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바퀴벌레도 정력에 좋다고 하면 잡아먹을 존재들이 널리고 널렸다. 그렇기에 혹시 하는 마음에 정력에 좋다고 말했는데 그게 들어 먹힌 것 같았다. 이걸 플라시보 효과라고 해야 하나.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저, 정말 뉴트리가 정력에 좋은 건가요? 그런 건가요?”
순간 아빠를 따라온 벤스의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당장이라고 실베스터 왕국에 밀입국이라도 할 태세였다.
“그걸 미뎌?”
“아니 그럼 우리 순수한 아가씨께서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아녀. 고짓말 아니에여.”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선의의 사기랄까? 하지만 차마 사기라고 할 수 없었던 나는 방긋 미소 지었다. 원인이 어쨌든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 아니겠는가.
“저 당장 실베스터 왕국에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뉴트리라…… 아니 이 기회에 뉴트리를 수입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결혼도 안 했으면서 정력에 좋다고 하니 환장한 벤스를 본 아빠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설향을 쥔 채 어떤 걸 먹을까 고민 중인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역시 우리 라피는 여기 있는 보좌관보다 더 똑똑해서 탈이야. 아빠가 젤리 같은 돌멩이 많이 많이 줄게. 아빠랑 같이 집안 운영할래?”
“아녀.”
풉-
아빠가 보석을 미끼 삼아 나를 이곳에 영원히 눌러 앉히기를 시도한 것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자 옆에 있는 벤스의 입술 사이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 우리 라피는 아빠랑 결혼하기로 했잖아. 그럼 여기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데.”
“우웅, 구치만 언냐네 지베도 가야하구, 하부지네 지베도 가야 해여.”
몸은 하나지만 갈 곳은 여러 곳이었다. 내가 간다고 하면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보석 길을 깔아 줄 곳이 있었다.
“흐음, 지금 여기저기 저울질하고 있더냐. 뭐 어쨌든 이곳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어딜 가서도 언제든지 돌아오거라. 그렇다고 당장 그러라고 한 건 아니야.”
“니에, 알겟쏘여. 구럼 전 이만…… 에이, 나 마봅 곰부 갈쳐져.”
“당연하지. 같이 가자.”
“웅, 잠깐만. 아빠, 저것들 창고로 보내주떼여. 제니, 바구니 주떼여.”
벌써 주방에서 설향 소식을 들었는지 너도나도 나와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뭔갈 담기 위해 가지고 온 바구니를 달라고 해서 탐스러운 설향과 치즈를 담았다.
“요고, 마싯는고 만드러주떼여.”
“어이쿠, 여부가 있겠습니까.”
“글고 저곤, 맛이라도 보세여. 만들려면 맛을 바야조.”
“세, 세상에나…… 이리 귀한 것을 저희도 맛을 봐도 되겠습니까?”
끄덕끄덕-
자고로 요리하려면 식자재 맛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주방 직원들이 좋아서 환호성을 질렀다.
실베스터 왕국에서만 재배되며 타국으로 수출을 하지 않기로 유명한 과일이었다. 그렇기에 그걸 먹어 보고 싶은 이들이 한둘이 아님을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요고, 아가빼한테 주떼여. 글고 요곤 제니 머거여. 마싯써여.”
옆에 있는 이들에게 설향을 하나씩 나눠 줬다. 큼직한 설향을 든 이들의 얼굴엔 해맑은 미소가 걸렸다.
“벤! 요고 선쌔님한테 드려여.”
“저는요?”
“일 잘하묜 아빠가 줄꾸에여. 구롬 난 이만! 에이, 얼룬 가자.”
에이든의 손을 잡고 촐랑촐랑 걸음을 옮길 때 뒤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걸 먹고 싶으면 앞으로 일을 잘해야 할걸세. 평가제를 해야 하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다른 분들한텐 그냥 주셔 놓고.”
“그러니까 일하다가 뺀질뺀질 빼면서 튀지 말라고 하는 말이네. 자네 덕분에 맥스 일이 늘었잖나.”
뒤를 돌아보자 아빠에게 뒷덜미를 잡힌 벤스가 질질 끌려갔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이럴 때 보면 우리 고모는 악동 같아.”
“머래. 너 구론 말하묜 삐나 언냐한테 겨론하지 말라고 한다?”
“에이, 고모! 장난이야. 장난. 그나저나 어느 부분이 막혔어? 나한테 다 물어봐. 내가 이래 보여도 티그리스 가문의 후계자잖아.”
“후계자 중의 하나겟찌.”
에이든의 말에 중요한 말을 덧붙여 준 나는 내 방으로 녀석을 데리고 들어왔다. 따끈따끈한 벽난로가 피워져 있는 방은 바깥과는 완벽하게 단절된 곳 같았다.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 내 방에서 에이든에게 마법을 배웠다.
전직 마법사인 내가 이런 말 하기엔 뭐하지만, 에이든은 마법에 한해서는 천재급이었다. 내가 물어보는 말에 척척 대답했다. 그리고 컨트롤도 엄청나서 마법 크기를 원하는 대로 만들었다.
동글동글한 설향 크기의 파이어 볼을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모가 바람 소속을 타고났어도 다른 속성의 마법도 알고 있어야 해. 비록 고난도의 마법은 못 한다고 해도 이런 것들은 기본으로 알고 있으면 편해.”
“웅, 구곤 나도 알지. 아눈데 마나가 쪼꼬매서 컨트롤이 안대.”
“마나가 적으면 적을수록 컨트롤을 더 잘해서 불필요하게 새어나가는 것을 막아야지. 자! 이제 정신 집중하고 나 따라 해 봐.”
“웅.”
에이든의 손 위에 물이 동그랗게 덩어리졌다. 그걸 본 나도 똑같이 물을 떠올리며 마나를 사용했다.
조그만 주먹만 한 물이 생성되었다. 에이든이 만든 것보다 매끄럽지 않고 찌그러진 모양이었다.
“잘했어. 세상에, 이제 네 살짜리가 이런 마법을 한다고 하면 마법탑에서도 침을 흘릴 거야.”
“이베 침이나 바르고…… 구론다고 바로 바르냐!”
어쩌면 악동은 에이든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말하기가 무섭게 침을 바르는 모습을 본 순간 집중력이 무너진 내 찌그러진 물공은 사라져 버렸다.
“칫!”
“입술 삐죽 내밀면 뽀뽀할 거야.”
에이든의 협박에 나는 얼른 입을 두 손으로 가렸다. 그 모습을 본 에이든이 빙글빙글 웃으며 다시 수업을 이어 갔다.
“이때 바람 마법으로 온도를 낮춰 버리면 이렇게 할 수 있어.”
투명한 물공은 순식간에 얼어붙어 얼음공이 되었다.
“이게 바로 응용이라는 거야. 상대방이 내게 물 마법을 시전할 때 고모가 응용해서 바람 마법으로 얼려 버리면 돼. 그래서 바람 속성 마법사는 가장 위험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해.”
바람, 즉 공기의 온도를 급하강시키며 얼리면 그때부터 그건 내가 컨트롤할 수 있었다. 역으로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 속성 마법은 성가신 존재였다.
“우리 티그리스 가문에도 바람 속성은 별로 없어. 할아버지나 아버지, 그리고 나나 제이든도 불 속성이 강하거든. 근데 불 속성과 바람 속성은 또 잘 맞아서 마법을 극대화할 수도 있어.”
불에 산소를 불어 넣으면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렇기에 불 속성 마법사는 바람 속성 마법사와 같이하는 걸 선호한다. 비록 팀을 이룰 바람 속성 마법사가 적어서 문제지만.
“울 고모가 얼른 바람 속성 마법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랑 같이 짝을 이뤄서 다니면 이 세상에서 우릴 공격할 자는 별로 없을 거야.”
“댓거든.”
대놓고 눈을 찌푸린 나는 얼른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중이라 마법을 복습한다고 여겼다.
“마법이라면 여기에도 마법사가 있으니 배우면 되잖아.”
“낵아 구로길 바라니?”
“아니, 그랬다가는 할아버지가 요 앞에 집 지어서 살고도 남지.”
지금 눈이 펑펑 내려서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전까지는 자주 티그리스 공작저에 갔다. 하루라도 안 가면 할아버지가 왜 오지 않느냐고 서운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그것도 모자라 통신구를 이용해 마법 수업을 했다.
대단한 학구열로 활활 불타오르는 할아버지를 뒤에서 지켜본 다니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본인한테는 가르쳐 달라고 해도 귀찮다고 딴 사람에게 맡겼는데 나만 봐준다며 투덜거리다가 후계자가 바뀔 뻔도 했다.
집중해서 에이든의 수업을 들은 후에 쉬는 시간이 되자 나는 설향을 들고 벽난로에 쏙 넣었다.
“고모, 귀한 설향을 왜 불 속에 넣는 거야. 뭐 덕분에 향기가 진하게 풍기는 것 같긴 하지만.”
“우움, 라엘이 말햇써. 구워 머그면 더 맛나대.”
“음? 형님이 그랬다고? 고모를 놀리는 건 아니고?”
“아뉜데, 나한테 충썽한다고 말햇눈대.”
“형님이 본래 능력자만 우대해 주는 그런 습성이 있긴 한데, 우리 고모 능력에 홀딱 반했나 보네. 하긴 나도 우리 말랑 콩떡 볼에 찰싹 붙어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지만.”
에이든을 흐린 눈으로 본 나는 부지깽이로 적당히 불 속에서 굴린 설향을 꺼냈다. 호호 불어서 까려고 하자 에이든이 마법을 이용해 온도를 낮춰 줬다.
“내가 까줄게. 고모 손에 지지 묻어.”
까맣게 탄 껍질을 까자 진홍색 설향 알맹이가 드러났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설향 알맹이가 내 입에 쏙 들어왔다. 따끈따끈한 설향이 입안에서 톡 터지자 과즙이 흘러내렸다. 평소 먹었던 설향보다 훨씬 더 달았다.
“히야, 이거 징짜 맛나. 에이도 머거바. 아, 해바.”
에이든이 깐 설향을 집어 입에 쏙 넣어줬다. 내가 먹여 준 설향을 입에 문 에이든도 탄성을 질렀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네. 엄청 달아. 더 향긋하고.”
사이좋게 설향을 까서 나눠 먹은 나와 에이든은 입가에 검댕이 잔뜩 묻은 모습을 보고 낄낄 대며 웃었다. 서로 소매로 입술을 닦아 주며 벽난로 앞에 앉았다.
마법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인지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온몸이 노곤노곤하게 풀린 나는 에이든의 가슴에 안겨서 곤히 잠들었다.
폭신폭신한 하얀 털이 달린 조그만 빨간색 망토를 든 유진은 신난 표정으로 집에 도착했다. 황도에서 유행하는 털 망토였다. 털 망토를 라피에게 씌워서 솜방울이 달린 줄을 매듭지어 묶으면 너무나 귀여울 것 같았다.
라피를 생각하며 큰마음 먹고 털 망토를 사 들고 온 유진은 곧장 판테르 공작이 아니라 동생의 방 쪽으로 향했다.
“마법 멀미는 이제 괜찮은지요?”
“음? 아! 예전보다는 나은 편이네. 이젠 마차 타고 수일간 오는 것보다 차라리 하루 마법 멀미 겪는 게 나으니까.”
동생을 보기 위해 마법 멀미도 이겨낸 유진을 본 오스카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티그리스 가문에서 에이든 님이 오셔서 라피 아가씨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뭐? 마법? 아니 이렇게 눈이 펑펑 내리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이럴 땐 나가서 신나게 놀아야지. 안 그래도 라피 체력이 안 좋아서 걷다가 쓰러질 것 같아 걱정인데.”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유진은 문 앞에 섰다.
“라피, 오빠 들어간다.”
안에서 대답은 없었지만, 유진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일부러 마법 공부하는 것을 방해하러 갔는데 정작 두 사람은 벽난로 앞에 있었다.
“라피, 오빠 왔어. 오빠가 뭘 사 왔는지 좀 보렴.”
보들보들한 털 망토를 걸치고 폴짝폴짝 뛸 라피의 모습을 상상했지만, 그의 눈앞에는 상상 이상의 것이 펼쳐졌다.
에이든이 잠든 라피를 품은 채 앉은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안 그래도 요즘 주말마다 콜린이 와서 라피 옆에 찰싹 붙어 있어서 같이 있지 못했다. 한데 이젠 나이 많은 조카까지 붙어 있으니 한쪽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이것들이 나이 어린 고모가 오냐오냐 해 주니까 나이 어린 삼촌 무서운 줄 모르네…… 눈밭에서 굴려 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