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엄마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온 황제 친필 연회 초대장이라고 한다. 그 초대장이 도착하자 벤스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런 것을 보냈을까요. 아, 생각해 보니 제정신이 아니니 보냈겠군요.”
대놓고 황제를 제정신이 아닌 인간 취급한 벤스의 말에 아무도 토 달지 않았다.
오도독 오독-
초대장에 내 이름도 있다는 이유로 나 역시 회의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어야만 했다. 주변을 살피며 평소보다 좀 단단한 과일맛 캐러멜을 씹어 먹었다.
“아무래도 저번에 아가씨를 납치하는 데 실패해서 초대를 가장해서 데리고 오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으드득.”
작년에 처음 오빠를 만나러 갈 때 나와 함께 갔다가 큰일을 치른 맥스는 이를 갈았다. 그때 다친 상처가 아직 몸에 남아 있음에도 마법 치료를 거부했다. 당시 있었던 치욕을 절대로 잊지 않기 위해 남겨 둔다나 어쩐다나.
심적으로는 누가 보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가 갔을 땐 이미 모든 자취를 지워 버린 후라 증거가 없어 대놓고 묻지 못한 상황이었다.
“워렌 후작님의 말씀대로라면 황궁으로 아가씨를 불러들여서 납치하려는 수작이로군요.”
손톱을 단검으로 갈던 카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른 흉기를 치우며 미소 지었다.
“아무리 황제라지만 황궁에서 아가씨를 납치하거나 해코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했다가는 본인이 잘못한 게 되니 말입니다.”
다른 아이도 아니고 내가 황궁에서 실종되면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렇기에 카를로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곳에 가 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황제가 친필로 쓴 초대장을 보냈는데 안 갈 수도 없지요. 잘못하면 황명을 거부한 게 되는 겁니다.”
“아, 그놈의 황명은 좀 거부해도 됩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봤습니까. 황명 거부로 군대를 보내겠다고 하면 들어오라고 하십시오. 제가 막아내겠습니다.”
자신감 가득한 벤스가 가슴을 탕탕 두들기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맥스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자그맣게 혀를 찼다.
“상대가 군대를 일으키면 우리도 병력을 보내야 하는데, 그리된다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 전쟁으로 인해 다치거나 죽는 자들은 어찌하려고 합니까?”
개개인의 목숨값을 정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고방식이 조금 트인 맥스는 최소한 군사들을 쓰다 버리는 패로 여기지는 않았다.
“공작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라피 아가씨를 데리고 가실 겁니까, 아니면 초대를 무시하실 겁니까.”
벤스의 질문에 아빠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통신구를 가져오라고 했다. 오스카가 평소처럼 두 개의 통신구를 가져왔고 마법사가 마나를 주입했다.
[연락한 거 보니까 황제한테 초대장이 왔나 보군.]
[어, 저도 방금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할아버지와 형부에게 연락한 아빠는 황도에 갈 생각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깟 인간들 무서워서 거길 못 가겠나. 가는 김에 우리 말랑 콩떡의 존재에 대해 머릿속에 콕콕 박아 줄 것일세.]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절미 처제가 우리 가족임을 정식으로 공포하면 감히 황제나 대신관이 손을 대지 못할 겁니다.]
형부 말마따나 아무리 날고 기는 황제와 대신관이라 할지라도 세 지역을 다스리는 공작가를 무시하진 못할 것이다.
“드라코 공작은 골수 황제파이니 빼더라도, 서부는 항상 그렇듯이 중립을 지킬 겁니다. 그리된다면 자연히 라피가 내 딸임을 인정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뿌드득.”
이를 갈며 말한 아빠의 뜻에 나의 황도행이 결정되었다. 그로 인해 나는 황도로 갈 준비를 해야만 했다. 정확히는 제니와 고용인이 내 짐을 싸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도 같이 갈 것이랍니다. 그러니까 안심하세요.”
제니가 방긋 웃으며 가방에 팬티 기저귀를 넣는 모습을 흐린 눈으로 봤다. 이젠 네 살이 되어서 더는 침대에 실례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혹시 몰라 챙긴다나 어쩐다나.
그곳엔 내가 쓸 물품이 없기에 이것저것 챙겨 넣다 보니 아빠의 짐보다 부피가 더 컸다. 이 모든 것을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 황도에 있다는 판테르 공작저로 훌쩍 보냈다.
“아가씨, 저는 이곳을 지키고 있어야 하니 안녕히 다녀오시지요.”
황도의 판테르 공작저에도 집사가 고용되어 있기에 굳이 본인이 가지 않아도 된다는 오스카가 손을 흔들었다.
“선물 사 올께요.”
“우리 아가씨, 많이 크셨군요. 허허허, 아가씨께서 건강히 다녀오시는 게 제 선물이니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니에.”
오스카와 이곳에 남기로 한 맥스에게 인사한 나는 씨엘을 안은 채 아빠의 품에 안겨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풍경이 바뀌고, 그곳엔 낯선 이들이 즐비하게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그리고 아가씨!”
이곳 사람들은 나를 처음 보지만 미리 연락을 받아서인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내 딸 세라피나일세. 나를 대하듯이 깍듯이 모셔야 할 게야.”
“네, 알겠습니다.”
아빠의 말에 단정하게 머리를 뒤로 넘겨 묶은 여자가 대표로 대답한 후 고개를 들었다. 바지 정장 차림의 여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라피나 아가씨, 저는 이곳의 집사인 스칼렛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앞으로 라삐라고 불러 주세요.”
“애칭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피 아가씨.”
정중한 목소리로 말한 스칼렛을 본 아빠는 시선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딸, 여긴 처음이라 좀 불편하겠지만 곧 익숙해질 게다.”
“갠찬아요. 여기도 너무 좋은 거 가타요.”
“마음에 드니?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내가 묵을 방이라고 안내해 준 스칼렛이 열어 준 곳은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여기 혹시 언니 방이엇써요?”
“에리카 아가씨의 방은 따로 있답니다. 이곳은 앞으로 라피 아가씨만 지낼 수 있는 방이니 마음 편히 쉬십시오.”
“진짜 예뻐요. 꾸며줘서 고맙뜹니다.”
“별말씀을요. 저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랍니다.”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스칼렛이 곧장 이곳에서 나를 시중들 고용인을 소개해 줬다.
“레아와 안나라고 합니다. 앞으로 제니를 도와 라피 아가씨를 보필할 아이입니다.”
스칼렛의 말에 레아와 안나가 잔뜩 굳은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를 처음 모시는지라 긴장한 듯합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라피 아가씨를 경험한 사람이 없다 보니…….”
이곳에서 최소 5년 이상 일했다는 레아와 안나를 쓱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 아빠는 일하고 있을 테니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렴.”
쪽-
이마와 볼에 쪽 소리가 날 정도로 입맞춤한 아빠가 나를 소파에 앉힌 후 돌아섰다. 집안의 가주는 절대 쉴 수 없는 존재였다.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아빠가 방 밖으로 나가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씨엘? 어디 가!”
미야옹.
아빠가 나가자 씨엘도 내 품에서 벗어나더니 곧장 나가 버렸다. 이곳 지리라도 익혀 두려고 그러나 싶다.
“오빠는?”
“아! 안 그래도 도련님께서 곧 이곳으로 오실 거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곳에 판테르 공작저가 있음에도 아카데미에 다니는 오빠는 한 번도 온 적이 없다고 한다. 한데 내가 이곳에 온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오겠다고 해서 다들 놀라는 중이라나, 어쨌다나.
“후움, 오빠 업쓰니까 곰부 할래요.”
“네? 공부라 하심은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요.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달려갈 기세인 스칼렛의 말에 제니가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아가씨께서는 마법 공부를 하신답니다.”
“네? 기사 공부가 아니라 마법 공부요? 아, 죄송합니다.”
놀란 티가 역력한 스칼렛은 얼른 정중하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난 하부지 밑에서 곰부해요.”
“할아버지라 하심은 티그리스 공작님이시군요. 대단하십니다. 라피 아가씨! 이 집안에서 마법사가 탄생하다니, 역시 공작부인의 피를 진하게 타고나셨나 봅니다.”
생김새부터 능력까지 외탁이라고 말하는 스칼렛은 유독 좋아했다. 잠시 후 스칼렛이 볼일이 있다며 나갔고 제니가 곁에 와서 소곤소곤 말했다.
“집사님께서 평소 공작부인을 흠모해서 그러하답니다.”
“음, 그래요? 실베스터 기사들이랑 가튼 건가.”
“아마도요. 오래전에 집사님께서 기사 공부하다가 크게 다친 적이 있거든요. 그때 공작부인께서 나타나서 도와주시고 이곳에서 일할 수 있게 뒤를 봐주셨다고 들었어요.”
“아항, 그러쿠나. 오지랖이 하해와 같네.”
단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같은 여자들이 잘 따르는 것으로 봐서는 성격이 참 대단한 것 같았다. 직접 경험해 봤으면 좋으련만.
“그럼 나 곰부할래.”
책을 펼쳐 들자 제니는 으레 그렇듯이 한쪽 소파에 앉아 손수건에 수를 놓았다. 내가 공부할 땐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그러한 것이다.
“자네들도 라피 아가씨께서 공부하실 땐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거나 서 있지 말고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거 가져오게나. 단 조용히 할 것! 아니면 밖에 나가 있어도 되고.”
절대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연거푸 말한 제니는 다시 시선을 돌려 수를 놓았다. 그 모습을 본 레아와 안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책 일글 줄 알죠?”
“네? 네네, 읽을 줄 압니다.”
“그럼 책 일그세요. 이거 얼마 전에 언니네 집에서 가져온 거에요.”
말은 가져왔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형부의 허락을 받고 영구임대 형식으로 갖고 튀었다. 언니가 또 콜린에게 로맨스 소설을 읽어 주자 애가 또 이상한 쪽으로 표현을 해서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 이걸 저희가 읽어도 되는 건가요?”
“니에, 일거도 돼요. 울 제니는 이미 다 봣써요.”
로맨스 소설을 여러 번 본 제니는 수를 놓으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레아와 안나에게 로맨스 소설을 준 나는 다시 마법 공부에 열을 올렸다.
이미 알고 있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었다. 책을 유심히 보며 배꼽에 두 손을 얹고 숨을 들이마셨다. 명상을 하듯 눈을 감았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시각을 차단함으로써 정신 집중한 나는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자연적으로 마나가 쌓이기까지 기다리기엔 내 인내심은 바닥을 쳤다. 실베스터 왕국에서 마법 스크롤을 찢으면서도 마나가 고갈되기 직전까지 갔다. 한심하기 그지없는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든 마나를 모으기 위한 호흡법으로 심신을 단련했다.
한동안 마음을 단련하던 중 노크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가 무섭게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라피, 오빠 왔다!”
문짝이 벽에 부딪쳐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연 오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었다.
“나 곰부해.”
“응, 공부해. 오빠는 앞에서 보고 있을게.”
가면 갈수록 주접이 는 오빠였다. 그런 오빠를 본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서 폴짝 뛰어 내려갔다.
“손!”
내가 손을 내밀며 말하자 오빠가 싱글벙글 웃으며 제 손으로 내 손을 온전히 덮었다.
“머하고 놀까?”
“정원에 봄꽃이 많이 피었을 거야. 우리 거기 가서 숨바꼭질하러 가자.”
어린아이인 척 고개만 꽃덤불에 묻고 궁둥이를 방싯방싯 흔들었다. 그것에 맛이 들린 오빠는 나를 볼 때마다 질리지도 않는지 숨바꼭질을 하러 가자고 했다.
“이휴, 알겟써. 숨바꼭질하러 가자.”
오늘도 나는 오빠와 놀아 주기 위해 두 눈만 가린 채 꽃 속에 파묻혀 엉덩이를 씰룩댔다. 마성의 엉덩이의 씰룩임에 아빠마저 완벽하게 유혹해 서류 작업 중인 맥스를 매우 슬프게 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