른 신어 보렴.”

뭔가 재미있는 일이 터질 것처럼 잔뜩 기대하는 듯한 할아버지가 내 발에 직접 새 신발을 신겨 줬다. 새 신을 신고 바닥에 닿는 순간-

뾱-

음?

뾱뾱-

내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뾱뽁- 소리가 나며 동시에 보석이 반짝 빛이 났다.

“귀, 귀엽구나. 이거 미아 방지 기능도 있는 건가 봅니다. 하하하, 아버님!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라피를 보고서 집안에서 연구만 한 인간이 오랜만에 월급 값을 한 것이지. 라피, 마음에 드느냐.”

한국에서도 신어 본 적 없는 뾱뾱이 신발을 이곳에서 신어 볼 줄이야. 방긋 웃음을 머금은 나는 할아버지의 가슴에 찰싹 안겨 비비적댔다.

“하부지, 최고! 넘 좋아요. 고맙뜹니다.”

“허허허, 좋아해 줘서 나야말로 고맙구나.”

훈훈한 말이 오갈 때 나는 새 신발을 벗었다. 이 저택에서 뾱뾱이 신발을 신고 싶진 않았다. 내가 어디서 뭘 하든 고용인들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뾱뾱이 신발도 받았겠다, 나는 세 공작님 앞에서 재롱 아닌 재롱을 부려야만 했다. 그 결과 형부는 딸이 없다는 것에 좌절했고, 아빠의 어깨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할아버지는 말해 뭐 하겠는가. 이곳에 안 계신 다른 가족을 위해 통신구를 켜서 내 재롱을 생중계를 했다. 덕분에 방 안이 시끌시끌해졌다.

“히유, 힘드러. 저기, 스칼렛! 저 우유 더 주세요.”

“네, 네? 아! 네! 곧 갖다 드리겠습니다.”

집사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한쪽에 서서 대기 중인 스칼렛이 바르르 떨더니 얼른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언가를 팡팡 두들겨대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잠시 후, 스칼렛이 가져다준 우유를 먹다가 재롱부리는 게 힘들었던 탓에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순식간에 덮쳐 든 수마에 거부하는 것보다 순응한 내가 눈을 떴을 땐 아빠의 가슴 위였다.

아빠의 가슴 위에 침을 질질 흘리며 엎드려 자고 있던 나는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아빠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잘 잤니?”

“니에, 후아아암.”

늘어지게 하품한 나는 다시 아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비비적댔다. 그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 아빠는 등을 다독다독했다.

“조금 더 자렴.”

세상 어디에서도 들어 본 적 없는 다정한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귓가에 스며들었다. 귀를 열고 숨을 작게 뱉은 나는 아빠 가슴 위에서 꼼지락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이렇게 재울 걸 그랬어. 매일 이불을 차서 걱정했는데 이리 하니 이불을 차지 않고 매우 잘 자니 말이다.”

“후웅.”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한편으로는 가장 안정된 포근한 온기에 얼굴을 묻은 채 그대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 *

결전의 날-

아침부터 미친 듯이 힘을 준 채 치장했다. 세 가문에서 오케이 사인을 한 후에야 만든 원피스는 화려함 그 자체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보석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상당히 불편한 옷이었다. 그런 옷을 입고 헤어스타일도 바짝 힘을 준 채 묶고 풀더니 끝내는 보석 핀을 꽂은 채 위로 틀어 올렸다.

누가 봐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치장을 당한 나는 앞에 놓인 현실에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요고 내꼬야!”

“아니야, 내꼬야.”

“으아아아앙.”

아, 개떡 같다.

지금 나는 임시 아이 보호소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연회에 온 이들이 아이들을 맡겨 두는 곳인데 아빠가 잠시 볼일 보러 간다며 나를 이곳에 맡긴 것이다.

아이고 두야.

머리가 아팠다. 귀족가의 아이들은 참을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장난감을 보고 서로 자신의 것이라고 치고받고 싸울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본 육아 달인 고용인들이 뜯어말렸다.

“너는 어디서 왔어?”

“…….”

팔짱을 낀 채 얼른 아빠가 오기만을 기다릴 때 옆으로 온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올리버야.”

제 이름을 밝힌 아이를 쓱 본 나는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이가 입은 옷이 상당히 화려한 것으로 봐서는 돈푼깨나 있는 집안 같았다. 

애가 대체 왜 여기 있는 것인가.

“나는 세라피나.”

“세라피나? 엄마가 누구야? 아빠는?”

“엄마 없어.”

“그럼 아빠는 누구야? 어떤 가문이야? 난 베릴 백작가 장남이야.”

올리버의 물음에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고작 대여섯 살? 더 많아 봤자 예닐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한데 가문 이름을 들먹이면서 턱을 치켜드는 것을 보니 절로 혀를 찼다.

“그거 알아서 머하게.”

“말 안 해 주는 거 보니까 낮은 집안인가 보네. 쯧, 흥!”

내가 말해 주지 않자 올리버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나이도 어린 게 권위주의에 찌들어 있는 듯한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긴 했다. 하지만 나를 제 밑으로 보고 하찮은 심부름을 시키자 미간을 콱 찌푸렸다.

“야! 너 그러다가 울 아빠한테 뒤지는 수가 있어.”

“웃기네.”

“됐고, 좀 비켜. 울 아빠가 곧 올 꺼니까. 하이씨, 이젠 별게 다…….”

뒷말을 흐린 나는 육성으로만 말하지 않았지, 실컷 욕을 해댔다. 올리버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말이다.

팔짱을 낀 채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귀찮은 날파리를 보는 듯한 시선을 느낀 베릴 가의 고용인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이분이 누군지 아시고.”

“알아. 베릴 백작가라자나. 그래서 어쩌라고?”

이름도 모르는 고용인이 제 주인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지만 나는 눈곱만큼의 타격도 받지 않았다.

“내가 듣도 보도 못한 가문을 알아야 하나?”

“뭐. 뭐라고요? 베, 베릴 백작 가문을 듣도 보도 못했다니! 척 보니 시골에서 상경한 것 같군요. 그러니 베릴 가를 모르는 거겠지요.”

“내가 사는 곳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진짜 안 유명한가 보다. 그치? 씨엘.”

으르릉.

아까부터 옆에 얌전하게 식빵을 굽고 있던 씨엘이 꼬리를 치켜들며 경고음을 보냈다. 샛노란 눈동자에 약간의 살기가 느껴졌다.

“세상에, 족보도 없는 더러운 고양이를 데려오다니.”

“족보? 함부로 말하지 마. 그러다가 니네가 족보에서 지워진다?”

이런 사교 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기에 다들 나에 관련해 아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각 가문의 고용인과 기사들은 이쪽을 보며 흥미로운 눈을 했다.

“어쩜 말하는 것 봐. 예절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않았나 보군요.”

“움? 우리 아빠가 나는 그런 교육 안 받아도 된다고 햇써. 왜냐하면…….”

내가 말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금안을 반짝이며 짧은 은발을 휘날린 남자가 나를 보더니 밝게 웃으며 달려왔다.

“라피! 오빠 왔다.”

다니엘을 본 이들은 순간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런 그들의 반응을 즐기듯 쓱 본 나는 팔짱을 풀며 두 팔을 벌려 뛰어 안기며 말했다.

“오빠! 나 여기 수준이 안 맞아서 못 있겟써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