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겨울이 싫다.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것을 보는 낭만 따윈 엿에게 붙여 줬다.
“밖에 나가서 놀자. 응? 오빠랑 같이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자. 오빠가 다 맞아 줄게.”
얼마 전에 에이든을 나이 어린 삼촌의 명 아래 신나게 굴린 오빠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떻게든 나를 눈밭으로 끌고 가기 위해 노력하는 오빠의 마음이 가상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가기 시러.”
“왜?”
“추운 거 시러.”
“막 움직이다가 보면 더울 거야.”
“에취에취 해.”
“그건 우리 라피 몸이 약해서 그래. 오빠랑 밖에서 막 뛰어놀다 보면 건강해져서 감기 안 걸릴 거야.”
내 어깨에 본인이 사 온 망토를 걸쳐 주며 자꾸 나가자고 보챘다. 보들보들 폭신폭신한 털 망토를 쓸어 만진 나는 마지못해 오빠의 손을 잡았다.
촘촘하게 짠 털장갑에 털부츠를 신은 나는 제니의 센스대로 갈아입혀졌다.
뒤뚱뒤뚱-
너무 많이 껴입어서 그런지 걷는 것마저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걸을 때마다 온천에 녹은 물떡처럼 다들 벽에 착 들러붙어 늘어졌다.
“아가씨, 어디 가시는지요?”
“오빠랑 바께…… 오빠가 자꾸 나가자고 해서요.”
한숨을 푹 내쉰 나는 맞은편에서 온 맥스를 보며 세상 허무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허허허, 도련님께서 아가씨랑 놀고 싶으셨나 봅니다. 재미있게 놀고 들어오시지요.”
“니에.”
맥스를 향해 손을 흔든 나는 오빠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솜털 같은 하얀 악마의 똥가루가 휘날리는 모습을 멍하니 봤다.
“눈 내리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넋을 놓은 거야?”
“아, 몰랑. 얼른 눈사람 만드는 거 보여죠.”
눈이 치워지지 않은 곳으로 간 오빠가 두 손으로 눈을 뭉쳤다. 그것에 눈을 덧붙여 서서히 부피를 키웠다.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을 팔짱을 낀 채 보던 중 갑자기 분 돌풍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
눈을 굴리다가 언제 달려왔는지 오빠가 내 앞을 가로막은 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갠차나.”
“그럼 이제 우리 같이 굴리자. 몸을 움직이면 입맛도 좋아지고 잠도 푹 잘 수 있을 거야.”
몰래 홀로 마법 공부를 하느라 늦게 잤다가 아침에 깨어나면 입맛이 없었다. 한데 내게 불면증이 있어서 늦게 자서 입맛이 없다고 생각한 오빠가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자! 이제 데굴데굴 굴리면 돼. 오빠가 도와줄게.”
오빠와 함께 눈을 굴리다 보니 들지도 못할 정도로 커다랗게 변했다. 커다란 눈 덩어리를 놔두고 이젠 조금 작은 눈 덩어리를 만들어 그 위에 올렸다.
“쨘! 이게 눈사람이야. 어때?”
상당히 좋아하는 오빠의 장단에 맞춰 주기 위해 그 자리에서 팔짝 뛰었다.
“귀여워.”
“귀엽지? 그럼 하나 더 만들자.”
하나만 만들면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번엔 오빠가 큰 덩어리를 만든다며 내게 작은 덩어리를 만들라고 주문했다. 쪼그려 앉아서 작은 눈 뭉치에 눈을 더할 때 늦게 온 씨엘이 도와준답시고 앞발로 다독였다.
“씨엘, 가치 밀자.”
냐옹.
내가 눈을 굴리자 씨엘도 뒷발로 서서 앞발로 눈을 밀었다. 서서히 커지기 시작한 눈이 어느 정도 제 모양을 갖추자 오빠가 만든 눈 덩어리 위에 고이 올려졌다.
“히유, 힘드러.”
“벌써 힘들어? 우리 라피, 체력이 안 좋은가 보다. 보통 이 나이대의 아이들은 우리 집을 몇 바퀴나 돌 정도로 힘이 넘치던데.”
오빠의 말에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이 나이대 아이의 활동력은 어른들을 먼저 나가떨어지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난 움직이는 것에 체력을 쓰느니 마법 공부하는 데 올인하는 중이었다.
“라삐는 연약하니까 오빠가 지켜죠.”
“으, 응? 다, 당연하지. 오빠가 우리 라피를 지키지 누굴 지키겠어. 그런 김에 우리 하나만 더 만들까? 우리 라피가 힘드니까 좀 작은 것으로 만들자.”
그날 나는 무려 세 개의 눈사람을 만든 후에 녹다운당했다. 저녁조차 먹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고 다음 날 할아버지네 집에 가서는 기함을 했다.
“어제 라피가 아빠랑, 오빠랑 라피의 눈사람을 만들었다고?”
“니에?”
“모르는 척하기는, 어제저녁에 사위가 어찌나 침이 닳도록 자랑을 하던지…….”
아, 아부지! 라피 살려!
의미 없이 눈사람 세 개를 크기별로 만든 건데 아빠의 눈엔 우리 가족으로 보였나 보다. 그걸 할아버지한테 자랑했고, 그 결과 나는 이 대가족의 눈사람을 만드는 데 일조해야만 했다.
“요고는 하부지, 하무니, 오빠랑 새언냐 그리고 라피…… 에이랑 제이는 중간 생략!”
“어, 어? 자, 잠깐만 그러는 게 어딨어! 지금 눈 굴리고 있는 게 누군데.”
“형 말이 맞아. 고모, 다시 생각해 봐. 아니 어떻게 이렇게 듬직하고 어여쁜 조카 둘을 뺄 수가 있는데.”
눈사람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하다가 도저히 두 개는 더 못 만들 것 같아서 생략을 했다. 그랬더니 나이 많은 조카들이 반발하며 일어섰다.
“미안, 너무 힘드러서 더는 못 만들겠어. 하무니, 라삐 뜨거운 우유 마시고 시퍼요.”
뒤에서 나이 많은 조카들이 더 만들자고 아우성을 질렀지만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따뜻한 우유를 마시며 할머니 품에 안겨 녹아 가고 있을 때 할아버지는 아빠와 형부에게 동시 연락을 했다.
“허허, 우리 말랑 콩떡이 우리 가족 눈사람을 만들었다네. 어찌나 잘 만들었는지 눈사람이 막 굴러다닐 정도야.”
[네? 인절미 처제가 눈사람을 만들었다고요? 처제! 우리 집으로 와서 같이 만들자. 콜린이 좋아할 거야.]
형부가 내 쪽을 보며 외쳤지만 나는 픽, 웃으며 말했다.
“형부네는 눈 안 내리자나요.”
[엌! 이럴 수가!]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 남부를 아우른 공작인 형부는 좌절한 표정을 짓다가 아빠 쪽을 보며 말했다.
[아버님, 워프 게이트로 눈 좀 보내 주시죠.]
이 세상에 워프 게이트로 눈 보내 달라고 하는 사람은 처음이다.
“안 돼. 우리 라피가 가지고 놀기에도 부족해.”
[아니 그 많고 많은 눈 중에 눈사람 만들 정도만 주면 안 됩니까?]
“어차피 가지고 가 봤자 금방 녹지 않나.”
[으윽, 이럴 수가!]
형부는 두 번째 좌절하며 고개를 숙였다. 남부는 따뜻한 곳이라 아무리 추워진다 해도 눈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겨울을 보내러 오는 귀족들의 별장이 많은 편이었다.
[처제, 우리 동네엔 눈은 없지만, 모래사장은 있거든? 여기에서 떡두꺼비 집 짓고 놀까?]
이젠 하다못해 모래로 떡두꺼비 집을 짓자고 유혹하는 형부를 본 나는 고개를 돌려 할머니 품에 머리를 기댔다.
“라피가 싫다는군.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세나. 우리 라피, 낮잠 재워야 하니까.”
껄껄껄 웃으며 통신을 종료한 할아버지는 할머니 품에 안긴 내 머리카락을 연신 쓰다듬었다. 할아버지의 손길에 녹아내린 나는 몸이 따뜻해지자 졸려서 연거푸 하품을 했다.
“할머니랑 같이 잘까?”
“우웅, 오늘은 새언냐랑 자기로 약속했…… 후아암.”
“낮잠은 할머니랑 자고 밤엔 헬레나랑 자면 되지 않느냐. 응? 할머니랑 같이 자자꾸나.”
“우웅? 그럼 밤엔 하부지랑 하무니 가치 자요?”
“…….”
순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본래 공작과 공작부인의 방은 따로 있는데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면 같은 방을 사용하지 않았다.
“어, 으음…… 이 나이에 무슨…….”
“하부지랑도 가치 자고 싶은데.”
“어? 으음, 그, 그래? 우리 라피가 원한다면 어쩔 수 없구나. 커흠흠.”
할머니가 얼굴을 슬쩍 붉혔다. 부부이건만 단순히 같은 침대에서 잔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듯했다. 아직도 결혼 전의 순진한 아가씨를 보는 듯한 할머니의 품에 볼을 대고 비비적댔다.
“부, 부인…… 소피아, 우리 라피가 원하는데 어찌할 생각입니까?”
“우리 말랑 콩떡이 원하는 대로 해 줘야지요. 어떻게 온 아이인데 그깟 것 하나 못 들어주겠어요.”
수줍음이 스민 목소리에 할아버지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러곤 본인의 볼에 내 볼을 비비적댔다.
“오늘은 처음으로 이 할아비도 낮잠을 자 보는구나. 허허허.”
공작으로서 긴 세월을 지내면서 낮잠을 한 번도 자 본 적 없다던 할아버지는 그날 나를 할머니 사이에 둔 채 같이 잠에 빠져들었다.
막노동 수준인 눈사람 만들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에 선명하게 남았다. 판테르 공작저와 티그리스 공작저에 이어 아퀼라 공작저에서도 눈사람을 만들어야만 했다.
눈이 내리지 않아서 특별히 판테르 공작저에서 눈을 수입(?)한 형부는 기어코 눈사람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눈사람을 만들고 나서 얼마나 뿌듯해하던지 모른다.
눈사람은 만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내 덕분에 만들어 봤다나 어쨌다나. 온몸에 근육통이 생겨서 낑낑대는 내 팔다리를 언니가 조심히 주물러 줬다.
“그러기에 눈사람을 만들려면 혼자 만들 것이지 왜 우리 라피랑 만든다고 떼써서 애를 아프게 해요? 아버지가 아시면 다시는 안 보내려고 할 건데.”
처음 만든 후엔 오빠가 언 몸을 풀어 준다며 미리 마사지를 해 줘서 조금 피곤하기만 했다. 두 번째엔 할아버지가 마법을 걸어 줘서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세 번째엔 아무런 조치도 해 주지 않아 다음 날 끙끙 앓았다.
“아버지, 나빠요. 이모 아프자나요.”
콜린도 조그만 손으로 내 팔을 꾹꾹 눌러 줬다. 씨엘마저도 분홍젤리 발바닥으로 정성 들여서 꾹꾹이를 했다. 털 있는 동물을 싫어한 형부도 씨엘이 나를 위해 목숨을 내건 것을 알기에 이젠 데리고 와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아니 이미 눈사람을 만들어 본 처제라 괜찮은 줄 알았…… 처제, 미안해. 그래도 아이들이랑 눈사람 만들어 보는 게 소원이어서 우리 처제를 무리시켰어.”
실제로 형부의 버킷 리스트에 진짜로 105번째 줄에 아이들과 함께 눈사람 만들기가 적혀 있었다.
“형부, 버킷 리스트에 적힌 게 왜 이리 마나요?”
“음? 어…… 어렸을 때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느라 하고 싶은 것을 전부 못했거든. 그래서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을 적다 보니 많아졌어.”
생전에 이걸 다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형부는 드디어 하나가 이뤄졌다면서 한 줄을 그었다. 겨우 버킷 리스트 중에 하나가 이뤄졌을 뿐인데 뿌듯해하는 형부를 보니 안쓰러워 보였다.
“그럼 앞으로 하나씩 라피가 올 때 해요.”
“정말? 그래도 될까? 하하하, 역시 딸이 있어야 했는데…….”
아들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들은 콜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이모랑 결혼하면 다 해결 되자나요.”
아직도 나와의 결혼에 미련을 못 버린 어린 콜린이 방긋방긋 웃었다. 그 웃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왔다. 드디어 좀 살 만한 환경이 되자 나는 바깥에 나가서 실컷 바람을 맞이하며 그 시간을 즐겼다.
“제니, 씨엘은?”
“듣기로는 연무장에서 얌전히 식빵을 굽고 있다고 합니다.”
“후음, 대체 씨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잇쓸까.”
“글쎄요. 제가 보기엔 화려한 움직임이 많아서 낚싯대처럼 여기는 걸까요.”
씨엘이 옆에서 놀아 달라고 보채지 않아서 낚싯대를 휘두르지 않아도 된 나는 봄바람을 들이마시며 봄을 만끽했다. 한동안 정원에 있다가 들어간 나는 평소완 달리 굳은 표정을 한 아빠를 봤다.
“아빠? 무슨 일 잇써요?”
“음? 아, 별것 아니란다.”
별것 아닌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재차 묻자 아빠가 이를 으드득 갈며 말했다.
“황궁에서 초대장이 왔단다. 봄 연회에 초대한다는구나. 나와 우리 라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