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골이 다 흔들릴 정도로 뛴 에이든은 가까스로 진정했는지 내 볼에 제 볼을 비비적댔다.
“앗! 따가, 너 수염 안 잘랏니?”
“아! 미안해. 옷 갈아입자마자 회의장에 끌려와서 자를 시간이 없었어.”
“라피, 아빠는 수염 깔끔하게 잘랐단다. 그러니 이리 오렴.”
말은 오라고 했지만 난 이미 아빠의 품으로 강제로 이동한 후였다. 에이든의 품에서 빼앗다시피 안은 아빠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비비적댔다. 그러곤 곧장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의자에 앉더니 나를 무릎에 앉혔다.
“고모님! 너무 멋지세요.”
드레스가 아닌 기사 제복을 입은 사비나가 나를 향해 엄지를 세웠다.
“별거 아뉜데여.”
“어머! 별거 아니긴요. 이 기회에 아바마마께 뜯을 수 있는 거 전부 뜯으세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사비나의 옆에 에이든이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그 모습을 본 라파엘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예전처럼 대놓고 찢어 놓진 않았다.
“판테르 양, 정말이지 신세를 많이 졌네.”
사비나와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 실베스터 국왕이 슬쩍 끼어들었다. 흐뭇한 미소를 짓는 실베스터 국왕을 본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머 이럴쑤도 잇고, 저럴쑤도 잇져.”
대인배처럼 너그럽게 말한 나는 얌전히 앉아 시녀가 가져다준 구운 치즈를 먹으며 회의하는 걸 지켜봤다. 실베스터 귀족 중 내가 먹으면서 회의를 지켜보는 것을 보며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다시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 발컨 백작은…… 왕실 명부에서 지워질 것이며 극형에 처할 거네. 그리고 역모에 연루된 이들 역시 전 재산을 압류하고…….”
내가 오기 전까지 이야기하던 내용을 실베스터 국왕이 읊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발컨 백작의 역모와 관련된 문제가 회의장에서 마무리되었다.
“세 분께서는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지요. 최대한 수용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막판에 이 나라 사람이 아닌 제국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실베스터 국왕이 조심히 물었다. 그러자 아빠가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말했다.
“철광석 수출량을 좀 늘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더불어 금과 은도요.”
실베스터 왕국은 지하자원의 보고라고 할 정도로 사방에 광산이 존재했다.
“저희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알다시피 광산에서 일할 인원이 부족합니다.”
인구가 절벽까지 몰렸다고 할 정도로 실베스터 왕국은 사람이 없었다. 지하자원이 많아도 그걸 캐지 못하니 이른바 그림의 떡이었다.
“최근 들어 실베스터에서 자원 수출량을 줄이는 바람에 지금은 타국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러다가 그곳에서 가격을 멋대로 올리면 저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른바 수입 다변화를 꿈꾸는 아빠와 형부를 본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한 곳에서만 수입을 의존하게 되면 아무래도 수출하는 쪽이 갑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리된다면 상대방이 멋대로 값을 올려도 울며 겨자 먹기로 주고 사야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한쪽은 수입하고 싶어 하나 상대방이 인력 부족으로 수출량을 늘릴 수 없다고 말하니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지금부터 아이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늦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혜택을 준다고 해도 인구가 안 늘어나는데 강제로 합방을 시킬 수도 없지 않습니까.”
실베스터 왕국은 피임을 제대로 하는 건가. 다른 곳은 노동력 때문에 피임을 하지 않아서 아이를 많이 낳곤 하던데 말이다. 게다가 영유아 사망률이 높아서 일부러 아들딸 가리지 않고 낳는 편이었다.
“후아아암.”
실베스터 왕족과 귀족의 대화를 듣던 중 나도 모르게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순간 내게 시선이 쏠렸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업쓰면 사람을 데꼬 가묜 대자나여.”
“음?”
“사람 마니 잇는 곳에소, 사람 업는 곳으로 데꼬 가묜 다 되는데. 으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한 아빠가 탄성을 지르며 어깨에 뽕을 연달아 집어 넣었다.
“그러니까 인구가 많은 우리 동부나 남부 쪽 사람을 이곳으로 보내 일을 시키라는 말이더냐.”
“니에. 구래소 일하고 돈 벌구, 자원도 캐여.”
제국민이라고 해서 귀족이나 특정 계층을 제외하면 매일 일을 해야 했다. 특히 빈민촌의 사람들은 일거리가 없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신세도 부러워하며 볼 지경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일정 기간 이곳에서 일하게 하여 급료를 지급하고, 그리고 그 대가로 우리는 좀 더 싼 가격에 자원을 수입할 수 있게 하면 되지 않냐고 하자 다들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원은 묻혀만 있다고 돈이 되는 건 아니다. 그림의 떡인 자원을 캘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하자 라파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흉흉한 기세로 오더니 나를 빤히 봤다.
“멀 바?”
그렇게 노려본다고 안 무섭거든?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끼자 라파엘이 갑자기 아빠 품에서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머, 머야!”
“고, 고모님! 사돈어른! 정말 멋지십니다. 사비나가 존경하고 좋아할 만한 분입니다. 오! 세상에나…….”
나를 안은 라파엘은 갑작스레 수 분 동안 찬양하기 시작했다. 미카엘라를 도와준 것과 고대어 해석도 곁들여서 말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고모님께 조언을 구해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레 태세 전환을 한 라파엘에게 적응이 되지 않아 멍하니 그를 봤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해서 그런지 라파엘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요기 사람 마나. 요기 사람한테 무러바.”
이 나라 사람도 아닌 내가 말을 해 봤자 이들한테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대단하십니다. 고대어도 읽고 해석하실 줄 아신다더니.”
“오오, 이번에 공주님도 직접 받으셨다고요? 아직 네 살밖에 안 되었는데.”
“우리 손자도 네 살인데 이제 겨우 글공부하는 것도 빠르다고 하는데, 어휴! 판테르 공작님은 정말 좋으시겠습니다. 부러워요.”
“티그리스 공작님의 핏줄답게 마법도 할 줄 안다지? 이번에 마법으로 그놈들을 무찌르는 데 도움을 줬다고 하시더군. 아, 정말이지 우리 딸로 삼고 싶을 지경입니다.”
가면 갈수록 내 인기는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아빠와 할아버지 그리고 형부의 어깨와 광대도 천천히 승천했다.
“삐나 언냐랑 울 에이가 겨론하면 똑또칸 아가 태어날지도…….”
이 기회에 둘의 결혼에 제대로 못을 박은 나는 히죽 웃었다. 그 웃음을 본 두 사람은 양쪽 엄지를 세웠다.
“허허허, 판테르 양이 원한다면 결혼쯤이야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아직 시집 보낼 준비는 못 했으니 이곳에서 좀 더 가르치고 싶습니다.”
국왕의 허락이 떨어졌다. 정확히 언제 결혼할지 날짜는 잡지 않았지만 아마도 올해 넘겨 내년이나 내후년엔 할 수 있을 것 같다.
“탁얼한 선택이에여.”
“허허허, 원 별말씀을, 자! 그럼 우리 계약서를 작성할까요?”
자원의 수입 수출과 관련된 계약서가 빠른 속도로 만들어졌다. 서로 만족스러운 계약을 한 탓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역모를 저지른 이를 빠른 속도로 처단할 때 나는 오전엔 고대어와 뒹굴었고 낮엔 가족들과 잠시 시간을 내서 정원에서 굴렀다.
붕대를 풀지 못한 씨엘은 바닥에 얌전히 앉아 식빵만 구웠다. 신나게 놀다가 한쪽에서 고개를 내민 동물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저거 머야?”
“아! 저건 외래종인 뉴트리입니다. 식량과 모피를 얻기 위해 차이나 제국에서 들여왔는데 처절하게 실패했지요. 한데 저 녀석의 행동반경이 왕궁까지 넓혀졌나 봅니다.”
모피는 질이 떨어졌고 식량으로 삼기엔 고기가 맛이 없어서 굶어 죽을 것 같지 않은 이상 잘 잡지 않았다. 그 결과 뉴트리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서 생태계를 파괴하는 중이었다.
“후움, 구로쿠나.”
“네, 게다가 귀엽지도 않고 성질이 괴팍해서 애완동물로도 적합하지 않아서…….”
언제부터인가 내 곁으로 쪼르르 온 라파엘이 뉴트리에 관해 설명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가 산천초목까지 저 녀석의 입으로 다 들어가게 생겼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뿐 동물이네.”
“네, 차이나 제국에서는 어쩐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해로운 동물로 지정했지요. 한데 번식력이 왕성해서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습니다.”
라파엘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그에게 손짓해서 귀를 내게 닿게 했다.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게 소곤소곤 말했다. 처음엔 의아해하던 라파엘의 표정이 서서히 밝아졌다.
“고모님께서 말씀하신 게 딱 들어맞는다면…… 저는 고모님께 충성을 맹세할 겁니다.”
“구론고 피료 업써. 너어둬, 너어둬.”
손사래를 한 나는 이럴 때만 어린아이답게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온몸에 풀물이 들어서인지 이제껏 개방하지 않은 왕궁에 있는 왕실 전용 온천을 개방해 줬다.
이런 게 있으면 진작 말해 줄 것이지.
아빠의 가슴에 기댄 채 뜨거운 물에 몸을 불렸다. 밖은 차가웠지만 물은 따끈했다. 눈 오는 날엔 운치가 느껴질 것 같았다.
“왕궁에 이런 온천이 있는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군.”
“아빠, 우리한테는 요론 거 업써여?”
“응? 없어. 티그리스 공작가엔 있…… 크흠, 방금 건 못 들은 것으로 하자꾸나.”
이미 들은 것을 어찌 못 들은 것으로 하겠는가. 나중에 그곳으로 가 보기로 혼자 생각한 나는 아빠의 손에 의해 뽀득뽀득하게 씻겨졌다. 물에 팅팅 불어 터질 때까지 온천물에 담가진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아빠는 이미 짐을 다 싼 상태였다. 정확히는 고용인이 내 짐을 싸면서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계시다가 가시면 안 되려나. 저 치즈떡 같은 볼을 못 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늘어질 것만 같아.”
“아버지가 직접 데리러 왔는데 어떻게 잡겠어. 얼른 사비나 공주님이 결혼하길 빌어야 하나. 그리되면 사비나 공주님이 한 번씩 치즈떡 아가씨를 데려오실 테니까.”
저들끼리 속닥속닥 이야기하는 게 들린 나는 픽 웃으며 씨엘을 쓰다듬었다. 이번 발컨 백작의 역모에 맞서 싸운 공신 중 하나인 씨엘의 목엔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실베스터 국왕이 씨엘에게 기사 작위를 준 것이다. 그리고 내겐 무늬뿐인 백작위를 주셨다. 품위 유지비를 빵빵하게 준다는 말에 덥석 받긴 했지만.
더불어 할아버지가 예쁜 젤리 색깔 보석이 줄줄이 달린 팔찌를 손목에 채워 줬다. 숙면에 좋은 효능이 있다며 절대 빼면 안 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면서 히죽히죽 웃을 때 아빠가 말했다.
“이제 가자꾸나. 집을 너무 오래 비워 뒀어.”
“니에, 얼룬 가여. 제니랑 보고 시퍼여.”
모처에서 전부 쓴 마법 스크롤이 리필이라도 된 듯 가득 담긴 가방을 멘 나는 아빠 손을 잡고 졸랑졸랑 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언제든지 판테르 양에게 개방된 곳이니 원할 때마다 연락만 하게나.”
실베스터 국왕 및 왕족이 전부 나와서 나를 배웅했다.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이들은 전원 나를 좌우 위아래로 돌려보고는 이상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특히 에리카 언니는 펑펑 울다 못해 쓰러지기까지 했다. 모두를 눈물 바람으로 만든 원흉인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그들에게 안겼다.
* * *
몇 달이 훌쩍 흘렀고 어느새 새해가 지나 버렸다. 소복소복 쌓이는 눈을 보던 중 실베스터 왕국에서 보낸 물건이 왔다는 말에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고모 덕분에 뉴트리가 거의 다 잡히다시피 했대. 그리고 갑자기 임신한 가족이 늘었다고 그러네. 이건 그 대가인 모양이야.”
에이든이 직접 실베스터 왕국에서 보낸 설향과 구이용 치즈, 그리고 스노우 젬 등을 가지고 왔다.
“실베스터 왕국에서는 뉴트리와 인구 문제로 고생하는 것 같던데 어떻게 한 거지. 우리 딸?”
아빠의 물음에 나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우움, 암것두 아뉜데…… 뉴뜨리가 정력에 좃타고 햇쓸 뿐이에여.”
“컥!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