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모든 일이 일단락되었다. 급히 기절한 미카엘라와 라피, 그리고 갓 태어난 아이를 진료케 했다. 다행히 모두 건강하다는 진료 결과가 나왔다.
“그 상황에서 출산을 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위생적이지 않은 환경이었을 터인데.”
건강해 보이는 아기를 본 왕궁의가 놀라 탄성을 지를 정도였다.
“라피가 클리어 마법을 해 줘서…… 후우.”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난 미카엘라는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 세세히 말했다. 라피가 출산을 도왔고 아기를 받아 탯줄까지 잘라 줬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실베스터 왕족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우리 고모님이 최고예요. 안 그런가요? 오라버니.”
“크흠, 뭐 그 점에 관해서는…… 고, 고마운 일이 분명해. 아이가 깨어나면 사례하도록 하지.”
“오라버니, 우리 고모님한테 돈만 던져 주고 끝낼 것은 아니죠? 참고로 우리 고모님은 돈이 많아요.”
에이든에게 듣기로는 분명 올 땐 젤리와 사탕이 가득한 가방을 들고 오는데 돌아갈 땐 젤리와 사탕을 닮은 보석이 가득하다고 했다. 게다가 판테르 공작이 라피 전용 창고를 줄 정도면 상당한 부자인 게 분명했다.
“크흠흠, 뭐 그럼 나중에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주면 되지 않느냐.”
“그 아이라니요. 고모님이라니까요.”
“고모님은 너한테만 한하는 거겠지. 호칭 문제는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하마.”
평소라면 제 뜻대로 했을 라파엘이 한발 물러서자 사비나도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다.
“지금 가서 고모님을 살펴봐야겠어요.”
“그건 좀…… 가족들이 죄다 몰려들었으니 나중에 찾아보는 게 나을 것 같다만.”
미카엘라는 금방 깨어났지만 라피는 아직 깨어났다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지금 가 봤자 고래 틈에 낀 새우 신세가 되어 등이 터질 게 분명했기에 늦게 가라고 충고한 라파엘이었다.
“한데 아이가 왜 안 깨어나는지 자네는 아는가?”
“네? 아, 제가 진찰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어른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 아이는 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겁니다.”
어른이 1의 스트레스를 경험했다면 같은 환경에서 아이는 2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그걸 잘 설명해 준 왕궁의는 지금 라피를 진찰하고 있는 왕궁의의 명복을 빌었다.
타국에서 온 세 가문의 가주에게 탈탈 털릴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우리 말랑 콩떡이 이렇게 찌그러졌는데 뭐? 이상이 없어?”
“우리 구운 찹쌀떡이 물떡처럼 축 늘어져 있지 않은가! 근데도 괜찮아?”
“우리 인절미에서 콩가루가 다 털렸잖은가. 근데 양호하다고? 자네 눈엔 이게 양호한 것으로 보이나!”
라피를 진찰한 왕궁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기절했지만 몸 건강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이상이 없습니다.”
하늘에 맹세코 왕궁의는 진실만을 말했다. 그 결과 가주들의 눈동자에서 시퍼런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타들어 가는 정도가 아니라 얼어붙어 버릴 것 같았다.
[여보, 왕궁의가 괜찮다고 하지 않습니까. 근데 다들 왜 그러는지 원…… 됐고, 통신구나 더 가까이 대세요. 옆에서 다니엘과 헬레나도 애가 닳은 상태니까요.]
[제롬, 뭐 해요? 얼른 우리 라피 더 크게 보여 주세요.]
집에서 오매불망, 안절부절못한 채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을 위해 통신구를 켜서 라피를 보여 줬다. 깨끗하게 씻겨진 채 곤히 잠든 아이를 본 가족은 그때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진짜 우리 고모, 괜찮은 거 맞죠?”
라피를 지켰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미카엘라와 함께 있으면 가장 안전할 줄 알았던 에이든은 그게 착각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피범벅이 된 라피를 보고 에이든은 그 자리에서 굳은 채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두 눈이 퉁퉁 부은 에이든의 모습을 본 티그리스 공작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야 안심한 에이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다들 나가십시오. 저는 라피랑 좀 쉬어야겠습니다.”
아비라는 이유로 판테르 공작은 딸과의 시간을 합법적으로 보낼 수 있었다. 다들 쫓아낸 판테르 공작은 미동도 하지 않은 라피의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곤 한쪽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는 씨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녀석, 처음으로 밥값 했구나. 장하다.”
뀨우.
“아플 테니 쉬거라.”
판테르 공작의 말이 끝나자 씨엘은 하품을 하더니 그대로 잠들었다. 씨엘이 잠든 것을 확인한 판테르 공작은 곧장 라피의 옆에 누웠다. 그러곤 속으로 안도하며 딸을 조심히 품었다.
“여보, 우리 딸 지켜 줘서 정말 고마워. 여보…… 우리 딸을 좀 더 확대시켜야 할 것 같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시간이 훌쩍 흘렀다. 라피가 무사하다는 것을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은 에이든은 몰래 급습했다.
본디 실베스터 왕궁에는 마법 사용을 금하는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발컨 백작의 역모로 잠시 풀어 놨고 아직 결계를 발동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당당하게 라피의 방에 좌표를 설정해서 그곳으로 워프를 했다.
안전하게 소리 없이 착지한 에이든은 라피를 보고는 심장이 간지러워졌다. 판테르 공작의 가슴팍에 엎드린 채 고롱고롱 잠든 아이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귀여웠다.
제 아비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대며 햄 볶는 표정을 짓는 라피를 본 에이든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연방 다행이라고 생각한 에이든은 계속 보고 있을 수 없어 서둘러 그곳에서 나왔다.
“하여튼, 우리 딸은 못 꼬시는 놈이 없군 그래. 뭐 나도 꼬심을 당했지만.”
에이든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잠에서 깼다. 하지만 눈을 뜨지 않은 판테르 공작은 픽, 웃으며 제 상체에 엎어져 잠든 딸의 등을 조심히 쓰다듬었다.
“자장, 자장…… 아무 근심 걱정 없이 보석길만 걸으면서 자려무나.”
* * *
생각하지도 못한 아빠를 보고 나도 모르게 안겨서 펑펑 눈물을 흘리던 게 마지막으로 본 거였다. 막 깨어나 두 눈을 끔뻑끔뻑 뜬 나는 주변을 살폈다. 핏기가 스민 붕대를 감은 채 곤히 잠든 씨엘 외엔 존재하지 않았다.
“씨엘, 마니 아포?”
내 물음에도 씨엘은 꼼짝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약을 먹고, 깊게 잠이 든 것 같다. 나를 지키기 위해 제 목숨도 아끼지 않고 덤벼든 씨엘의 얼굴에 살며시 입 맞췄다.
오늘따라 더욱 사랑스러운 씨엘을 보며 미소 지었다.
“씨엘, 내 목숨 구해줫쓰니까 담에 소원 하나 드러줄게.”
씨엘이 내 말을 듣고 있는지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 씨엘을 쓰다듬을 때 문득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꿍꾼 건가.”
분명 진짜 아빠 품 같았는데, 아빠가 없자 꿈꾼 것은 아닌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히유.”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아포.”
온몸에 통증이 느껴졌다. 기절한 후에 발컨 백작한테 밟히기라도 한 건가. 얼른 옷을 들춰 봤지만 내 살결은 보송보송하고 매끄러웠다. 멍든 자국은 하나도 없었다.
“아빠 보고 시푼데. 그나저나 머가 어캐 된 거지?”
내가 기거한 방에 누워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발컨 백작의 역모는 실패한 건가. 체구에 비해 조금 큰 머리를 데굴데굴 굴릴 때 문이 열리며 이곳에서 내 시중을 들어 주던 시녀가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라피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기절해서 판테르 공작님의 품에 안겨 오셔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웅? 아빠? 아빠 왓써여?”
“어머! 기절하셔서 모르시나 보군요. 네, 판테르 공작님과 티그리스 공작님 그리고 아퀼라 공작님이 오셨어요. 그분들이 저희를 구해 주셨답니다.”
세숫물을 가져와서 세수를 시키고 새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동안 내가 모르는 것을 전부 알려 줬다.
“우웅, 아빠 오딧써여?”
“판테르 공작님이 보고 싶으세요? 지금 회의 중이세요.”
“회의?”
“네, 발컨 백작을 어떻게 처리할지 이야기하는 중이세요. 혹시 그곳에 가고 싶으세요?”
끄덕끄덕-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는 알겠다는 듯이 방긋 웃으며 잠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 머리도 예쁘게 빗어 빨간 리본으로 묶었다.
“이곳에서 좀 거리가 있는 곳이라 걸어가기 힘드실 거예요. 제가 안아도 될까요?”
안 그래도 막 깨어나서 힘이 없었던 나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기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안아 올렸다.
“씨엘, 다녀올게.”
잠든 씨엘에게 인사를 하자 시녀가 나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방 밖에 있는 이들은 전부 내 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세 가문의 기사를 본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니에, 갠차나여. 군데 나 지금 쩰리 업쪄여.”
항상 젤리나 사탕을 가지고 다니면서 뿌렸던 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이고,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흰 아가씨가 무사한 것을 보니 구운 찹쌀떡 백만 개를 받은 기분이 듭니다.”
“맞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건강하게 무럭무럭 크기만 하십시오. 우리 말랑 콩떡 아가씨를 못 볼까 봐 얼마나 간을 졸였는지 모릅니다. 하하하.”
“옆으로 조금 더 커도 됩니다. 인절미에 다시 콩가루를 묻혀야겠습니다.”
내 기분이 저조하다는 것을 느낀 세 가문의 기사들이 너도나도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러곤 나를 안은 시녀가 움직이자 죄다 따라왔다. 아빠와 할아버지, 그리고 형부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지키라고 했다나 뭐래나.
뜻하지 않게 무시무시한 호위기사를 거느리며 회의장으로 간 나는 시녀의 품에서 내려왔다.
“판테르 영애 오셨습니까.”
“어서 오십시오. 국왕 전하께서 판테르 영애께서 오시면 이유 불문하고 안으로 들이란 명을 내리셨습니다.”
예전보다 나를 보는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듯한 실베스터 기사의 말에 나는 방긋 웃었다.
“문 열어주떼여. 아빠랑 하부지랑 혐부 만나고 시퍼여.”
“오구오구 그러셨습니까. 하하하, 문을 열 테니 조심히 들어가시지요.”
문을 지키고 있는 기사가 웃음을 머금으며 문을 열어 줬다. 냉기가 스민 진지한 분위기의 회의장 안으로 들어간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다들 나를 보는데 몸 둘 바를 몰라 살짝 배배 몸을 꼬았다.
“아가, 우리 새끼! 아빠 보고 싶어서 왔구나.”
“아니네, 이 할아비 보러 온 게 분명하네.”
“우리 처제는 조금이라도 젊은 형부 보러 왔…… 처제!”
서로 자신을 보러 왔다고 말하는 분들을 보며 걸음을 옮기다가 발이 꼬여서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내 가족들 앞에서 넘어진 것은 괜찮지만 실베스터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넘어지니 쪽팔렸다. 잠시 넘어진 채 가만히 있던 나는 쪽팔림을 무릎 쓰고, 빨리 일어나 원피스를 탁탁 털었다.
세 명이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펼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내가 간택을 해 주길 바라는 듯 매우 간절한 시선으로 봤다. 매우 부담스러운 시선에 어색한 미소를 지을 때 한쪽 구석에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고모, 괜찮아? 이제 안 아파?”
세 사람 사이에 낄 짬밥이 아닌 에이든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물었다.
“에이, 이리 와바.”
손짓하자 에이든이 후다닥 뛰어서 내 앞에 섰다.
“이캐 도라바, 요번엔 저캐 도라바.”
“어, 어? 왼쪽으로 돌아? 이번엔 오른쪽으로?”
내가 손가락을 움직여 돌아 보라고 하자 몇 바퀴다 제자리에서 돌았다. 그런 에이든을 위아래로 한 번 더 훑어본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 다행이다. 안 다쳣꾸나.”
“라피, 아가! 아니 아빠 앞에서 다 큰 나이 많은 조카를 걱정한 것이더냐.”
아빠가 조금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잘못 말하면 삐칠 것 같았기에 나는 머리를 굴리며 말했다.
“우웅, 아빠! 자고로 사랑은 내리 사랑이랫써여.”
“우와! 고모, 정말정말 사랑해. 우리 고모가 제일 좋아.”
제 부모보다 더 좋다고 말한 에이든은 나를 안아 올리더니 그대로 방방 뛰었다.
“좀 가마니 잇써바. 이젠 털어 머글 콩가루도 업쓰니까 고만 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