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밀레니어 후작이 사람을 붙여 주지 않은 것을 극심하게 후회를 할 때 셋은 자연스럽게 갈라졌다.
“난 에이든이 있는 쪽으로 가 보겠네.”
티그리스 공작이 먼저 찢어져 걸음을 옮겼다.
“지금 두 군데서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둘 중 한 곳에 라피가 있을걸세.”
혹시 몰라 라피의 가방에 추적석 몇 개를 넣어둔 판테르 공작이었다. 등록된 추적석을 추적하는 나침반 바늘 두 개가 양쪽으로 움직이자 판테르 공작과 아퀼라 공작은 서로 헤어졌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던 판테르 공작은 이를 사리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들이 오기 전까지 치열하게 싸운 흔적이 여실하게 남아 있었다. 시신을 수습할 시간이 없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모습에 판테르 공작은 불안함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아가씨께서는 무사하실 거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기사의 옆구리에서 피가 꾸역꾸역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카이는 곧장 판테르 공작을 위로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 구운 찹쌀떡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치지 않을걸세. 그 녀석은 하늘에서 떨어졌어도 안 다쳤네.”
실제로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라피는 다치지 않았다. 게다가 유진과 함께 존재를 지워 버린 녀석들에게 추적당하다가 구덩이에 빠졌는데도 멀쩡했다.
이는 필시 세라피나가 보호하는 게 분명했다. 품고 젖을 물려 주지 못한 아이를 하늘에서 보며 보호하며 곱게 커 가는 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
“얼른 가세나.”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라피를 볼 생각에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았다.
“음? 저쪽입니다. 아까 밀레니어 후작님이 알려 준 곳이 확실합니다.”
카이의 말에 앞을 봤다. 밀레니어 후작 근처에 있는 기사와 다른 복장을 한 이들이 건물을 둘러쌌다. 두 눈을 시뻘겋게 뜬 라파엘이 대치 중이었다.
“당장 항복하라. 너흰 이미 포위되었다.”
라파엘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상대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저런 것들은 말로 해서 들어 먹히지 않을 게 분명한데 굳이 설득하려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음? 누구…… 아!”
뜬금없이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라파엘은 돌아보고는 그대로 굳었다. 흑표범이 수놓인 문장을 본 라파엘은 그가 판테르 가문의 가주임을 알 수 있었다. 라피가 항상 입이 닳도록 말한 가슴 빵빵한 아빠가 기사들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판테르 공작님, 오셨습니까?”
“네, 왔습니다만…… 만약 우리가 적이었다면 실베스터 왕자님은 앞뒤로 협공당했을 겁니다. 어찌하여 뒤를 신경 쓰지 않은 겁니까.”
“그, 그건…… 죄송합니다. 이 안에 더는 숙부의 잔재물들이 없을 거라고 판단해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 와중에 판테르 공작에게 혼난 라파엘은 순순히 제 잘못을 시인했다. 미카엘라가 몸을 숨긴 곳에 숙부의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걸 나중에 알게 되어 정신없이 왔건만 모처는 완벽하게 점령당하다시피 했다.
“저들의 반응을 봐서는 아직 왕자비와 우리 딸이 잡히진 않은 것 같군요.”
“네?”
“만약 두 사람이 잡혔으면 진작 끌려 나와서 인질로 활용되었을 겁니다.”
안에서 죽을힘을 다해 발컨 백작과 작당한 기사들의 공격을 막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열고자 하는 인력과 안에 있는 인력 차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소수로 숨었을 건데 배신자 때문에 발각되었을 터이다. 처음은 어찌저찌 막는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방어하는 쪽이 밀리기 마련이었다.
“공격합시다.”
“네? 하지만 그러다가 미카엘라와 판테르 양이 위험해지면…….”
“이대로 손 놓고 말로만 협박한다고 저들이 두 사람을 간단히 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럴 땐 선 공격이 최선의 방어입니다. 쳐라!”
라파엘의 대답 따윈 필요 없었다. 안에 있는 왕자비의 생사보다는 얼른 라피를 봐야 했다.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말에 우선권을 달라고 요청했던 판테르 공작이었다. 그렇기에 라파엘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발컨 백작과 일당은 포위당했지만 안에 미카엘라와 라피가 있어서 함부로 공격하지 않았기에 라파엘이 두렵지 않았다. 언제든지 닫힌 문을 열고 안에 있는 소수의 기사쯤은 금방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나중에 두 사람을 인질 삼아 안전하게 탈출을 꿈꾼 이들의 앞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흑표범이 아가리를 쩍 벌린 채 뛰어왔다.
“이 안에 누가 있는 줄 알고…….”
전체적으로 지고 있었지만, 최소한 이 안에 두 사람 때문에 자신들이 우위에 섰다고 생각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노도와 같이 밀고 들어오는 판테르 가의 최정예 기사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우리 찹쌀떡 아가씨가 고작 너희에게 당할 성싶더냐.”
“우리 아가씨는 대마법사가 되실 분이시다. 이런 곳에서 너희와 놀아 줄 시간 따윈 없단 말이다.”
“우리 찹쌀떡 아가씨가 찌그러져 있으면 너흰 다 죽었어.”
가방에 젤리와 사탕을 넣어 메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 주면 정 없다고 꼭 두 개씩 주곤 했다.
‘요고 먹구 힘내여. 빠샤!’
‘글구 꼭 치카치카 하세여.’
조그만 손으로 꼭 두 개씩 사탕과 젤리를 준 후엔 양치질하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본인은 물의 정령을 물고 있기 싫어서 제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바동대면서 말이다.
판테르 공작저에서 일하는 존재 중에 라피의 사탕과 젤리를 안 받아 본 이는 없었다. 어린아이가 준 것을 어찌 먹겠는가. 깨끗한 유리병에 하나둘씩 담아 보관했다. 알록달록한 사탕과 젤리가 쌓이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판테르 공작저의 유일한 어린아이이자 귀염둥이 찹쌀떡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을 보는 게 낙인 이들이 수두룩했다.
그렇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라피를 구해야만 했다. 제 한 몸 돌보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역당들 따윈 구운 찹쌀떡을 구하려는 기사들에 의해 제압당했다. 아니 제압했다는 표현보다는 카이의 휘하에 있는 비밀 친위대가 발컨 백작 편의 기사들을 도륙했다.
매우 잔인한 손속이었지만 그걸 본 판테르 공작은 절대 눈을 찌푸리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아…….”
그 모습을 본 라파엘과 휘하 기사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가문을 잇지도 못하는 여자애를 구하기 위해 상대를 압살하는 친위대의 실력에 혀가 절로 내둘러졌다.
“그때 그…….”
머리로는 생각이 나는데 입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세라피나를 죽인 왕국을 단숨에 멸망시킨 가주의 휘하 친위대의 실력은 감히 입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공작님, 길을 뚫었으니 얼른 가시지요. 아가씨께서 울면서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우리 라피가 우는 그 즉시 저들의 처자식도 말살해 버릴걸세.”
카이가 앞장서서 길을 뚫으며 말하자 판테르 공작이 뒤따르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곤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라, 라피…….”
무슨 일이 있어도 무사하길 바랐다. 일전에 제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냅다 던져 파닥이는 아이를 받았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뛰었다.
이곳은 라피의 홈그라운드가 아니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어도 실베스터 기사들은 라피가 아니라 왕자비를 우선으로 지킬 게 분명했다. 이를 꽉 깨문 판테르 공작은 활짝 열린 철문 틈으로 보았다.
라피를 보호하려는 씨엘이 적의 공격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것을 말이다.
“씨엘!”
“이런, 애완동물이 다쳐서 어쩌지.”
“오쪼긴, 아조씨 목숨으로 가파여.”
“뭐? 하하하, 공작가에서 주워서 기른 아이라 그런지 말하는 본새하고는.”
“닥쵸! 파이어!”
애타게 보고 싶은 아이가 마법 스크롤을 찢으며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절망하며 울음을 터트리려나 싶었지만 라피는 절대 그를 피하지 않았다. 미카엘라 앞에 서서 그녀와 갓 태어난 아이를 지키려는 듯 선 라피가 갑작스레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외쳤다.
“아빠!”
“여기에서 아빠를 불러도…… 큿!”
아이의 부름에 판테르 공작은 제 딸을 가린 발컨 백작의 얼굴을 한 손으로 잡고는 밀어 버렸다.
“내 딸 보는 데 방해하지 말고 꺼…… 크흠, 우리 딸! 아빠 불렀니?”
오랜만에 보는 거니 최대한 말끔한 모습으로 미소 지은 판테르 공작이었다. 그런 그를 본 라피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빠가 왔으니 이젠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황금색 눈동자에 이슬이 방울방울 맺히더니 후다닥 달려와 안겼다.
“아빠, 왜 이제 왓써여. 아빠아아아.”
“오, 우리 딸! 미안, 아가…… 아빠가 늦게 와서 미안.”
품에 안긴 채 펑펑 운 라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기절했다. 놀란 판테르 공작은 딸을 품은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안을 순식간에 평정한 카이와 친위대는 그 모습을 보고는 외쳤다.
“저것들 한 번씩 더 찔러 버려!”
이미 숨이 끊긴 자에게도 인정을 베풀지 않았다. 도륙했다는 표현이 옳은 현장을 본 미카엘라는 갓난아이를 품은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미, 미카엘라! 괜찮…… 오, 세상에나!”
깨끗하게 뚫린 길로 들어온 라파엘은 미카엘라가 안은 아이를 보고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분명 예정일이 한 달 이상 남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험난한 곳에서 아이를 낳다니. 괜히 미안하고 가슴이 아팠다.
“와, 왕자님…… 왕자님, 흐윽…….”
항상 기사답게 눈물을 아낀 채 살아왔던 미카엘라는 라파엘을 보자 순간 긴장이 풀렸다. 아이를 품은 채 눈물을 흘린 미카엘라를 본 라파엘이 다가와 안아 줬다.
“쉬쉬, 이젠 괜찮아. 다 끝났으니까…… 이곳에서 아기를 낳느라 정말 고생 많았어.”
“흐윽, 라, 라피가…… 라피가 도와줬어요. 으으윽, 라피가 아니었으면 저도 아기도 죽었을지도 몰라요.”
“미카, 엘라? 여보! 부인!”
봇물처럼 눈물이 터진 미카엘라는 라파엘의 가슴에 죄다 닦아내며 가까스로 말했다. 그러더니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그대들은 여기 얼른 정리하게.”
라피를 안은 판테르 공작은 곧장 기사들에게 정리할 것을 명한 후 밖으로 나왔다. 추적석이 있는 곳으로 갔다가 비어 있는 라피의 방만 보고 급히 돌아온 아퀼라 공작이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처제는 괜찮습니까? 피가…….”
피범벅인 라피를 본 아퀼라 공작이 화들짝 놀라 급히 제 손수건으로 아이의 얼굴을 닦았다.
“괜찮네. 그 백작놈 앞에서 물러섬 없이 당당하게 말하더군. ‘닥쵸.’ 라고.”
“크흡, 우리 인절미 처제답긴 하네요.”
놀란 와중에도 판테르 공작이 라피의 말을 흉내내자 아퀼라 공작의 얼굴에 웃음이 스몄다.
“라피 아가씨는 괜찮으십니까?”
“말랑 인절미 처제 아가씨는 잠드신 겁니까?”
라피가 한 번씩 다녀갈 때마다 사탕과 젤리를 뿌려서인지 아퀼라 공작가의 기사들도 아이의 안부를 물었다.
“우리 라피는 괜찮네. 모두 라피를 위해 여기까지 와 줘서 정말 고맙군.”
“우리 인절미 처제를 위해서라면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피 덕택에 다시 두 집안이 찰떡처럼 떡하니 붙었다. 잠시 후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돌아온 티그리스 공작은 멀쩡해 보이는 에이든을 데리고 왔다.
“이 녀석은 괜찮네. 어차피 마법사라서 후방 지원만 해서 매우 멀끔하네. 한데 우리 말랑 콩떡이는 왜 이런 것인가.”
두 눈이 부풀어 있었다. 아퀼라 공작이 닦았지만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었다. 라피를 보고 불안해하는 티그리스 공작에게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그러자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라피가 나를 닮아서 강단이 있군.”
뭐든 라피에게 갖다 붙이기를 좋아하는 티그리스 공작을 본 사위와 손녀사위는 그저 영혼 없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